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면의 역사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2/06/20 [06:20]

▲ 동서교회의 분열 (source: Wikipedia)  © 이일영 칼럼니스트

 

4차 십자군 침공을 당한 동로마 제국의 심장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도의 침공이 가져온 충격에 놀란 눈빛처럼 유난히도 화염이 번쩍거렸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대응이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기력한 대응으로 방어에 실패하였다. 그는 서둘러 재화와 보물을 챙겨 도피하기에 급급하였다.

 

역사의 이해를 위하여 살펴 갈 내용이 있다. 교황이 중심인 서방 로마 교회와 달리 황제를 정치와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인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갈등은 오랜 역사 동안 이어져 왔다. 

 

특히 동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3세를 물리치고 717년 황제에 오른 레오 3세 아이사우리안(686-741)은 726년 수도원과 교회의 모든 성화와 성상을 파괴하라는 성화상파괴령을 선포하였다. 이어 741년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콘스탄틴 5세(718-775)는 자신의 강력한 위상을 드높이기 위하여 교회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를 더욱더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이를 반대한 교황 중심의 로마 서방교회와의 대립이 커졌다. 

 

깊은 이해를 위하여 기독교 역사와 동행한 로마제국의 역사를 함께 요약하고 가자. 그리스도교 초기 예수의 제자 사도들이 활동하였던 서기 33년에서 100년 무렵의 시대를 사도 시대라 한다. 서기 42년 무렵 마가복음 저자로 추정되는 마가 요한에 의하여 총대주교가 생겨났다. 이는 유대인들의 족장에서 유래된 말로 알렉산드리아 학파 교부 오리게네스(185-254)의 기록에 안티오키아의 초대 총대주교가 사도 베드로라는 사실을 전하였다.  

 

이후 오랜 박해 시대가 이어지면서 로마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293년 거대한 로마제국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역사가 전하는 사분통치이다. 이후 서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272~337)와 동로마의 리키니우스 황제(270~325)가 공동으로 313년 2월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10년 후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를 통일하여 황제에 올라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다음 해 325년 황제는 모든 교회 대표를 소집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이다. 당시 회의에서 제1의 도시 로마 주교좌와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좌 그리고 안티오키아 주교좌가 공인 추대되었다. 여기서 로마 주교좌란 성 베드로가 처음으로 앉았다고 전해지는 의자를 뜻하는 성좌(Sancta Sedes)에서 유래한 것으로 교황을 의미한다.

 

이어 330년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겨 새로운 로마로 선포한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 황제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으며 337년 세상을 떠났다. 그를 기리는 뜻으로 비잔티움이 콘스탄티노플로 바뀐 것이다. 이후 395년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정 시대가 마감되면서 다시 동과 서로 나뉜 동서 로마 시대가 되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로마의 정통성을 이유로 교황이 모든 기독교의 대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수도가 콘스탄티노플임을 내세워 그 대표 또한 동로마제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서 교회의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 451년 로마 교황 레오 1세 요청으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아시아 칼케돈(터키)에서 소집한 제4회 세계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칼케돈 신조 발표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와 예루살렘 주교좌가 새롭게 추대되어 5대 총대주교좌가 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 주요 교구의 최고권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시기까지 로마 주교좌가 전체 서열 1위라는 사실은 공통된 견해였다. 

 

교황이라는 명칭은 232년 알렉산드리아 제13대 총대주교가 되어 248년까지 재임하였던 헤라클레스 총대주교 시대에 이미 쓰였던 명칭으로 서방의 주교 또는 동방의 총대주교로 통용되었다. 이후 중세부터 통용된 교황(pope)의 어원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파스(πάππας)에서 라틴어 파파(Papa)로 유래되어 영어 포프(pope)로 전한 것이다.    

 

총대주교(Patriarch)의 어원을 헤아리면 가족의 우두머리 또는 아버지(부권)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트라아르케스(πατριάρχης)에서 족장을 뜻하는 라틴어 파트리아르카(Patriarcha)로 전해져 오늘날 가장이라는 의미와 함께 총대주교를 뜻하는 영어 페이트리아크(Patriarch)가 되었다. 

