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雜)의 민족학, 창조와 진보로서의 가치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는 강인한 민족성

김태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5/05 [10:40]

▲ 김태균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잡(雜)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잡(雜)되고 속된 것에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잡(雜)의 의미를 그렇게 간단하게 취급할 문제는 아니다. 바로 역사적인 맥락에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잡(雜)은 곧 민족성과 진보성에 대한 역사적인 폄하였다. 왜냐하면 잡(雜)은 곧 민족성(民族性)과 진보성(進步性)에 대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잡(雜)은 곧 우리였다. 우리 민족의 강인한 예술적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오늘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역에서 미국적인 가치와 문화를 최상으로 보고 있지만 전통시대엔 중국의 문화가 최상의 가치였다. 문화적인 최상이란 의미를 미학적인 용어로 ‘아(雅)’라 했다.

 

그땐 중국을 세계의 전부로 생각했다. 중화(中華)란 의미대로 중국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잇는 가장 화려한 문화를 가진 대국으로 인식했다. 그런 것처럼 중국과의 조화를 항상 유념했던 우리는 소화(小華)라는 견강부회적(牽强附會的)인 자부를 했다. 그것이 우리의 최선인양 말이다. 그런 사고 속에서 최선이라면 부단히 우리를 버리고 중국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시대를 산 지배층의 사고였다.

 

문화적인 식민성, 그것은 민족적 주체성에 대한 거부에 다름 아니었다. 오히려 민족적인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잡(雜)된 것 그리고 속된 것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중국음악은 아악(雅樂)이라 한 반면, 우리 음악은 속악(俗樂) 혹은 잡(雜樂)이라 했다. 그리고 변방의 의미가 다분한 향악(鄕樂)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중(中)과 향(鄕) 그리고 아(雅)와 잡(雜)과 속(俗)의 가름 속에 잡(雜)의 민족학은 이루어졌다.

 

멀리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시대 당악(唐樂)이 들어오자, 그 외의 음악을 향악이라 했다. 그리고 향악에는 기존에 있던 서역(西域)의 음악이 포함된다. 마찬가지로 불교가 국가 종교로 되며 단군의 맥을 가진 천신사상이나 삼한시대 소도(蘇塗)같은 무속은 기층(基層)으로 내려간다. 이른바 잡(雜)교(雜敎)가 된 것이다.

 

그때 가야인 우륵은 가야인이 부르는 노래를 가야금곡으로 만들어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신라귀족의 자제에게 가르쳤는데, 이들은 스승의 곡을 애이불비(哀而不非)하고 낙이불류(樂而不流)하게 고쳤다. 이것을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채용했다. 아마도 우륵의 노래는 애이비(哀而非)하고 낙이류(樂而流)했나 보다. 애처롭고 그리고 절조 없이 희희낙락함이 그득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렇듯 가야인의 진솔한 마음을 담은 노래는 잡(雜)(雜)한 것이었고 그런 잡(雜)스런 것은 ‘애이비(哀而非)하고 낙이류(樂而流)한 음악인 것이다. 반면 궁중음악인 대악은 중절(中絶)과 아정(雅正)한 음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려에 오면 잡(雜)한 음악이 기세등등하다. 글쎄 잡(雜)이라 하긴 그렇지만 말이다. 동동(動動)이나 만전춘(滿殿春)같이 노골적인 성애감이 묻어나는 노래가 있고 한림별곡같이 신분도 망각한 채 흥청망청 술을 마셔대며 노래도 했다. 혹자는 고려왕조를 우리민족의 역사 시기 중 가장 민족적인 성향이 강한 시대였다고도 한다. 꼭 그런 연유 때문은 아니지만 고려시대는 잡(雜)한 속악이 융성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역사적 시각으로 보면 고려가요는 삶이 회피가 아닌 삶의 긍정과 역동성에 대한 반영이다.

 

유교로 무장한 조선은 고려를 부정하며 새로운 문화를 부흥했다. 조선은 사실 유학의 근본을 논할 정도로 심오한 철학적인 경지를 구가했다. 유교는 악(樂)을 인간이 구현하는 가장 절대적이며 최상의 경지로 이해했다. 이를 ‘예악정치’라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예(禮)로서 서(序)를 만들고 악(樂)으로서 화(和)를 이루는 예악을 통해 조선은 전면적인 사회규범을 제도화했다.

