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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법전과 언어의 천재 윌리엄 존스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2/07/04 [09:26]

 

▲ 윌리엄 존스와 마누법전과 나데르 왕의 역사   © 이일영 칼럼니스트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1746~1794)는 고대 인도 연구에 천착한 학자로 1794년 인도 힌두교의 고대 법문 (마누법전)을 번역하였다. 아버지는 원주율 파이(π)를 기호화한 수학자 윌리엄 존스(1675~1749)였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던 까닭으로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로 표기한다. 그가 3살 때 수학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는 수학과 언어에 뛰어난 신동이었다. 특히 10대에 영어와 웨일스어에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히브리어,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작문이 가능한 실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768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던 24세 나이에 이미 동양학자로 명성을 알렸다. 그는 1770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7세 왕)의 요청으로 페르시아어판 (나데르 왕의 역사)를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그가 번역한 나데르 왕의 역사는 이란의 팔레비 왕조 이전의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왕이었던 나데르 왕(1698-1747)의 전기였다. 원작은 나데르 왕의 친구였던 전설적인 역사가 미르자 마흐디 칸의 작품이었다.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는 일생 동안 무려 28개 언어에 능통하였을 만큼 타고난 언어의 천재였다. 전설과 같은 명성을 남기고 1794년 48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곳은 인도였다. 그가 마지막 삶을 불태우며 번역한 (마누법전)은 보편적으로 자연과 사회의 균형을 지탱하는 질서 체계를 뜻하는 신 다르마의 진리를 품고있다. 

 

이를 상세하게 해체하면 힌두교 창조의 신 브라마와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담긴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인도 신화에서 인류 조상으로 등장하는 마누의 이야기를 번역한 책이다. 마누법전의 원전은 기원전(BC) 200년에서부터 서기 300년에 이르는 산스크리트어 운문으로 전해온 기록들로 이를 집대성한 것이다.

 

마누법전은 만물의 창조에서부터 왕과 직능별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와 규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생명의 윤회와 해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는 엄밀하게 법전을 넘어선 힌두교의 성전(聖典)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에 의하여 원전에는 없었던 사회 계급의 법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져 (마누법전)이 탄생하면서 힌두교의 법칙을 정리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카스트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논란을 빚고 있는 현대 카스트 제도의 시작에 대하여 인도 식민정부 행정관이었던 허버트 호프 리슬리(1851~1911)가 1901년 계층별 인구 동향조사에서 바르나 기반의 카스트 제도를 체계화한 것도 엄밀하게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가 정리한 내용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역사라는 관점에서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가 마누법전을 번역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덴마크 왕의 요청으로 (나데르 왕의 역사)를 번역할 당시 법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법률 공부를 마친 후 웨일스의 순회판사로 근무하던 시기에 피뢰침의 발명가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정치가이며 외교관으로 협상의 귀재였던 벤저민 프랭클린(1705~1790)을 파리에서 만났다. 이는 당시 미국의 독립에 대한 긴밀한 협상 중 하나였다.

 

이 협상은 성과는 없었지만, 미국의 독립사에 대한 시대 상황을 헤아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된다. 인류사의 가장 치열한 종교전쟁이었던 가톨릭 구교와 프로테스탄트(신교) 간의 30년 전쟁이 1618년에서 1648년까지 독일에서 있었다.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 독일이 오랜 역사의 장을 거두었을 때 중부 유럽의 여러 나라가 독립된 주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로 주요국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 스페인(에스파냐)의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면서 식민지 쟁탈을 둘러싼 동맹과 전쟁이 뒤엉킨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전쟁이 유럽 중북부의 폴란드 남서부 지역인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주요 나라들이 양분되어 1754년부터 1763년까지 치열하게 싸운 7년 전쟁이다.

이와 맞물려 프랑스와 영국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두 나라가 자국의 군대와 원주민과 동맹하여 싸웠던 (프렌치-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1763년 영국이 승리하여 아메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는 영국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북아메리카 13개 영국 식민 주가 영국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 1783년 영국이 패배하였다. 당시 세계는 혁명의 바람이 불어와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를 낳았다. 이와 같은 격동의 역사가 휘몰아친 시기에 영국의 천재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와 협상의 귀재 벤저민 프랭클린이 만난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거센 바람이 아메리카 대륙을 흔들어 영국은 미국의 주인이 되었으나, 시대의 바른 눈을 뜨지 못하고 식민지를 모두 잃었다. 이후 1783년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는 성과 없이 마무리한 협상을 안고 식민지 인도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정리되는 역사를 통하여 주요하게 살펴지는 내용이 있다.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한 출구로 강력한 인도 식민지 정책의 추진을 의미한다. 

 

그는 인도에 도착한 다음 해 1784년 (콜카타 아시아협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1794년 (마누법전)을 번역하게 된 배경이다. 당시 (아시아협회) 구성원 중에 영국 수학자이며 천문학자로 동양학에도 관심이 깊었던 루우벤 버로우(1747~1792)가 있었다. 