 

문제는 서열 1위의 로마 총대주교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실체적인 힘을 잃었던 사실과 달리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이후 1054년 7월 무더운 여름이었다. 레오 9세 로마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였다. 이에 맞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와 연합하여 레오 9세 로마 교황을 파문하였다. 오늘날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존재하게 된 역사의 원인이다. 

 

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교리와 전례 그리고 정치적인 구조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특히 661년 무렵까지 이슬람 제국이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관할하던 영토를 대부분 점령해버렸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해당 지역에서 시대에 동화한 종교가 성장하면서 변화된 전례 의식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해석의 대립이 표면적인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깊은 정치적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천 년의 제국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도 십자군에 의하여 처참하게 침략당하였다. 33년 전 뼈아픈 실명의 아픔을 복수한 베네치아 100세에 가까운 고령의 총독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국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매달았다. 

 

침략 후 이사키우스 2세는 아들 알렉시우스 4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일 년 후 이사키우스 2세가 사망하고 알렉시우스 4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도피한 전임 황제가 국고와 주요 보물을 모두 챙겨가 십자군에게 약속하였던 보상은 물론 병력 지원과 교회 통합 등 그 무엇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조급해진 알렉시우스 4세는 결국 주요 교회의 신성한 성상을 훼손하여 금과 은을 추출해 보상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 통합을 비밀리에 합의한 내용까지 알게 되면서 폭동이 일어났다. 알렉시우스는 폐위되었으며 도피한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알렉시우스 5세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나아가 신임 황제는 십자군이 요구하는 보상금을 거절하여 쌍방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신임 황제는 다시 도피하였으며 기독교도 십자군은 약탈과 방화와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어 십자군 지도부와 베네치아 단돌로 총독은 약속한 협약으로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제국의 영토를 배분하였다.

 

격변하는 시대의 중심에 섰던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는 1205년 6월 25일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에 묻혔다. 천년 제국의 문명 도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신성한 인류의 문화재와 예술품들이 약탈과 방화로 훼손된 문화 예술의 대재앙이었다.

 

▲ 1968년 이탈리아 잠수함 S 513 엔리코 단돌로 함 (source: Wikipedia)  © 이일영 칼럼니스트

 

베네치아와 이탈리아의 역사적 관점은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가 상징적인 인물이다. 단돌로의 전설적인 활동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의 상업적 지배를 통하여 500년 부흥을 이룬 사실을 자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탈리아가 1870년 말 이탈리아 왕국이 해양강국을 외치면서 최초의 철갑선으로 건조한 2척의 최신 군함 중 하나를 (엔리코 단돌로 함)으로 명명하였다. 이 군함은 당시 가장 크고 빠른 속력을 자랑하였다.

 

또한, 1938년 이탈리아 공화국 해군은 11척의 마르첼로급 대형 잠수함대를 건조하면서 2번 함을 (엔리코 단돌로 함)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의 위용을 자랑한 잠수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까지 활동하다가 전쟁 중 대부분 침몰하였다. 그러나 종전 이후까지 살아남은 잠수함은 10번 함 코망단테 카페리니함과 2번 함 엔리코 단돌로함 이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패전국 이탈리아는 정전 협정에 따라 잠수함 소유가 금지되었다. 협정이 만료된 1968년 새롭게 건조한 토티급 소형 잠수함 이름도 (엔리코 단돌로 함)이었다.

 

해양 상업 도시 베네치아의 횃불과 같았던 엔리코 단돌로의 이름은 1870년 이탈리아 첫 철갑 전함이 되어 이탈리아를 지켰다. 나아가 1938년 첫 잠수함으로 다시 살아나 2차 대전 격동의 심해를 누비며 끝까지 살아남는 전설의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종전 후 이탈리아 첫 현대 잠수함으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사실은 전설적인 삶을 의미한다.