 

예악의 최상은 아(雅)였다. 조선 세종조 아악 정비는 곧 조선사회의 근간이 확립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세종은 아악을 유교 원전의 범주에 있는 음악이지 이것이 전부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도 속악에 대한 관심 또한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적인 이상 국가를 설립을 하고자한 조선조 사대부들의 눈에는 속악이란 것은 고쳐야 할 것이었다. 지방 항교를 통해 유교소양교육을 전국적으로 확대한 사대부들은 부단하게 속악을 정비하고자 한다. 사대부들은 ‘시서예악’이라 하여 시가를 교양으로 즐겼는데 그 시가란 다름 아닌 중국시가였다. 조선조 500년 문단(文壇)을 대변하는 대문호 신위(申緯)의 변풍(變風)도 있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의 시가는 중국시가가 확대된 양상이었다. 사대부는 나름의 미학을 가지고 민간의 노래들을 재단했다. 즉 자신들이 향유하는 시가 외엔 전래의 노래에 대해서는 모두 속가 혹은 잡가(雜歌)라 했다. 중국풍이 아닌 다른 시가는 모두 잡가(雜歌)라 한 것이었다.

 

신위의 조선적인 변풍을 이루려는 자주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민간의 노래 또한 꾸준한 발전을 통해 조선사회 노래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퇴계 선생전서 중 서어부가후(書漁父歌後)를 보면 ‘사람들이 쌍화점 제곡을 들은 즉 수무목하고, 어부사를 들은 즉 싫어내고 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사람이 아니면 실로 그 소리를 알지 못하니 그 어찌 그 음악인들 알겠는가.-어찌 세속의 사람들이 정위(鄭衛)를 좋아하여 음탕을 더하고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들어 듯을 방탕하게 하는 것과 비교하겠는가.’ 하였다. 조선 중기지만 아직도 고려가요의 파장은 유효했다.

 

알다시피 고려가요를 고려속요라고도 했는데, 정과정곡(鄭瓜亭曲)의 대엽형식이 조선시가를 대표하는 만,중,삭대엽(慢中數大葉)으로 발전한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 정과정곡을 일명 심방곡(心方曲)이라고도 하였는데 심방곡은 대개 무가(舞歌)와 연관된다. 이 노래가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 하는 가곡(歌曲)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때 조선의 사대부들의 시가 중 장,단가(長短歌)가 있있고, 별곡 등 여타의 국문시가가 발달했는데 가곡 또한 새로운 노래양식으로 대두하여 민간의 인기를 얻어갔다. 그런 경향에 대한 단도리인지 이를 잡가(雜歌)라 했는데 다시 가사(歌詞)가 나오자 이를 ‘잡가(雜歌)’라 칭했다. ‘서포만필’에 보면 잡가(雜歌)인 이 가사를 광대패(廣大牌)가 만들어 불렀다 한다.

 

지금 가사를 들어보면 사대부들의 풍류미학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만만치 않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판소리가 나오자 이를 또 ‘잡(雜)가’라 했다. 그리고 기존의 노래인 가사는 잡가(雜歌)라는 명칭을 벗어나 가사라 칭해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경기 및 서도 잡가(雜歌)가 있자 판소리는 잡(雜)가에서 벗어난다. 지금은 잡가(雜歌)와 함께 잡가(雜歌)가 있는데 아직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지지 않아 잡(雜)만 늘어간 셈이다.

 

이상 간단하지만 노래의 역사를 보면 노래문화를 즐긴 상층과 하층(혹은 기층)에 대한 층의(層位)를 대략 살펴볼 수 있다. 상층은 부단히 중국풍을 모방하여 이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인 취향을 부단히 확장하며 하층을 동화해 나가려한 반면, 하층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바탕으로 통해 항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나갔다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곧 기층이 갖는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은 곧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은 곧 삶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이 있는 삶 말이다. 잡(雜)은 그렇게 어떤 유보된 상태에 있는 새로운 것에 대한 통칭이란 의미가 강하다, 또한 새로움에 대한 폄하적인 시각의 반영이다. 과연 우리 음악사에 나타나는 잡(雜)이란 의미를 그리 쉽게 간과해 버릴 수 있을까. 어찌보면 우리 음악사는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한 잡(雜)의 역사가 아닌가 싶다.

