<새로 쓰는 나주 동학농민혁명사-(2회)> 2. 광주 침산·사창 전투

박용규 박사 | 기사입력 2023/01/21 [20:31]

나주 서성문 전투 패배 이후, 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은 1894년 8월 13일 수행원 10여 인을 데리고 나주 서성문을 통과하여 나주목사 내아에서 나주목사 민종렬과 담판하였다. 담판에서 전봉준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 탐관오리의 학정을 제거할 것,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것, 그리고 수성군을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민종렬은 “내 일은 성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전봉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오지영, <동학사>(초고본), 1924.; 오지영, <동학사󰡕, 영창서관, 1940.; <전봉준공초> ; 이병수, <금성정의록>갑편.) 전봉준은 이 날 금성관 서익사에서 자고 다음 날 나주성을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는 집강소를 통해 관민상화(官民相和)의 내부 개혁을 추진해야 했고, 일제의 침탈에 맞서서 전 민족이 단결하여야 할 때였다.

 

▲1894년 8월 13일 전봉준 장군과 나주목사 민종렬이 만나 담판을 나눈 ‘나주목사 내아’의 모습(2022년 10월 28일 촬영). ⓒ 박용규     ©브레이크뉴스

 

이후 전봉준은 1894년 9월 10일 경복궁을 점령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라도 삼례에서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2차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손화중·최경선은 일본군의 서남해 바닷길 침략에 대비하고, 전봉준의 항일 봉기를 배후에서 보장(保障)하기 위해 광주와 나주 일대를 지켰다.(<전봉준공초>; <동학사상자료집> 제1권, 아세아문화사, 1979, 325∼326쪽.)

 

동학의 최고지도자 최시형도 1894년 9월 18일(양력 10월 16일)에 항일전에 나서라고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일제히 일어나 항일 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손병희에게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휘의 전권을 주었다.

 

1894년 9월 29일(양력 10월 27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총리대신)이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와 상의하여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이라”라는 살육 작전을 결정하였다.(나카츠카 아키라, 「3·1독립정신과 동아시아의 평화」, <독립정신>74,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2014, 3·4, 34쪽.) 이 날에 동학농민군 학살을 전담할 3개 중대 파견도 결정하였다. 같은 날 밤 9시 대본영에 있던 가와카미 병참총감이 “향후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는 명령을 조선에 있는 남부병참감부와 인천병참감부에 내렸다.(이노우에 가쓰오,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모시는사람들, 2014, 77쪽.) 

 

▲1894년 9월 29일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죽이라”고 결정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수상.  ©브레이크뉴스

같은 해 10월 10일(양력 11월 7일) 인천 병참감부 이토 스케요시(伊藤祐義) 사령관이 인천 병참감부에 출두한 동학농민군 학살 전담 현지 사령관인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에게 “동학당을 죽여 없애라. 동학당 우두머리는 체포하여 경성 일본공사관으로 보내라. 조선 군인들을 모두 지휘하라. 동학 비도들을 강원도와 함경도 쪽, 즉 러시아 국경에 가까운 곳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라.”라는 훈령을 내렸다.(미나미 고시로, 「동학당정토경력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5(미나미 고시로 문서), 74쪽. ; 「후비보병 제19대대 운영상의 훈령과 일정표」, <주한일본공사관기록>1권, 153∼156쪽. ; 「동학당 진압을 위한 제19대대 파견에 따른 훈령」,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권, 65∼69쪽.)  

 

이로써 미나미 고시로가 조선 군대에 대한 지휘권·명령권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의 관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조선의 관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미나미 고시로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체포·관할권도 가졌다.

 

다시 10월 14일(양력 11월 11일)에 미나미 고시로는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일본공사로부터 동학당 토멸에 관한 특별훈령을 다시 받았다.(미나미 고시로, 「동학당정토경력서」, 74쪽.) 10월 15일(양력 11월 12일)에 미나미 고시로는 3개 중대를 이끌고 용산을 출발하여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면서, 동학농민군을 계속 학살하였다. 

 

같은 해 10월 15일(양력 11월 12일)경에 손병희 통령이 동학농민군 5천 명을 이끌고 논산에 이르렀다. 논산에서 전봉준이 이끌고 온 동학농민군 부대와 연합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향해 나아갔다. 