 

위대한 문화와 예술을 남긴 로마제국의 후예를 자처하고 인류사에 가장 지혜로운 르네상스 문화 부흥 운동을 전개한 이탈리아가 천년 제국의 찬연한 문화와 예술의 훼손과 파괴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을 전설로 상징하는 실체도 역사의 양면이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wo-sided history

- Lee Il-young, columnist

 

Constantinople, the heart of the Eastern Roman Empire, which had been invaded by the 4th Crusade, was exceptionally flamboyant, like eyes that were startled by the shock brought by the Christian invasion. At that time, the Byzantine emperor Alexius III had enough troops to respond, but the defense failed due to a helpless response. He hurriedly gathered his goods and treasures and rushed to escape.

 

In order to understand history, there are some things to look at. Unlike the Western Roman Church, where the Pope is the center, the conflict between the Church of Constantinople and the Church of Constantinople, which recognized the emperor as the supreme ruler of politics and the church, has been going on for a long time.

 

In particular, Leo III Aesaurian (686-741), who defeated Theodosius III of the Eastern Roman Empire and ascended to the throne in 717, proclaimed the Icon Destruction Order in 726 to destroy all icons and images of monasteries and churches. Then, in 741, Constantine V (718-775), who ascended to the throne as the new emperor, enforced this even more strongly as a means of oppressing the church in order to elevate his powerful status. Conflict with the Western Church of Rome, led by the pope, who opposed it, grew.

 

For a deeper understanding, let's summarize the history of the Roman Empire together with the history of Christianity. The period from AD 33 to 100, when the disciples of Jesus and the apostles were active in the early days of Christianity, is called the Apostolic Age. Around AD 42, the Patriarchate was created by John Mark, who is supposed to be the author of the Gospel of Mark. This is a word derived from a Jewish patriarch, and in the records of the Alexandrian Father Origen (185-254), it was reported that the first patriarch of Antioch was the Apostle Peter.

 

After a long period of persecution, the Roman emperor Diocletian divided the Roman Empire into four parts in 293 AD. It is the quadratic rule that history tells. Afterwards, Emperor Constantine I of Western Rome (272-337) and Emperor Licinius of Eastern Rome (270-325) jointly issued the Edict of Milan including religious freedom in February 313.

 

Ten years later, in 324, Constantine I unified Rome, ascended to the throne, and adopted Christianity as the state religion. The following year, in 325, the emperor convened all representatives of the church. It is the Council of Nicaea. At that time, the first city of Rome, the second city of Alexandria, and the seat of the Bishop of Antioch were officially appointed. Here, the seat of the Bishop of Rome is derived from the Sancta Sedes, which means the chair on which Saint Peter is said to have first sat, and it means the Pope.

 

Then, in 330 AD, the emperor moved the capital to Byzantium and declared a new Rome. He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became the first Roman emperor to become a Christian, and he died in 337. Byzantium was changed to Constantinople in his honor. After the death of Emperor Theodosius I, who succeeded him 395 years later, the Roman Empire came to an end.

 

At that time, the Western Roman Empire claimed that the Pope was the representative of all Christianity because of the legitimacy of Rome. However, the Eastern Roman Empire emperor claimed that the Roman capital was Constantinople and claimed that the representative was also the Eastern Roman Empire, and the division between the Eastern and Western churches began to surface.

 

In the midst of these conflicts, at the 4th World Council of Chalcedon convened by the Eastern Roman Emperor Marcian in Chalcedon (Turkey) in Asia Minor in 451 at the request of Pope Leo I, in 451, with the announcement of the Chalcedonian Creed that the divinity and humanity of Christ are inseparable, Constantino The seat of the Bishops of Polis and the seat of the Bishop of Jerusalem were newly appointed and became the 5th Patriarchate. This refers to the supreme authority of the major dioceses in the area. The problem was that until this time, it was a common view that the seat of the Bishop of Rome was the first in the hierarchy.

 

The title of Pope was already used during the time of Patriarch Hercules, who became the 13th Patriarch of Alexandria in 232 in 232 and served until 248. The etymology of the word pope, which has been used since the Middle Ages,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papas (πάππας), which means father, and the Latin word papa, and transmitted as the English word pope.

 

The etymology of the word Patriarch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πατριάρχης (Patriarcha), meaning head of the family or father (patriarch), and the Latin word Patriarcha, meaning patriarch. It became the English language Patriarch.