 

항상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찾는 것이 역사적인 진보이듯이, 잡(雜)의 민족한 또한 새로운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잡(雜)의 민족학은 바로 기층이란 삶의 배경에서 부단히 민족적인 생명력을 갖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는 강인한 민족성이라 할 것이다.

 

잡(雜)의 생명력 즉 다양성, 창조성이 거친 생명력으로 되살아오는 봄이다. 그런 민주의 봄 또한 기다린다.

*필자/김태균

 

음악평론가, 전 국립극장 기획위원, 전 국립국악원 기획홍보팀장, 삼청각 바람의 도학 작-연출 등 다수 작품 연출. 참한사이버교양대학 교수. 칼럼니스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as'Google Translate'.

 

Job's ethnology, value as creation and progress

Strong ethnicity that creates new art

-Kim Tae-gyun columnist

 

What is a job? There is always a negative connotation of what we know about being caught and deceived. However, it is not a matter of treating the meaning of job so simply. It is in the historical context. Starting from the conclusion, Jap (雜) was a historical disparity in terms of ethnicity and progressiveness. This is because jap (雜) has meaning for nationality and progressiveness.

 

 Jobs were us. It is nothing but the strong artistic vitality of our nation. Today, in the realm of “Pax Americana”, American values ​​and culture are best viewed, but in the traditional era, Chinese culture was the best value. In terms of aesthetics, the meaning of the cultural supreme was ‘아(雅)’.

 

At that time, I thought of China as everything in the world. As the meaning of China (中華), China recognized itself as a large country with the most colorful culture connected to the center of the world. As such, we, who always kept in mind the harmony with China, had a strong self-confidence called Soo-hwa (牽强附會的). That's our best. In such an accident, the best thing is to constantly abandon us and approach China. That was the thinking of the ruling class who lived in the traditional era.

 

Cultural coloniality, it was nothing but a rejection of national identity. Rather, they refused to be ethnic. And he regarded it as being caught and deceived.

 

So, while Chinese music is called Aak (雅樂), Korean music is called Sokak (俗樂) or Jap (雜樂). Also, it was said that the meaning of the periphery was diverse. Thus, the ethnology of jap (雜) was established in the separation of middle (中) and incense (鄕), a (雅), jap (雜) and genus (俗).

 

When Dangak (唐樂)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came into the distance past the Three Kingdoms Period, other music was called Hyangak. In addition, Hyangak includes the existing western music. Likewise, Buddhism becomes the national religion, and shamanism such as the celestial ideology with the veins of Dangun and the Samhan period Sodo descends to the base. It became a so-called job (雜) school (雜敎).

 

At that time, Gayain Uruk sang the Gayageum song from Gayageum. And they taught it to the sons of the Silla nobles, who modified the master's song to be ai-bul-bi (哀而不非) and to (joy而不流)-like. This was adopted as the royal music of Silla, Daeak. Perhaps Ureuk's song was abi (哀而非) and happily (樂而流). It must have been the music that was pathetic and joyful without fidelity. Likewise, the song containing the sincere heart of the Gaya people was mischievous, and such a mischievous one is “abi (哀而非) and discouraged music. On the other hand, I thought that the royal music, Daeak, should be a music that is both jungjeol (中絶) and friendly (雅正) music.

 

When you come to Goryeo, the music of the mischief is on the rise. Well, even though it is called a job. There are songs with outright sexual feelings like Dongdong and Manjeonchun, and like Hallim Byeolgok, he sang while drinking alcohol while forgetting his status. Some say that the Goryeo Dynasty was the most ethnically inclined era of the Korean people's historical period. It is not because of that reason, but it is true that in the Goryeo Dynasty, mischievous sok music flourished.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Goryeo Song is a reflection of life's positivity and dynamism, not avoidance.

 

Joseon, armed with Confucianism, denied Goryeo and revived a new culture. In fact, the Joseon Dynasty had a philosophical state that was deep enough to discuss the fundamentals of Confucianism. Confucianism understood evil as the most absolute and supreme state of human beings. This can be defined in one word, “pre-accurate politics”. Chosun institutionalized a full-scale social norm through the art of making a book as an example and a harmony as an evil.

