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나주 동학농민혁명사-(4회)> 4. 장등참·고막포 전투

박용규 박사 | 기사입력 2023/01/26 [09:58]

1894년 11월 16일에 무안(務安)의 대접주 배상옥(裵相玉)이 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불러 모아 무안현을 점령하고서 무기를 빼앗고는, 나주 서쪽 30리 고막포(古幕浦, 당시는 무안현 금동면, 현재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에 소재하고 있음.)에 주둔하고 있었고, 서쪽 5개 면을 장악하였다. 배상옥의 동학농민군이 장등참(長嶝站)까지 이르렀고, 나주로 향하려고 한다는 급보가 도착하였다.    

 

 

 고막포 돌다리 ⓒ양성숙 (사진 제공 : 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양성숙 총무)   ©브레이크뉴스

 

도통장 정석진이 부통장 김재환 및 중군장 김성진과 함께 포군 300명을 인솔하여 20리 거리의 자지현(紫芝峴,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 있음.)에 나갔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다시 정석진은 100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강춘삼·전공서 등과 함께 동학농민군과는 10리 쯤 떨어진 초동시(草洞市, 초동(草洞)은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을 가리킴.)에 가서 주둔하여 진을 쳤다. 중과부적임을 파악한 정석진은 총을 잘 쏘는 포군 백여 명을 장등(長嶝, 당시는 수다면(水多面) 장등(長嶝), 현재는 나주시 다시면 동곡리에 있음.)에 매복시켰으며, 그밖에 양반 유생 박훈양(朴薰陽)·나사집(羅史集)·임노규(林魯圭)가 이끌고 나온 민보군 1,500명이 응접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또 정석진은 부통장 김재환에게 진을 옮겨 합세하게 하였다.

 

11월 17일 수성군은 세 갈래의 군사를 1자로 배치하여 접전하려고 했는데, 후응장 최성순·박근욱·구유술이 계속 와서 관군(수성군)과 민보군이 합쳐서 3,000여명이 되었다. 수성군이 동학농민군과 장등(長嶝)에서 마주하여 진을 치고 바로 포를 쏘자, 산위의 동학농민군들이 해산하였다. 수성군은 대포를 먼저 쏘고 천보총을 이어서 연발로 쏘았다. 총을 맞고 죽은 동학농민군이 65명이었다.

 

장등(長嶝/진등) (사진 출처: <2021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학술대회 자료집>, 나주시, 380쪽).     ©브레이크뉴스

정석진이 직접 사졸보다 앞장서서 10리까지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였다.(台完身先士卒 追擊十里之地:「초토사보군공별지」, <겸산유고>) 수성군은 10여 리나 추격하여 동학농민군을 죽였다.(追殺十餘里: 「금성정의록」갑편, <겸산유고>) 어떻게 죽였는지는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정부에 보고한 책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종렬은 나주 수성군이 “11월 17일 나주 서쪽 30리 수다면 호장촌에서 전투를 치를 때, 도적 무리(동학농민군 지칭) 129명을 죽였는데, 43명을 발로 짓밟아 죽였다.”(<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1894, 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쪽)라고 밝혔다. 즉 수성군은 동학농민군을 10여 리나 추격하면서, 동학농민군 43명을 발로 짓밟아 죽였던 것이다.

 

10여 리나 추격을 받아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이 급박하게 좁은 고막교 다리에 몰려 물에 떨어져 죽었는데,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11월 17일 나주 서쪽 30리 수다면 호장촌에서 전투를 치를 때, 수성군의 추격을 받아 동학농민군 무리 가운데 고막포 다리 가에서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거의 수백여 명을 넘게 헤아려지나 조수가 불어나서 그 사망자 숫자가 명확하지 아니하였다.”(<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1894, 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쪽)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즉 고막교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동학농민군이 수백여 명을 넘는다는 것이다.

 

고막포 돌다리 ⓒ나천수 (사진 제공: 나천수 박사, 2021, 11, 6, 촬영) ※사진 설명: 나주 수성군의 과도한 추격을 받아 동학농민군 수백여 명이 고막포 다리에서 물에 떨어져 죽었다.  ©브레이크뉴스

같은 날 11월 17일 밤에 수성군은 호장산(虎壯山, 나주시 다시면 송촌리에 있음.) 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100여 명의 포군을 내보내 마구 포를 쏘며 동학농민군을 습격하여 21명을 죽였다.(「호남초토사민종렬위치보사」(<갑오군정실기>) 다음 날 11월 18일에 정석진이 수성군을 철수시켰다. 

