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나주 동학농민혁명사-(3회)> 3. 용진산 전투

박용규 박사 | 기사입력 2023/01/23 [19:34]

1894년 10월 28일 나주목사 민종렬은 호남초토사에 임명되었다. 1894년 10월 28일 의정부가 호남 초토사에 나주목사 민종렬을 임명하여 호남 우도(湖南右道) 연안의 각 고을을 지휘하도록 하여 비도(동학농민군)를 소탕하는 데에 전심하게 할 것을 고종에게 요청하자, 고종이 윤허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 31년 10월 28일) 이후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전라우영에 나주초토영을 설치하여 호남 우도 연안의 각 고을을 지휘하여 동학농민군을 압살하는 데에 전심하였다. 

 

 나주초토영이 있었던 곳(현재의 나주초등학교) ⓒ 박용규 2022년 12월 10일 촬영.  나주초토영은 전라우영에 설치하였는데, 위치는 현재 나주초등학교(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남외1길 16(남외동))에 있었다. 나주초토영(현재의 나주초등학교 동쪽 끝)에서 동학동학군 처형이 이루어졌다.    ©브레이크뉴스

 

호남초토사 민종렬은 일본군과 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기에, 나주 수성군을 나주 초토영군에 편입시켜 나주 동학농민군 진압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민종렬은 도통장 정석진에게 동학농민군을 선제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894년 11월 8일에 영암(靈巖)에서 위급하다는 급보가 오자, 11월 9일에 민종렬은 정석진을 도통장으로, 김재환을 부통장으로, 김성진을 중군으로, 최문협을 서기(書記)로 삼아, 포군 300명을 인솔하고 동창(東倉)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11월 10일 민종렬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圭)가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불러 모아 재산을 약탈하고 나주의 북창(北倉)으로 옮겼다는 급보를 접하자, 민종렬이 바로 정석진·김재환·김성진에게 수성군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1월 11일 도통장 정석진이 수성군을 이끌고 행군하여 죽엽정(竹葉亭)에 머물렀고, 다음날 11월 12일에 북창(北倉)으로 진군하였다. 나주 지역 양반 유생인 평리(平里)의 집강(執綱) 김대규(金大圭)·삼가(三加)의 집강 유영관(柳永觀)·금안(金安)의 집강 홍봉현(洪鳳鉉)·관동(官洞)의 집강 김경환(金敬煥)·이노(伊老)의 집강 이민상(李敏相)이 각각 민보군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후응장(後應將) 손상문(孫商文)·최성순(崔成純)·김창균(金蒼均)이 수성군 군사를 이끌고 왔다.

 

11월 13일 정석진은 동학농민군이 용진산(聳珍山,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근처) 위로 옮겨 진을 쳤다는 보고를 받고, 도통장 정석진은 부통장 김재환·향도관(鄕導官) 임주호(林周鎬)와 유의근(柳宜根)·돌격장(突擊將) 강춘삼·천보대장(千步隊將) 전공서(錢公西) 등 32명과 함께 입에 막대기를 물고 올라가 수천의 동학농민군을 용진산의 중봉(中峯)에서 만났다. 정석진은 즉각 강춘삼에게 대완포를 쏘게 하고 천보조총을 이어서 발사하게 하였다. 마침 후응장 손상문도 수성군 군사를 이끌고 왔다. 아울러 접응장(接應將) 박근욱(朴根旭)·박재구(朴在九)·최윤룡·구유술(具有述)이 병사를 이끌고 왔다.

 

동학농민군이 용진산 위를 차지하고 관군(수성군)은 용진산 아래를 차지하였기에, 지형상 관군이 불리했다. 정석진은 접응장(接應將) 박근욱·박재구·최윤룡·구유술에게 명령을 내려 수성군 군사를 왼쪽 산꼭대기에 주둔시켜서, 3방면에서 동학농민군을 상대하게 하고, 다시 양반유생이 조직한 민보군을 불러 좌우로 나누어 주둔하여 성세를 이루게 하였다. 정석진은 수성군이 3면을 방비하고 1면의 작은 길을 열어두고 요로에 수성군 병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저물자, 동학농민군이 용진산에서 내려왔다. 수성군의 복병이 일시에 포를 쏘아 동학농민군 21명을 죽였다. 

 

포수 강춘삼(姜春三)과 천보대장(千步隊長) 전공서(錢公瑞), 김기옥(金基玉) 등이 용진산으로 올라가 쏜살같이 쫓아가자, 동학농민군은 모두 놀라 영광(靈光) 쪽으로 달아났다.

 

용진산 전투에 출전한 나주 수성군의 장령(지휘관)의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호장(戶長) 정태완(鄭台完), 호방색(戶房色) 김재환(金在煥), 중군(中軍) 전첨사(前僉使) 김성진(金聲振),이방(吏房) 손상문(孫商文), 좌수(座首) 박상수(朴祥壽), 천총(千摠) 최성순(崔聖純), 하리(下吏) 박근욱(朴根郁)·박시홍(朴時弘)·최윤룡(崔允龍)·구유술(具有述)·김학술(金學述)·양인환(梁仁煥)· 최문섭(崔文燮), 산포수(山砲手) 강춘삼(姜春三), 천보대장(千步隊長) 전공서(錢公瑞)·김기옥(金基玉), 관동면 의거영수(官洞面義擧領首) 유학(幼學) 김경환(金景煥), 평리면 의거영수(平里面義擧領首) 유학(幼學) 김대규(金大奎), 여황면 의거영수(艅艎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임노원(林魯源)·최신환(崔信煥), 오산면 의거영수(烏山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양상선(梁相善), 삼가면 의거영수(三加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유동근(柳東根), 적량면 의거영수(赤良面義擧領首) 유학(幼學) 염효진(廉孝鎭)”(<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 8쪽.)이 용진산 전투에 출전하였다. 

 

▲ 박용규 박사.  ©브레이크뉴스

여기에서 정석진(=정태완)·김재환·김성진·손상문·박상수·최성순·박근욱·박시홍·최윤룡·구유술·김학술·양인환·최문섭·전공서·김기옥 등 15인은 모두 나주 향리층(이족吏族)이었다. 특히 ‘간리(奸吏)’로 지목된 향리 정석진·김창균(金蒼均)·박재구(朴在九, 다른 이름으로 박재규朴在圭)·최윤룡(崔允龍) 등 4인이 모두 용진산 전투에 출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경환·김대규·임노원·최신환·양상선·유동근·염효진 등 7명은 나주지역 양반 유생으로 동학농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민보군을 결성하여 출전하였다. 11월 11일 용진산 전투에서의 정석진의 행적에 대해 「행장」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정석진 지칭: 필자)이 심히 분통을 참지 못하고, 포군 수백 명을 거느리고 불의에 기습적으로 출전하여, 신속하게 공격해서 직접 손수 쏘아죽이고 잡은 것을 셀 수가 없었다.(公尤不勝憤痛 領率砲軍數百 出其不意 齊討神速 手砲廝殺剿 獲無筭)”(「행장(行狀)」, <난파유고>) 

 

호남초토사이며 나주목사인 민종렬은 “11월 11일 나주 북쪽 40리 적량 용진산에서 전투를 치를 때, 도적 무리(동학농민군 지칭) 21명을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쏘아 죽였다.”(<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 1894, 1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쪽)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로써 용진산 전투에서, 나주 수성군이 동학농민군 21명을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일방적으로 쏘아 죽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hispak@hanmail.net

 

*필자/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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