 

The problem is that, unlike the fact that the first Roman patriarch in the ranks lost substantial power with the fal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in 476, the influence of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in the Eastern Roman Empire expanded. Then, in July of 1054, it was a hot summer. Pope Leo IX excommunicated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Michael Cerularios. In response,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in alliance with the other Patriarchs, excommunicated Pope Leo IX. It is the cause of the history that has come to exist today as the Orthodox Church and the Catholic Church.

 

What was the background? Doctrinal, liturgical, and political and structural backgrounds were mixed. In particular, by about 661, the Islamic Empire had occupied most of the territories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Patriarchs of Alexandria, Antioch, and Jerusalem. Over the years that followed, the growth of assimilated religions in the region gave rise to altered liturgical rites. Although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was a major superficial cause, there was a deep political reason behind it.

 

Let's get back to the basics. The thousand-year-old imperial city of Constantinople was brutally invaded by Christian crusaders. Dandolo, an aged 100-year-old governor of Venice, who took revenge for the painful loss of blindness 33 years ago, proudly hung the flag of the Principality of Venice.

 

After the invasion, Isacus II became co-emperor with his son Alexius IV. A year later, Isaac II died and Alexius IV became the sole emperor, but the former emperor, who had fled, took all the treasury and major treasures, and was unable to achieve anything, such as military support and church unity, as well as the compensation promised to the crusaders. .

 

Impatient, Alexius IV eventually damaged the sacred icons of the main church and struggled to maintain power while extracting gold and silver to compensate. A riot broke out when angry citizens learned of a secret agreement to unite the Greek Orthodox and Roman Catholics. Alexius was deposed, and Alexius V, son-in-law of the fugitive Alexius III, was installed as the new emperor.

 

Furthermore, the new emperor refused the compensation demanded by the crusaders, and a fierce battle broke out between the two sides, and the new emperor fled again. Then, the Crusader leadership and the Venetian governor Dandolo allocated the territory of the empire, which had a history of a thousand years, according to the promised treaty.

 

Dandolo, the governor of Venice, who stood at the center of the turbulent times, died on June 25, 1205, at the age of 98. He was buried in St Sophia's Cathedral in Constantinople. The fall of Constantinople, the civilized city of the Millennium Empire, was a catastrophe of culture and art in which sacred human cultural assets and artworks were damaged by looting and arson.

 

▲ 1968 Italian submarine S 513 Enrico Dandolo (source: Wikipedia) © Il-Young Lee, Columnist

 

From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Venice and Italy, the Venetian governor Dandolo is a symbolic figure. Thanks to Dandolo's legendary activities, the Republic of Venice boasts a revival of 500 years through commercial domination of the Mediterranean. This fact led to Italy naming one of the two newest warships (referred to as Enrico Dandolo) as the first ironclad ships built by the Kingdom of Italy at the end of 1870 as a maritime power. This warship boasted the largest and fastest speed at the time.

 

Also, in 1938, the Navy of the Italian Republic built 11 large Marcello-class submarines, naming the second ship (Enrico Dandolo). She was a proud Italian navy submarine, which served as far as the Atlantic Ocean during World War II, and most of it was sunk during the war. However, the only submarines that survived until the end of the war were the 10th ship Comandante Carferini and the 2nd ship Enrico Dandolo.

 

After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Italy, the defeated country, was prohibited from owning submarines under the armistice agreement. In 1968, when the agreement expired, the newly built Totti-class small submarine was also named Enrico Dandolo.

 

The name of Enrico Dandolo, a torch for the maritime commercial city of Venice, became the first Italian armored battleship to defend Italy in 1870. She went further and in 1938 she was resurrected in her first submarine, demonstrating the legendary vitality of surviving to the end as she traversed the turbulent waters of WWII. In addition, the fact that his name reappeared as Italy's first modern submarine after the end of the war means a legendary life.

 

Italy, which claimed to be the descendant of the Roman Empire, which left great culture and art, and developed the wisest Renaissance cultural revival movement in human history, is a substance that symbolizes a person who cannot be free from damage and destruction of the brilliant culture and art of the millennium empire as a legend. They are also two sides of history. artwww@naver.com

 

 

*Writer: Lee Il-young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columnist.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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