 

그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거쳐 인도에 부임하였다. 아시아협회 첫 회원이 되었던 그는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에게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를 공부하여 인도 천문학 연구를 이끌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당시 인도에서 발생한 대홍수를 예측하여 큰 피해를 줄인 사실은 천문학과 기상학 분야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루우벤 버로우의 인도 활동에서 연구된 내용 중 짚고 가야 할 내용이 있다. 인류의 해양 시대가 열리면서 선박 운행의 과학적 항해의 중요성이 절실하였다. 이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바다에서 항해 중인 배가 현 위치인 경도와 위도를 파악하거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기술이 항해술이다. 이를 더욱더 쉽게 접근해 보자. 과학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육지에서는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이 다양하여 쉽지만, 망망대해 바다에서는 운행 중인 배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바다 지도(해도)이다. 그러나 둥근 지구를 평면으로 그린 지도와 달리 바다 지도는 바다에 적합하게 지구 위에서 방위가 일정한 선은 모두 직선으로 표시하는 메르카토르 도법이 고안되었다. 

 

문제는 지구 위의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인 위도와 경도의 명확한 파악이었다. 위도란 태양의 궤도인 적도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평행하게 그은 남쪽(남위)과 북쪽(북위)을 가리키는 가로선을 말한다. 경도는 좀 복잡하다. 

 

경도는 밤 12시 자정(子)과 낮 12시 정오(午)가 합하여진 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동경)과 서쪽(서경)의 위치를 측정하게 된다. 이와 같은 자오선의 좌표를 표시하는 경도와 시간대의 기준선이 본초 자오선이다. 맨 처음 시작이라는 뜻과 기준선이라는 의미를 품은 본초자오선을 기준으로 지구를 좌우 각 180도씩 쪼개 놓은 것이 경도이다.

 

이러한 자오선은 남극과 북극을 잇는 가상의 선으로 지구상에 많은 자오선이 존재한다. 이에 그 기준이 되는 본초자오선이 품은 상징성 때문에 당시 세계 강국들이 자기 나라 자오선을 기준으로 삼는 본초 자오선을 정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대립하였다. 

 

그러나 세계 해양 무역 활동이 커지면서 통일된 기준 자오선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헤게되면서 1884년 워싱턴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당시 항해에서 가장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던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 자오선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어 영국 자오선이 본초자오선으로 결정되었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자국의 파리 자오선을 고집하였지만, 공용화된 세계의 대세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살펴지는 사실은 하나뿐인 적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평행하게 그어진 위도의 파악은 북극성 또는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일찍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도의 파악은 정밀한 시계가 발명되기까지 오랜 역사가 흘러야 했다. 이를 정리하면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 24시간 동안 한 바퀴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360도 회전하는 자전은 1시간에 15도(0.4km) 이동한다.

 

이야기가 천방지축으로 흘러갔다. 결과적으로 앞에서 살펴온 영국 천문학자 버로우가 역사적인 숙원이었던 경도 파악에 열정적인 연구 활동을 통하여 공헌한 몇 줄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 루우벤 버로우와 저서  © 이일영 칼럼니스트

 

영국의 천재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1746~1794)는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가 모두 인도 유럽어족의 공통된 언어구조로 되어있는 사실에 대하여 많은 기록과 연구를 남겼다. 이는 훗날 비교언어학의 주요한 바탕이 되었으며 인도 유럽어족 연구에 초석이 되었다. 그는 48세의 나이로 열정의 연구를 바친 인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일생은 격랑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천재적인 삶이 남긴 흔적은 역사로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1835년 고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심리적인 신비와 감정적인 공포감을 끌어낸 고딕소설 베레니스를 출판하였다. 포우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맞물린 그의 작품에서는 이례적으로 폭력적인 감성이 강하게 담긴 작품은 고대의 인용문이 많은 작품이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절은 서기 208년경의 고대 시인 이븐 자이엇의 시이다. 

 

이 시인은 이슬람 전기 작가 기록에 단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시인이다. 바로 윌리엄 존스가 그의 시들을 찾아 번역하여 세상에 알렸다. 또한, 세기의 작가 포우의 여러 작품에는 윌리엄 존스가 번역하여 세상에 알린 많은 이야기가 인용되었다.

 

이와 함께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표상에 불과한 경험적 현상이 아닌 인도의 종교 사상 우파니샤드에 담긴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범아일여 사상을 존중하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에 윌리엄 존스가 번역한 베단타 학파의 많은 기록이 주요하게 인용되었음을 밝혀 그의 존재를 일깨웠다.

 

영국의 천재 학자 윌리엄 존스는 최초로 인도 전통음악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으며 인도에서 자생하는 식물과 동물 연구에 이르기까지 인도 연구에 천착한 삶을 살았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업적 중에 인류 언어의 바탕인 산스크리트어 연구에 남긴 선구적 업적은 너무나 소중하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산스크리트어 언어학자 알렉산더 해밀턴(1762~1824)이 탄생하였다. 해밀턴은 1806년 옥스퍼드 대학 하트퍼드 칼리지의 산스크리트어 초대 교수가 되었다. 이후 유럽 주요 대학에 산스크리트어 연구의 등불이 켜진 것이다. 

 

동양의 갤러리 관장이 역사의 바다를 떠다니며 하늘이 내린 재능에 불타버린 짧은 삶을 살다간 학자 윌리엄 존스를 헤아렸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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