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억순 주필님’...짤막한 만남 긴 이별-33년 만에 가졌던 긴 대화

대한민국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 작디작은 조약돌이라도 놓으라는 ‘헌신(獻身)의 명령’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21/10/24 [10:50]

’노익장(老益壯)’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의 의미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이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노인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10월 23일 새벽에 전화 한 통화를 했습니다. 이억순 소파 방정환재단 이사장님이셨습니다. 유명 언론인이십니다. 

 

그분은 서울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차장(청와대 출입기자)-국제부장-논설위원-논설위원 실장, 소년중앙-여성중앙 주간,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부사장을 지내셨죠. 지금은 사회복지법인 윤학자 공생재단 이사, 백남준 아트센터 건립추진 위원, UN 세계 고아의 날 제정 추진 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1935년생이시니 올해 87세이십니다. 그 동안의 사회적인 역량이나 나이로 봐서, 이 분에게 ‘노익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억순 주필님(왼쪽)과 필자(오른쪽).   ©브레이크뉴스

 

필자는 이 분을 ‘이억순 주필님’이라고 호칭합니다. 평생 언론계, 글 쓰는 일을 하며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필자와 ‘이억순 주필님’과의 인연은 아주 잠깐, 있었습니다. 그분이 중앙일보에 근무할 때, 필자는 1980년 초반 5년간 프리랜서로 중앙일보사가 발행하는 매체인 ‘여성중앙’ 등에 집중적으로 기고를 했었습니다.

 

이날, ‘이억순 주필님’과 서울 인사동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과거에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필자는 미국 미국 뉴욕에서 세칭 ‘반정부 기자(1985-1989년)’를 했는데, 세계일보 정치부 기자로 발령이 나 입사 절차를 마치고, 정치부로 출근을 했었습니다. 그때 정치부장은 안영모 부장(서울신문 정치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출근해보니, 앉아서 일하는 책상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보수언론을 지향하는 일간신문에 ‘진보기자’가 발령이 났다고? 그리했던 모양입니다. 짤막한 만남 긴 이별... 그 때 헤어진 이후 33년 만에 가졌던 긴 대화(긴 이야기)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안영모 정치부장과 함께....) 문일석 씨(브레이크뉴스 발행인)를 정치부 기자로 받아주지 않아서 오히려 잘됐지요. 지금, 서울문화사의 심상기 회장과 문일석 발행인이 주간신문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두 분으로 꼽힙니다. 아주 번창-성공했잖아요. 하하하...” 

 

“그때 일간 신문의 정치부에 안착했다면, 국회 언저리에서 살고 있겠죠. 현재 신문사 발행인이라는 위치가 국회 의원 보다 나아요. 하하하..”

 

이렇게, 필자에게 ‘이억순 주필님’께서 덕담(德談)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세계일보에 1년을 근무하다가 퇴사한 이후 시사 주간신문 주변(변두리)에서 바쁜 세월을 살았습니다. 세계일보를 퇴사한 이후 6년 간 홍성목 발행인이 이끄는 토요신문(편집국장), 이건영 발행인이 이끄는 일요서울(편집국장)에서 근무했었습니다. 홍성목-이건영, 이 분들은 제 인생길에 큰 도움을 주셨던 분들입니다.

 

그 후 필자가 직접 ‘펜 그리고 자유’라는 회사를 만들어 주간현대-사건의 내막 발행인, 브레이크뉴스 발행인으로, 25년간을 살아왔습니다. 

 

이 처럼, ‘이억순 주필님’과의 인연의 고리가 강제로 끊어진 이후, 많은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인생유전(人生流轉)이었죠.

 

“주필님, 저는 작은 언론사를 가진 언론사의 오너이지만, 뉴욕타임스를 모델로 하는 동북아시아에 꼭 필요한, 미래 언론의 장(場)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이게 제 꿈입니다. 하하하...” 

 

‘이억순 주필님’과 대화를 하는 중, 필자의 다짐이었습니다. 10월23일 새벽의 전화 통화, 그리고 이날 저녁 만남은 과거반추(過去反芻)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억순 주필님’을 만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언론계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 작디작은 조약돌이라도 놓으라는 뜻, 그런 뜻이 담긴 ‘헌신(獻身)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인연의 흐름이란, 과연 어디로 흐를지? 그 누구도 잘 모를 겁니다. moonilsuk@naver.com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as'Google Translate'.