 

The best of Yeak was Ah. The maintenance of the Joseon Sejongjo Aak also means that the foundation of Joseon society will be established. However, Sejong thinks that Aak is music in the category of Confucian texts, and this is not all. At the same time, he did not miss his interest in Sokak. However, in the eyes of the Joseon dynasty's grandfathers who wanted to establish a Confucian ideal state, it was to be corrected. The cults who have expanded Confucian literacy education nationwide through local bridges are constantly trying to improve Sokak. The high-ranking poets enjoyed poetry as liberal arts, as it was called “shiseoyeak”, and the poetry was nothing but Chinese poetry. There was also a change in the poetry of Daemunho, which represents the literary tradition of the 500th year of the Joseon Dynasty. The Sadaebu tailored the songs of the private sector with their own aesthetics. In other words, other than the poems they enjoy, all of the songs of the past were called “sokga” or “japga”. All other poems other than the Chinese style were called japga (雜歌).

 

Although there was an independent effort to achieve the Joseon dynasty of Shinwi, it can be presumed that the songs of the private sector also had a lot of influence on the song culture of Joseon society through steady development. In regards to this, if you look at the Seoeobu-hu (書漁父歌後) in Toegye Sensei's book,'What is the reason that people listened to the Ssanghwajeom song, which means they listened to Ssanghwajeom, and when they heard a fisherman, they hate it, and they do not like it. How do you know the musicians?-How can it be compared to how secular people like Jeongwi and add lust and make them debauchery as if they were listening to Oksuhu Jeonghwa?' Although it was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Goryeo songs still had a valid wave.

 

As you can see, Goryeo Songs were also called Goryeo Sokyo, but it has already been revealed that the large-yeop form of Jeong Sang-gok (鄭瓜亭曲) developed into Man, Jung, and Sakdae-yeop representing Joseon poetry. This Jeonggyokgok was also referred to as the so-called Simbanggok (心方曲), which is usually associated with the samurai (舞歌). This song has developed into a song called Mannyeonjanghwanjigok. At that time, among the poems of the Joseon dynasty, there were Jang and Danga, and other Korean poetry such as Byeolgok developed, but Gagok also emerged as a new song style and gained popularity among the people. It was called japga (雜歌) if it was a dandori about such a tendency, but when the lyrics came out again, it was called ‘japga (雜歌).' In ‘Seopo Manpil’, it is said that this lyrics, which is a jap-ga (雜歌), was made and sung by a clown.

 

If you listen to the lyrics now, you have a sensibility that is not as easy as possible to be comparable to the aesthetics of the grandfathers. And when pansori came out, it was called'jap(雜)ga' again. And lyrics, which are the existing songs, have been called lyrics outside the name of Japga (雜歌). And with the Gyeonggi and Seodo japga that we know today, pansori escapes from the japga. Now, there are japga along with japga, but since no new songs have been made, only japga has increased.

 

It's simple, but if you look at the history of singing, you can roughly examine the layers of the upper and lower layers (or bases) who enjoyed the singing culture. The upper class constantly imitated the Chinese style and tried to assimilate the lower class by constantly expanding their cultural tastes, while the lower class always created new songs based on their own cultural foundation.

 

In a way, this is the vitality of the base layer. That's because the vitality is based on life. That's because the vitality is based on life. That is, a life of productive power. Job (雜) has a strong meaning as a generic name for something new in a certain reserved state, and is also a reflection of a disparaging view of newness. Can we easily overlook the meaning of jap in our music history? In a way, it seems that our music history is a history of jap that constantly pursues newness.

 

Just as it is historical progress to always throw away the old and find new ones, it seems that it is the national and new hope of the job. In conclusion, Job's ethnology can be said to be a strong ethnicity that creates new art that constantly has national vitality in the background of life called the base.

 

It is the spring in which the vitality of the job, that is, diversity and creativity, comes back to life as a rough vitality. Such a spring of democracy also awaits. 

 

*Writer/Kim Tae-gyun

 

 

Music critic, former National Theater Planning Commissioner, former National Gugak Center planning and public relations team leader, Samcheonggak Wind's Dohak-direction, etc. Directed a number of works. Professor of Chamhan Cyber Liberal Arts University. Colum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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