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나주 동학농민혁명사-(1회)>나주 동학농민혁명 5대 전투

박용규 박사 | 기사입력 2023/01/21 [12:52]

나주 동학농민혁명 5대 전투 기술은 이병수의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갑편(<겸산유고>)과 「갑오토평일기(甲午討平日記)」(<난파유고>)와 「호남초토사민종렬위치보사(湖南招討使閔種烈爲馳報事)」(<갑오군정실기>)에 의거하였음을 밝혀둔다.

 

1. 서성문 전투

 

일제는 1894년 6월 21일 경복궁 점령사건을 일으켜 남의 나라의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기존의 민씨 정권을 타도하였으며, 친일 개화파 정권을 세웠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남의 나라의 국권을 현저하게 침탈한 사건이었다. 유인석 의병장은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미(1895) 12월)에서, “갑자기 갑오년(1894) 6월 20일 밤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 조선이라는 나라와 3천리 강토가 없어져 버렸다.(卒至于甲午六月二十日之夜。更無我朝鮮一國三千里之方)”라고 기술했다. 즉 일본군의 1894년 6월 21일 경복궁 점령으로 우리나라가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유인석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1894)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이 상실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유인석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국권침탈 사건으로 인식하였다.

 

1895년에도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남의 나라의 궁궐인 경복궁을 또다시 점령하였고, 왕비 민비를 시해하였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을미사변도 명백한 일제의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이에 국권 수호 운동 즉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는 갑오의병(1894), 2차 동학농민혁명(1894∼1895), 을미의병(1895∼1896)이 일어났다. 갑오의병, 2차 동학농민혁명, 을미의병은 모두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되어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51년간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1894년 5월 8일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고, 전주성에서 동학농민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실천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주목사 민종렬은 집강소 설치를 완강히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침략자 일본군에 의한 국권 침탈 상황을 지켜보면서, 제폭구민과 척왜의 실현, 그리고 집강소 설치, 신분제 폐지를 위해 나주성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나주성 점령이 불가피하였다.

 

특히 동학농민군에게 척왜(斥倭)는 핵심 주장이었다. 1894년 3월 백산에서 발표한 동학농민군 「4대명의」 속에 “축멸왜이(逐滅倭夷, 일본 오랑캐를 축출하여 멸함.)”로 나타났다. 집강소시기 폐정개혁 12개조에, 척왜 주장이 “일,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한다.”로 반영되었다. 집강소 정강 12개조에, “일, 외적(外賊)과 연락하는 자는 목을 벤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척왜 주장은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1824∼1864)가 지은 「안심가」(<용담유사>)에 일본세력을 “개 같은 왜적놈”이라고 세 번을 쓰면서, 반영되었다. 

 

1894년 7월 1일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최경선이 수천 명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하려고 왔다. 나주 대접주 오권선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금안동(金安洞)에서 합세하고 금성산(錦城山)에 주둔하였다. 

같은 해 7월 5일 저녁에 동학농민군은 금성산 산꼭대기에서 일제히 내려와 나주 서성문에 접근하였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급히 “적(동학농민군 지칭)이 우리 서문에 와 있다. 대적은 내가 마땅히 스스로 맡을 것이다. 오직 너희 북쪽, 동쪽, 남쪽 3문의 별장은 각기 엄하게 막고, 놀라지도 말고, 이탈하지도 말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주읍성 서성문 안쪽 모습 ⓒ 박용규(2022, 10, 19 촬영).    ©브레이크뉴스

           

민종렬은 칼을 어루만지며 나주성 서성루(西城樓)에 올라 좌정(坐定)하였다. 도통장 정석진이 오른쪽에 있고 서문별장 박근욱(朴根郁)이 왼쪽에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모두 성 아래에 이르러 북을 시끄럽게 울리고 함성을 내질렀다. 동학농민군은 화승총, 죽창, 창과 칼을 소지한 무장 시위대였다. 그러나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모두 오합지졸이었다. 나주성 성문은 이미 닫혀 만 명이라도 열 수 없는 형세였다. 동학농민군은 성문을 부수고자 하고 한편으로는 차례로 성을 오르고자 하였다. 관군은 명령을 내려 즉각 대완포와 장대포를 연달아 쏘았다.(官軍聽令訖 卽以大碗砲 將臺砲 連放之(「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갑편) 「갑오토평일기」에서는 당시 상황을 “적(동학농민군 지칭)이 곧바로 문루(門樓)를 두드리자, 관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장령과 사졸이 먼저 올라가 대포를 한꺼번에 쏘고, 천보조총(千步鳥銃)과 뇌고(雷鼓)라는 북을 크게 울리니 적이 손을 쓰지 못하고 한꺼번에 무너져서 사방으로 도망하였다.(賊直擣門樓 官軍一呼 壯士先登 大砲齊發 千步鳥銃雷皷大震 賊措手不及 一時潰散 四下逃竄)”라고 기술하고 있다.

 

나주 수성군은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군으로, 대완포와 장대포, 그리고 천보조총(千步鳥銃)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특히 대완포(大碗砲, 대완구(大碗口)라고도 불림)는 돌 폭탄이었다. 대완포는 지름 30cm쯤 되는 쇠나 돌로 만든 둥근 탄알을 넣어 쏘던 큰 화포였다. 대완포를 발사하면 3백미터 정도 날아갔다. 대완포의 돌 폭탄에 맞으면 머리가 깨지고 몸이 부서져 즉사하였다.