 

'Lee Eok-soon' ... A short meeting A long farewell-Long conversation after 33 years

A ‘command of dedication’ to lay even small pebbles for the construction of democracy in the Republic of Korea

-Moon Il-suk Publisher

 

-There is a saying ‘Noikjang (老益壯)’. The meaning of the dictionary is “a word that refers to the elderly who, despite their old age, perform better than the young”. I got a phone call at dawn on the 23rd of October. Lee Eok-soon was the president of the Sofa Bang Jeong-hwan Foundation. He is a famous journalist.

 

He served as a reporter in the social affairs department of the Hankook Ilbo, the deputy director of the political department of the JoongAng Ilbo (Cheongwadae correspondent), the head of the international department, the editorial member, the editorial staff chief, the Boys JoongAng-Women's JoongAng Weekly, and the editor-in-chief and vice president of the Segye Ilbo. He is now a director of the Social Welfare Foundation, Haksa Yoon Yoon, a member of the Nam June Paik Art Center establishment promotion committee, and a member of the UN World Orphan Day establishment promotion committee. He was born in 1935 so he is 87 years old. Considering his social skills and age, I think it is natural to give this person the title of ‘Noikjang’.

 

I refer to this person as ‘Lee Eok-sun, the chief editor’. This is because all his life he's been working in journalism and wri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uthor and ‘Lee Eok-soon’s Principal Writer’ was very short-lived. When he was working for the JoongAng Ilbo, I was a freelance writer for 5 years in the early 1980s, intensively contributing to the media published by the JoongAng Ilbo, Women's JoongAng.

 

On this day, we had dinner together with 'Lee Eok-soon's Master Philosopher' in Insa-dong, Seoul, and shared stories that we could not share in the past.

 

I worked as an ‘anti-government reporter (1985-1989)’ in New York, USA, and after I was appointed as a reporter for the Segye Ilbo’s political department, I went to work in the political department. At that time, the head of the political department was Ahn Young-mo (from the political department of the Seoul Shimbun). But when I went to work, I was not given a desk to sit at. Perhaps a 'progressive reporter' was issued in a daily newspaper aiming for a conservative press? It looks like it was. A short meeting, a long goodbye... It was a long conversation (long story) that we had 33 years after we broke up.

 

“At that time, we (along with Ahn Young-mo, head of the political department...) did not accept Il-seok Moon (publisher of Break News) as a reporter for the political department, so it was rather good. Now, Sang-Sang Shim, Chairman of Seoul Cultural History and Il-Seok Moon, publisher, are counted as two highly successful people in the field of weekly newspapers. Very thriving - it was successful. Hahaha..."

 

“If I had settled into the political department at that time, I would have been living on the edge of the National Assembly. My current position as a newspaper publisher is better than that of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Hahaha.."

 

In this way, 'Lee Eok-sun, the chief editor,' gave me a good message.

 

At that time, she worked for the Segye Ilbo for a year, and after leaving the company, she lived a busy year around (outskirts) the Sisa Weekly newspaper. After leaving Segye Ilbo, I worked for the Saturday Newspaper (editor) led by publisher Hong Seong-mok and Sunday Seoul (editor chief) led by publisher Lee Kun-young for 6 years. Hong Seong-mok-Lee Gun-young, these are people who have been a great help in my life.

 

After that, I created a company called ‘Pen and Freedom’ by myself and lived for 25 years as a publisher of weekly Hyundai- Incident and Break News.

 

In this way, after the link of the relationship with 'Lee Eok-sun' was forcibly broken, many changes have been made. It was the inheritance of life.

 

“Sir, I am the owner of a media company with a small media company, but I want to create a future media forum that is essential in Northeast Asia, modeled on the New York Times. This is my dream. Hahaha..."

 

During a conversation with 'Lee Eok-sun, the author', it was my resolve. The phone call in the early morning of October 23rd and the meeting that evening was a time of reflection on the past. Living on the fringes of the media industry while reminiscing on the past by meeting 'Lee Eok-sun', I take it as a 'command of devotion' that means to lay down even a small pebble for the construction of democracy in the Republic of Korea. Where will the flow of relationships go? No one will know. moonils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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