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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流浪)의 역사 - 낭인(浪人) 시대의 그림자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3/11/08 [10:54]

▲ 1928년 무성영화 浪人街 장면 캡쳐  © 이일영 칼럼니스트

 

1906년 일본 타이요(太陽) 문예란에 ‘춘향전의 개요’를 연재한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1878~1967)는 4년 후 1910년 조선의 이야기집(朝鮮の物語集)을 출판하면서 28편의 이야기 속에 춘향전을 다시 소개하였다. 이어 다음 해 1911년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886~1934)는 조선문화사론을 출판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춘향전 줄거리를 소개하였다.  

 

호소이 하지메는 도쿄 시나가와에서 태어나 18세이던 1904년 나가사키 신문기자가 되었다. 번뜩이는 머리를 가진 그를 헤아린 인물이 있었다. 일본 우익의 뿌리 깊은 나무 우치다 료헤이(1874~1937)였다. 1907년 우치다 료헤이는 21살 청년 호소이 하지메를 자문그룹에 포함시켰다. 한일합방이라는 야욕으로 덩어리진 비밀스러운 해외 활동 집단 흑룡회였다.

 

우치다 료헤이는 격동의 한일 근대사에서 비켜 갈 수 없는 인물이다. 먼저 살펴야 할 역사가 있다. 

 

일본은 에도 막부 말기부터 1592년 임진왜란에 이어 1593년 재침한 정유재란으로 이루지 못한 야욕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하였다. 정한론이었다. 1873년 8월 일본은 두 달 후인 10월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대표로 조선에 국교 요구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전쟁뿐이라는 일사천리의 정한론을 결정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주동 인물들은 일본 근대화의 물결 메이지 유신 3걸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와 일본 최초의 중국 황제 접견자인 소에지마 다네오미(1828~1905), 조선의 개화당을 지원하여 청나라 세력을 저지한 주역 고토 쇼지로(1838~1897), 훗날 열도의 반란 사가의 난을 일으킨 에토 심페이(1834~1874)였다. 

 

그러나 선진 구미 강국을 시찰하고 지난 역사 동안 체결된 불평등조약 재협상이라는 과제를 안고 1871년 말 미국으로 출발하여 유럽을 순회한 이와쿠라사절단이 9월 귀국하였다. 이들은 내치 우선을 앞세워 정한론을 반대하며 10월에 예정된 정한론을 무산시켰다. 정한론 정변으로 기록되는 정한의 문턱에서 좌절한 주동 인물들이 모두 사직하였다.

 

이후 정한의 선봉장을 자처하였던 하급 무사 사무라이 출신 에토 심페이는 1874년 2월 사가의 난을 일으켜 메이지 정권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여 최후를 맞았다. 이후 1876년 근무 중인 군인과 경찰관 이외는 도검 착용을 금지하는 폐도령(廃刀令)이 내려졌다. 이는 사무라이 무사 계급을 이르는 사족(士族)의 생명과 같았던 칼 우치카다나(打刀)와 호신용인 와키자시(脇差)의 휴대를 금지한 조치로 사무라이의 최후를 의미한 것이다.

 

다음 해 1877년 최후의 사무라이 반란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 삼걸 중 한 명으로 정한론을 주창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패배하여 할복하면서 폐도령으로 목숨과 같은 칼을 잃은 사무라이 역사의 최후를 알렸다. 

 

일본의 역사에는 등록된 호적의 땅을 떠나 떠도는 사람을 의미한 유랑인에서 유래되어 주인을 잃은 사무라이를 로닝(浪人)으로 불러온 오랜 역사가 있다. 

 

당시 세이난 전쟁에 참가하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도왔던 후쿠오카 번의 무사 출신 히라오카 고타로(1851~1906)가 1년 형을 복역하고 함께 옥살이를 한 도야마 미츠루(1855~1944) 등과 함께 1879년 고요사(向陽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본 우익의 뿌리이다. 

이후 은밀하게 진행된 작업을 통하여 구로다 가문(黒田)으로 대표되는 옛 후쿠오카 번의 몰락한 무사들을 중심으로 1881년 겐요샤(玄洋社)라는 낭인 단체로 바꾸면서 히라오카 고타로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도야마 미츠루가 오른팔이었다. 