 

한편 1894년 9월 29일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 소모사에 임명되었다. 이제 민종렬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양반 유생들에게 민보군의 결성을 독려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10월 15일 미나미 고시로가 후비보병 19대대의 3개 중대를 이끌고 용산을 출발하여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동학농민군을 압살하며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민종렬은 이에 발을 맞추어 10월 20일에 나주성 밖에서 점거하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압살하도록 수성군을 내보냈다. 이때부터 수성군은 나주성 방어에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적극적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1894년 10월 20일 민종렬이 김창균을 선봉으로 삼고, 김성진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정석진을 후군(後軍)으로 삼아 각각 포군(砲軍) 200명을 거느리고 나주에서 5리 떨어진 석현리(石峴里)에 출진(出陣)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포군(砲軍)은 나주 수성군이 무장한 대완포군(大碗砲軍)과 천보조총군(千步鳥銃軍)을 가리킨다.

 

같은 해 10월 21일 손화중이 이끈 동학농민군 700여 명이 광주(光州) 침산(砧山)에 주둔하여 있자, 도통장 정석진이 과녁 하나 정도 되는 거리에서 수성군을 1자로 나란히 배치하고 먼저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포수 강춘삼(姜春三)이 대완포(大碗砲)를 쏘고 천보총 부대가 천보총(千步銃)을 연발하여 쏘자, 동학농민군은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참고로 침산은 당시 나주목이 관할한 땅이었다. 1949년 8월에 광주시 광산구 동곡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침산 주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산동 446-2번지이다.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산동 446-2번지에 소재한 침산(사진 출처: <2021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학술대회 자료집>, 나주시, 387쪽.). ©브레이크뉴스

뒤이어 접응장(接應將) 손상문(孫商文)·박재구(朴在九)·구유술(具有述)·김학술(金鶴述)·전학권(錢學權) 등이 포군 100명을 거느리고 왔다. 

 

그러나 광주(光州)의 선암(仙巖)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만여 명이 황룡강 강변에 진을 치고 깃발을 세우고 포를 쏘고 있었다. 여러 수성군 장령들이 강변에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도통장 정석진과 박재구만이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재구(朴在九)가 군대를 지휘하여 먼저 나아가며 “뒤에 떨어지는 자는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수성군 군사들이 모두 앞 다투어 공격에 나섰다. 도통장 정석진이 강안에 바싹 접근해서 강춘삼에게 명령을 내려 먼저 대완포를 쏘게 하니, 포환이 닿은 곳에 동학농민군이 어지럽게 죽었다. 천보대(千步隊)의 전공서와 김기옥 등이 천보총(千步銃)을 연발하여 동학농민군을 많이 죽였다. 그리하여 동학농민군의 소굴이 있는 사창(社倉)에 들어가 그 소굴을 불태웠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수천여 명의 비도들(동학농민군을 지칭함: 필자)이 사창(社倉)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일시에 쫓아가 죽였으며, 일제히 대포를 쏘니 탄환에 맞아 죽은 자들이 23명이었다.”(「호남초토사민종렬위치보사(湖南招討使閔種烈爲馳報事)」)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계속해서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1894년 10월 21일 광주 침산 및 사창 전투에서 출전한 수성군 장령(지휘관)이 “호장(戶長) 정태완(鄭台完), 이방(吏房) 손상문(孫尙文), 중군(中軍) 전첨사(前僉使) 김성진(金聲振), 퇴교(退校) 김창균(金蒼均), 난후별장(攔後別將) 전사과(前司果) 전학권(錢鶴權), 하리(下吏) 박시홍(朴時弘)·이돈기(李敦祺), 산포수(山砲手) 강춘삼(姜春三)”(<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 7∼8쪽)이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여기서 정석진(=정태완)·손상문·김성진·김창균·전학권·박시홍·이돈기는 모두 나주 향리층(이족 吏族)이었다. 이채를 띤 것은 박재구(朴在九, 1857∼1931, 다른 이름으로 박재규(朴在圭))가 침산·사창 전투에서 수성군 장령으로 참여한 사실이다. 향리 출신 박재구는 1889년 나주 민란 시기에 향리 정석진(정태완)·김창균·최윤룡 등과 함께 간리(奸吏, 간악한 향리)로 지목된 인사였다. 

 

▲*필자/박용규 박사    ©브레이크뉴스

호남초토사이며 나주목사인 민종렬은 나주 수성군이 “10월 21일 나주 동쪽 30리 광주의 침산, 사창 등지에서 전투를 치를 때에, 도적 무리(동학농민군 지칭) 23명을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쏘아 죽였다.(十月 二十一日 州東三十里 光州砧山社倉 等地 接戰時 砲殺賊黨二十三名)”(<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 2쪽)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로써 침산·사창 전투에서, 나주 수성군이 동학농민군 23명을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일방적으로 쏘아 죽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hispak@hanmail.net

 

*필자/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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