 

 대완포(대완구)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브레이크뉴스

 

서성문 위의 각 수성군 초소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큰 소리로 “최경선과 오권선 두 적괴(賊魁)는 빨리 수급(首級)을 바쳐라”라고 말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수성군(준 관군)에 의해 대포와 천보총에 맞아 서성문 밖에서 즉사하고, 살아남은 농민군은 혼비백산하여 서북쪽으로 도망갔다. 이렇게 수성군의 일방적 승리로 서성문 전투는 끝이 났다.

 

 대완포(대완구)와 돌 탄환 (나주시 마중 카페 소재. 2022년 11월 12일 나천수 박사가 촬영). ©브레이크뉴스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겸산유고>)에 도통장 정석진(자는 태완)의 서성문 전투 활약상이 나와 있다. “7월 초5일에 적도(賊徒 :동학농민군 지칭) 수만 명이 서문으로 직행하여 성세(聲勢)가 매우 위급했다. 정태완이 아전과 백성을 엄히 단속하고 관군 대오(行伍)를 나누어 정하고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크게 한번 싸워서 적도 1백여 명을 사로잡았다.(七月初五日 賊徒數萬名 直西門聲勢甚危急 鄭台完嚴束吏民 分定行伍 不避矢石 大戰一場 捕捉賊徒百餘名)”라고 서술하고 있다.

 

서성문 전투에서 나주목사 민종렬이 먼저 수성군에게 명령을 내려, 동학농민군에게 대포와 총을 쏘게 하였음을 「호남초토사민종렬위치보사(湖南招討使閔種烈爲馳報事)」(<갑오군정실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남초토사민종렬위치보사」에 “목사(牧使)와 우영장(右營將)이 직접 포(砲)와 돌을 무릅쓰고 군사와 백성을 격려했으며, 먼저 대포를 쏘고 계속하여 총을 쏘고 돌을 던져, 저 무리들(동학농민군 지칭) 중에서 고꾸라져 죽은 자들을 모두 합하면 1백 명은 되었다.(牧使與右營將 躬冒砲石 激勵軍民 先放大砲 繼發銃石 彼徒之中 斃者洽爲一百名)라고 기술하고 있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7월 5일 서문에서 전투를 치를 때, 도적 무리(동학농민군 지칭) 109명을 대완포와 장대포, 그리고 천보조총으로 쏘아 죽였다.(七月 初五日 西門接戰時 砲殺賊黨一百九名)”(<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1894, 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쪽.)라고 서성문 전투 결과를 정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렇게 1894년 7월 5일 서성문 전투에서 나주 수성군(준 관군)은 서성문으로 공격해 오는 동학농민군 109명을 대완포와 장대포, 그리고 천보조총으로 포살하였던 것이다. 수성군은 단 한명의 부상자나 사망자가 없었다.

 

나주성을 점령하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항일투쟁의 기지로 삼으려던 나주 동학농민군의 전략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나주 서성문 밖은 포살된 109명 동학농민군의 원혼만 남았다.

 

1894년 7월 5일 나주 서문 접전 때에 출전한 수성군 장령(지휘관)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명단은 호남초토사이며 나주목사인 민종렬이 작성한 <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6∼7쪽)에 나온다.  

 

“호장(戶長) 정태완(鄭台完), 이방(吏房) 손상문(孫商文), 중군(中軍) 전첨사(前僉使) 김성진(金聲振), 퇴교(退校) 김창균(金蒼均), 천총(千摠) 최성순(崔聖純), 난후별장(攔後別將) 전사과(前司果) 전학권(錢鶴權), 수교(首校) 승룡규(昇龍圭), 하리(下吏) 장길한(張佶翰)·이돈기(李敦棋)·최일봉(崔一鳳)·김학술(金學述)·양인환(梁仁煥)·김근환(金根煥)·기학연(奇鶴衍), 집사(執事) 고덕봉(高德鳳), 공무군관(公務軍官) 전공서(錢公瑞), 좌별장(左別將) 전오위장(前五衛將) 문락삼(文洛三), 우별장(右別將) 박윤칠(朴允七), 남문별장(南門別將) 문관후(文寬厚), 초관하리(哨官下吏) 오득제(吳得齊)·손치홍(孫致弘)·김재환(金在煥)·박근욱(朴根郁)·김석균(金錫均)·박관욱(朴寬郁)·최윤룡(崔允龍)·박윤홍(朴允弘)·오득환(吳得煥)·박성로(朴成老)·오화준(吳華準)·박경욱(朴京郁)·박년규(朴年珪)·박상욱(朴尙郁)·양남중(梁南中)·박두영(朴斗瑛)·최용환(崔鎔煥)·서연권(徐然權)”

 

박용규 박사.  ©브레이크뉴스

서성문 전투에 출전한 나주 수성군 장령 37명은 전부 나주 향리층(이족吏族)이었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1894년 4월 수성군을 조직하였고, 나주 수성군의 도통장으로 정석진(=정태완)을, 부통장으로 김재환을, 도위장으로 손상문을, 중군으로 김성진을, 통찰로 김창균을, 난후별장으로 전학권을, 서문별장으로 박근욱을, 별초군관으로 최윤룡·박상욱을 각각 임명하였다. 나주의 간악한 향리(간리奸吏)로 지목된 정석진(1851∼1896, 자는 태완, 호는 난파)·김창균(미상∼1896)·최윤룡은 이렇게 화려하게 부활하였다.(계속). hispak@hanmail.net

 

*필자/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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