 

다음 해 1882년 7월 19일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군인들의 체불된 임금을 저질의 쌀로 지급하여 일어난 소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피해와 파장은 조선의 운명을 전환 시킨 중요 사건이었다. 

 

당시 시위대가 일본 공사관과 조선 정부에서 일하였던 일본인 고문들을 공격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일본 열도의 강력한 규탄 속에 즉각적인 보복설이 대두되었다. 이 무렵 히라오카 고타로는 후쿠오카의 도요코니 탄광 운영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게 되면서 전국의 낭인들을 규합하여 겐요샤 확장에 주력하였다. 

 

▲ 日韓合邦秘史 著者:黒竜会 編 1966年 原書房  © 이일영 칼럼니스트

 

1892년이었다. 히라오카 고타로는 조카 우치다 료헤이(1874~1937)를 도쿄로 상경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그는 겐요샤 일원으로 도요코니 탄광에서 인력관리를 하고 있었다. 우치다 료헤이는 어린 나이였지만, 뛰어난 무술을 바탕으로 거친 노동자들을 다루는 인력관리에 남다른 통솔력으로 본부에까지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당대의 무술인이었던 아버지 우치다 료고로의 영향이 컷다. 어려서부터 허약하였던 료헤이는 당대의 무술인 아버지로부터 일찍 검도와 스모에서부터 오늘날 주짓수로 부르는 일본 유도의 원형인 전통 쥬쥬츠(유술)와 스모, 그리고 양궁과 사격을 배웠다. 

 

우치다 료고로는 제자 중 한 명인 나카야먀 하쿠도(1872~1958)가 일본 검도연맹으로부터 검도, 거합도, 장도에서 10단과 범사 칭호를 모두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을 만큼 일본 무술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히라오카 코타로는 조카 우치다 료헤이의 비범한 무술과 영민함을 헤아려 일본 유도 총본산인 고도칸(講道館)을 설립한 가노 지고로에게 입문시켜 유도를 배우게 하였다. 료헤이는 실로 짧은 기간에 유도에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 다양한 무술의 달인이었음을 입증하였다. 일본 유도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는 도쿄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문무를 겸비한 무술인이었다. 

 

우치다 료헤이는 1893년 러시아 어학원에 입학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하던 중 1894년 조선에 민중봉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겐요샤에 비밀회의가 연이어 열리기를 거듭하면서 우치다 료헤이에게 시모노세키에서 밀항선을 타고 부산 초량왜관에 잠입하라는 긴급한 밀명이 있었다. 이어 살펴보기로 한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In 1906, Toru Takahashi (1878-1967), who published "Overview of Chunhyangjeon" in the literary column of 太, Japan, reintroduced Chunhyangjeon in 28 stories four years later when he published the Joseon Storybook (Joseon 集 鮮の) in 1910. Then, in 1911, Hosoi Hajime (細井肇, 1886-1934) published the History of Joseon Culture and introduced the storyline of Chunhyangjeon based on this.  

 

Hajime Hosoi was born in Shinagawa, Tokyo, and became a Nagasaki newspaper reporter in 1904 when he was 18. There was a figure who understood him with a flash of hair. Ryohei Uchida (1874–1937), a deep-rooted tree of the Japanese right wing. In 1907, Uchida Ryohei included a 21-year-old young man, Hosoi Hajime, in his advisory group. It was a secret overseas activity group called Heukryonghoe, which was formed by the ambition of annexing Korea and Japan.

 

Ryohei Uchida is a figure who cannot get out of the turbulent modern history of Korea-Japan. There is a history to look at first. 

 

From the end of Edo Shogunate, Japan began to spark a desire that was not achieved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followed by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3. It was a straightforward argument. In August 1873, Japan sent a delegation demanding diplomatic relations to Joseon on behalf of Saigo Takamori in October, two months later, and decided on the straightforward theory that if it did not comply, it would be only war.

 

At that time, the leading figures were Takamori Saigo (1828-1877), one of the three major Japanese modernization wave Meiji Restoration girls, Taneomi Soejima (1828-1905), Japan's first Chinese emperor, Shojiro Goto (1838-1897), the leader who supported the Gaehwadang of Joseon to stop the Qing Dynasty's forces, and Shimpei Eto (1834-1874), who later started a rebellion against the Saga of the Islands. 