 

양상형은 「금성평적비문」(<백하유고>)이라는 글에서, 장등참·고막포 전투에서 죽은 동학농민군이 “넉넉하게 3백 명을 넘었다.(洽過三百)”라고 서술하였고, 나주 수성군이 “많은 도적들(동학농민군: 필자)을 개를 죽이듯이 죽였다.(多賊滅犬)”라고 기술했다. 이로써 나주 수성군이 극악무도하고 가장 잔인하게 나주지역 동학농민군을 죽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성군 지휘관인 나주 향리층은 왜 나주지역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죽였는가? 그 이유는 1891년 나주민란 때 민란 주동자들에게 당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891년 나주민란은 탐관오리를 징치하기 위해 일어났다. 1891년 나주민란 때 나주 관아가 점령되어, 향리들이 민란 주동자들에게 읍권을 빼앗기고, 곤욕을 치렀다. 특히 암행어사 이면상에 의해 나주민란이 진압된 뒤에 간리(奸吏)로 지목된 정석진(=정태완)·박재구(=박재규)·김창균·최윤룡 등 4인은 2차례 죽지 않을 만큼의 엄형(嚴刑)을 받았었다. 나주민란의 원인 제공자였던 나주 향리층은 1894년에 두 번 다시 과거의 경험을 당하지 않고자 나주지역 동학농민군을 강경하게 진압하였다.(배항섭, 「나주지역 동학농민전쟁과 향리층의 동향」, <동학연구>제19호, 66∼68쪽.; 나선하, 「조선 후기 나주 향리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6, 61∼64쪽.)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裵相玉, 다른 이름은 규인(圭仁), 족보 이름은 규옥(奎玉))은 장등참, 고막포 전투 패배 이후 1894년 12월 24일 해남 은소면(현재 송지면)에 사는 윤규룡 등에게 체포되었고, 당일 도착한 일본군 보병대위 마츠키 쇼호(松木正保) 일행에 의해 곧바로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였다. 배상옥에게 걸린 현상금 1,000냥은 윤규룡 등이 받았다. 

 

1894년 11월 17일 장등참·고막포 전투에 출전한 나주 수성군 장령(지휘관)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호장(戶長) 정태완(鄭台完), 이방(吏房) 손상문(孫商文), 호방색(戶房色) 김재환(金在煥), 중군(中軍) 전첨사(前僉使) 김성진(金聲振), 퇴교(退校) 김창균(金蒼均), 천총(千摠) 최성순(崔聖純), 하리(下吏) 박근욱(朴根郁)·박시홍(朴時弘)·최문섭(崔文燮)·구유술(具有述), 산포수(山砲手) 강춘삼(姜春三), 신촌면 의거영수(新村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염유진(廉有鎭), 지량면 의거영수(知良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이규인(李奎寅), 금마면 의거영수(金磨面義擧領首) 유학(幼學) 나도식(羅燾植), 안로면 의거영수(安老面義擧領首) 유학(幼學) 김용현(金龍鉉), 지죽면 의거영수(枝竹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이길로(李佶魯), 동오면 의거영수(東五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유기연(柳紀淵)·민익화(閔益華)·유광채(柳光彩), 상곡면 의거영수(上谷面義擧領首) 유학(幼學) 박훈양(朴薰陽)·임노규(林魯奎)·이병조(李炳祚), 욱곡면 의거영수(郁谷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유택근(柳澤根), 전왕면 의거영수(田旺面義擧領首) 유학(幼學) 박문양(朴文陽), 수다면 의거영수(水多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이난헌(李蘭憲), 시랑면 의거영수(侍郞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이희문(李希文)”(<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 9∼10쪽.)이 장등참·고막포 전투에 출전하였다.

 

여기서 정석진(정태완)·손상문·김재환·김성진·김창균·최성순·박근욱·박시홍·최문섭·구유술 등 10명은 전부 나주 향리층(이족吏族)이었다. 특히 정석진·김창균은 ‘간리’(奸吏, 간악한 향리)로 지목된 인사였다.

 

아울러 염유진·이규인·나도식·김용현·이길로·유기연·민익화·유광채·박훈양·임노규·이병조·유택근·박문양·이난헌·이희문 등 15명은 나주지역 양반 유생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보군을 결성하여 장등참·고막포 전투에 출전하였다.

 

호남초토사이며 나주목사인 민종렬은 “11월 17일 나주 서쪽 30리 수다면 호장촌에서 전투를 치를 때, 도적 무리(동학농민군 지칭) 129명을 죽였는데, 129명 안에 86명을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쏘아 죽였고, 43명을 발로 짓밟아 죽였다. 또 수성군의 추격을 받아 동학농민군 무리 가운데 고막포 다리 가에 이르러서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거의 수백여 명을 넘게 헤아려지나 조수가 불어나서 그 사망자 숫자가 명확하지 아니하였다.(十一月 十七日 州西三十里 水多面 虎藏村 接戰時 所殺賊黨一百二十九名 內 砲殺八十六名 踐踏死四十三名 又有被逐 至古幕浦橋邊 落水死者 殆過數百餘計 而因潮漲未的其數)”(<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1894, 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쪽)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위의 ‘호장촌 전투’는 장등참·고막포 전투를 가리킨다. 

 

▲필자/ 박용규 박사.    ©브레이크뉴스

이로써 11월 17일 장등참·고막포 전투에서, 나주 수성군이 동학농민군 86명을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쏘아 죽였고, 동학농민군 43명을 발로 짓밟아 죽였으며, 나주 수성군의 과도한 추격을 받아 동학농민군 수백여 명이 고막포 다리에서 물에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hispak@hanmail.net

 

*필자/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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