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상처를 계속해서 받으면 사람은 결국,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쉽게 성욕을 느낄 수 있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자극’을 받아야 성욕을 느끼게 된다.
‘저는 심지어 포르노 영화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데, 스타킹을 신은 여자의 다리만 보면 미친 듯 흥분합니다. 특히, 여자가 스타킹을 말아 올리거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죠.’(25·대학생)
그렇다보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인데, 이뿐 아니라, 야외나 침대 위와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겨우 성욕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들도 있으며, ‘특정한 분위기’에서만 그렇게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특정한 부위’를 자극받아야 비로소 성욕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들도 있고.
‘얼마 전, 채팅으로 만난 여자와 함께 모텔에 갔는데, 아무리 열심히 애무를 해도 도대체 반응이 없었어요. 도무지 안 되겠어서 물었더니, 자기는 종아리가 유일한 성감대라고 말하더군요.’(27·대학생)
그렇다 보니 그런 상대와만 성관계를 맺는다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 중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미성년자를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한 까닭에 교도소에 갔다.
그리고 정상위나 후배위를 비롯한, ‘특정한 체위’나, ‘특정한 유형의 성관계’에서만 흥분상태가 지속된다는 사람들도 있는 등, 그밖에도 ‘특정한 자극’의 유형은 매우 다양한데, 그 모든 유형들은 사람의 감각기관을 기준으로, ‘특정한 시각적 자극’, ‘특정한 청각적 자극’, ‘특정한 후각적 자극’, ‘특정한 촉각적 자극’, ‘특정한 미각적 자극’의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특정한 자극’을 받아야 성욕을 느낀다는 사람들은 불안한 상태가 되면 더욱 그 ‘특정한 자극’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다고 한다.(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불안하면 더욱 그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하지만, 이직 이에 대한 자료는 없는 형편입니다.)
‘나는 이상하게, 몹시 화가 났다가도 소변을 마시면 금방 안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주 강한 성욕을 느끼고 자위를 하죠. 먹을 때는 좀 그렇지만, 안 먹으면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자꾸 먹게 되네요. 이런 내 자신이 무척 한심합니다. 또, 서글프기도 하고요. 아직 젊은데.’(20대 초반·여성)
따라서 어떤 ‘특정한 자극’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면 ‘내가 도대체 왜 이렇지?’라며 당황하거나, 자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나는 지금 불안한 상태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며, 그런 뒤에는 심리적인 안정상태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가 될 것이다.
또, 무작정 그 욕구를 채워주려고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또, 온전하게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방법을 모르는데, 과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실제로는 어떤 ‘특정한 자극’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이 성욕을 느끼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소개한, 소변을 마신다는 여성처럼, 그런 자극을 받아야만 ‘겨우 안정된다’, ‘겨우 편안하게 된다’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물론, 이런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매우 많습니다.)
그렇게 된 뒤에야 비로소 성욕을 느끼게 된다고 하고.
이런 경우라면 단지, ‘성적인 자극’을 받았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위한 자극’을 받았고, 이런 자극을 받은 까닭에 성욕을 느끼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자극’이란 바꾸어 ‘안정을 위한 자극’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또, ‘특정한 자극’에 대한 욕구란 ‘안정을 위한 자극’에 대한 욕구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특정한 자극’에 대한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고 해서, 사람에게 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 이상 정신적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뒤에도 사람은 계속해서 정신적 상처를 받으며, 그러면서 더욱 불안정 상태가 되니.
그 뒤에는, 계속해서 정확하지 않은 방법으로 불완전한 심리적인 안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니.
이런 형편이다 보니, 사람의 성욕이란 그만큼 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하게 계속해서 변하게 된다.
‘작년에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좀 심하게 당했는데, 그때 좀 흥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자꾸 그 생각이 나서 자위도 합니다. 속옷을 모두 벗고, 노출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지하철 등을 타면 누구인가 만져주기를 은근히 기대하죠. 점점 욕구가 커지네요.’(26·직장여성)
이런 정도라면 흔히 말하는 ‘성적인 자극’에는 그만큼 성욕을 느끼기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인데, 실제로 이런 형편인 사람들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자신은 불감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형편을 알기 매우 어렵다.
그 본인도 자신이 왜 그런 욕구를 느끼게 되었는지, 또, 왜 그런 ‘특정한 자극’을 받으려고 노력하는지 모르니,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그저, 본인들이 그런 자극을 받으면 성욕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니, ‘저런 자극을 받아도(혹은, 저런 짓을 해도) 성욕을 느낄 수 있구나’ 생각할 뿐.
이런 까닭에, ‘변태성욕자’라고 손가락질하거나, 정신과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도 ‘성욕을 느끼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말하는 것이고.
더구나 그 중에도 ‘특정한 자극’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이렇게 되다 보니 사람은 계속해서 더 많은 정신적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또, 그런 자신을 원망하며 스스로 계속해서 정신적 상처를 받게 되며, 그에 따라서 성욕 역시 더욱 변한다.
그만큼 더 ‘사람의 존재’나 ‘사람의 생명유지’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이런 변화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사람이 그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적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에 따라서 그만큼 더 계속해서 성욕은 회복되니.
‘사람의 존재’나 ‘사람의 생명유지’와 그만큼 더 거리가 가까워지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