 

However, the Iwakura delegation, which started to the United States in late 1871 and toured Europe with the task of revisiting advanced European and American powerhouses and renegotiating inequality treaties signed over the past history, returned home in September. They opposed the fixed theory with the priority of domestic administration and destroyed the fixed theory scheduled for October. All the frustrated leading figures resigned from Jeonghan's threshold recorded as Jeonghan's political upheaval.

 

Eto Shimpei, a junior samurai samurai who later claimed to be the vanguard of Jeonghan, fought against the Meiji regime in February 1874 and lost. Later in 1876, a decree prohibiting the wearing of swords was issued except for soldiers and police officers on duty. This was a measure that banned the carrying of Carl Uchikadana (打刀) and Wakizashi (脇差), a self-defense force, which was the life of the 族 of the samurai to reach the samurai class, and meant the end of the samurai.

 

The following year, the last Samurai rebellion, the Seinan War, broke out in 1877. Saigo Takamori, who advocated Jeonghan theory as one of the three girls of Meiji Restoration, was defeated and surrendered, marking the end of the history of samurai, who lost his life-like sword to an abandoned spirit. 

 

In the history of Japan, there is a long history of calling a samurai who lost his owner as a 浪, originating from a wandering person, which means a person who leaves the land of a registered family register and wanders. 

 

At that time, Kotaro Hiraoka (1851-1906), a warrior from Fukuoka Bun who participated in the Seinan War and helped Takamori Saiko, formed a group called 向 in 1879 with Mitsuru Toyama (1855-1944), who served a one-year sentence and was imprisoned together. It is the root of Japan's right wing, which is completely unknown to the general public. 

Afterwards, through secret work, Kotaro Hiraoka became the first president in 1881, focusing on the fallen warriors of the former Fukuoka Bun represented by the Kuroda family (黒). Mitsuru Toyama was the right arm. 

 

It was 1892. Kotaro Hiraoka sent his nephew Ryohay Uchida (1874-1937) to Tokyo. He was 18 years old at the time. He was a member of Kenyosha and was managing manpower in the Toyokoni coal mine. Although Ryohei Uchida was young, he had a reputation even at the headquarters for his extraordinary leadership in human resource management that dealt with rough workers based on outstanding martial arts.

 

At that time, protesters attacked Japanese diplomats and Japanese advisers who worked for the Joseon government, causing a number of casualties, prompting immediate rumors of retaliation amid strong condemnation from the Japanese archipelago. Around this time, Kotaro Hiraoka gained enormous profits from the operation of the Toyokoni Coal Mine in Fukuoka, and gathered the people from all over the country to focus on expanding Kenyosha. 

 

It was 1892. Kotaro Hiraoka moved his nephew Ryohei Uchida (1874-1937), the second son of his older brother Ryogoro Uchida (1837-1921), to Tokyo. He was 18 years old at the time. He was a member of Kenyosha and was managing manpower in the Toyokoni coal mine. Although Ryohei Uchida was young, he had a reputation even at the headquarters for his extraordinary leadership in human resource management that dealt with rough workers based on outstanding martial arts.   

 

This background is largely attributed to his father, Ryogoro Uchida, a martial artist of the time. Ryohei, who was weak since he was young, learned from his father, a martial art of the time, from kendo and sumo, to traditional jujutsu and sumo, a prototype of Japanese judo called jiu-jitsu, and archery and shooting. 

 

Uchida Ryogoro was one of his disciples, Nakayama Hakudo (1872-1958), who made a mark in the Japanese martial arts world as he was the only one to receive both 10 dan and Buddhist titles from the Japanese Kendo Federation. 

 

Kotaro Hiraoka introduced Kano Jigoro, who founded 講, the headquarters of Japan's judo, to learn judo in consideration of his nephew Ryohei Uchida's extraordinary martial arts and brilliance. Ryohei proved to be a master of various martial arts by showing outstanding skills in judo in a short period of time. Japanese Judo founder Jigiro Kano was a martial artist who graduated from the Philosophy Department of the Literature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Tokyo.

 

Ryohei Uchida entered the Russian language school in 1893 and was studying Russian whe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ok place in Joseon in 1894. As secret meetings were held one after another in Kenyosha, there was an urgent secret order for Uchida Ryohei to infiltrate the Choryang Waegwan in Busan on a stowaway from Shimonoseki. We will then look at it. artwww@naver.com

 

Author: Lee Il Young

the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a columnist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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