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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라디오드라마 황금시대'

30년 방송 활동기간 나를 키운 건 라디오 드라마였다!

김선옥 시인 | 기사입력 2020/06/18 [15:48]

▲ 김선옥 시인.   ©브레이크뉴스

지난 6월10일 한국성우협회는 탄생60년을 기념해서 성우의 역사와 함께 한국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를 집대성한'성우60년의 역정-한국  라디오드라마사'를 출판했다.

 

이 출판기념회에  함께하면서 나는 갖가지 회한에 사무쳤다. 라디오 방송의 꽃으로 불리어지고 라디오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라디오드라마의  쓸쓸한 퇴조와 아쉬운 황혼을 몸소 느껴서이다. 지난날 라디오드라마는 빛나는 별처럼 찬란했고 꿈처럼 무궁무진한 이야기 보따리였다. 그 골든타임에 내가 있었다. 

 

그 순간을 서정주 시인이 읊은'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처럼 '30년 방송 활동기간 나를 키운 건 라디오 드라마였다' 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1954년 시작해서 현재까지 방송되고 있는'KBS무대'를 비롯해서 7500회로 마감했던 일일홈드라마'아차부인 재치부인과 48편의 작품이 영화화 되었던 '소설극장' 그리고 최초의 경제드라마 '경제실록50년'을 기획 연출한 라디오드라마 시대의 행운아 였다.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찬란했던'그때 그 시절'의 황홀했던 순간을 여기 되돌아본다. 

 

'청취율  1위를 탈환하라' 아차부인 재치부인 '안녕히 주무셨어요~어머 아차부인! 네 재치부인! 오늘도 명랑하게~' 활기차고 코믹한 가락의 시그널 송과  함께 출근길 등교길을 싱싱하고 유쾌한 웃음으로 물들게 했던 KBS의 아침 홈드라마'아차부인재치부인'이 86년 4월27일 봄 개편과  함께'그때 그 방송'으로 종말을 고했다. 65년 5월3일 TBC 동양방송에서 시작해서 21년간 매일 연속 방송 되었던 최고 청취울의 홈드라마가 7500회로 역사적인  막을 내린 것이다.

 

'아차부인 재치부인'의'극중 인물을 보면 늘 실수 연발에다가 조금은 엉뚱한 아차부인과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도시형 깍쟁이 재치부인, 그리고 아차씨의 딸 옥희와 재치씨의 아들 바우가 두 중심 인물이고 간혹 옥희의 할아버지가 등장해서 핵가족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 가족의 우월성을  꾸짖듯 느끼게(?) 해서 사랑을 받았다. 가공이 없는 우리 일상생활과 직접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이면서 늘 '내 이야기' 같은 줄거리여서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더욱 친근했던 것 같다.

 

뉴스나 인기 연속극, 스포츠 빅게임에도 결코 청취율 1위  자리를 뺏기지 않은 이  프로그램은 21년의 세월이 말해주듯 내용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낡은 이야기 인 것 같지만 70년대 당시만 해도 전화, 텔리비전,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귀하던 때라 아차부인과 재치부인 중 누군가 이 첨단기기(?)를 구입하면 영락없이  시기와 질투가 벌어져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진다. 바로 생생한 내  이웃집 이야기여서 솔깃했던 것이다.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다.80년대를 넘어 오면서 무대를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독주택  주장이 우세해 한옥 사수(?)로 결론을 보았다. 배역교체도 문제거리였다.연기자가 일신상의 사정으로 교체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왜 와이프를 자꾸 바꿔치기 하느냐'는 엄중 항의(?)도 있었고, 옥희는 몇 십년이 지났는데 왜 늙지 않느냐는 애교어린 항변도 받곤 했다.

 

필자가 76년도에 프로그램을 맡았을 당시는'아차부인재치부인'의 청취율이 하강기였다.텔리비전 보급율이 높아진 것도 이유였지만 교통프로그램'가로수를 누비며'가 출근길 강적으로 나타났고, 그 보다 더 최악의 경우는 여학생들의 인기를  끌며'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해 오던 임국희씨가 아침 프로그램인 '임국희 여성싸롱'의 진행을 맡아 주부가  된 옛  여학생들을  대거 몰고가버린 '사건'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나는 '청취율1위 재 탈환작전' 의 엄명을 받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골몰해야 했다. 첫 시도는 기존 포맷을 벗어나지 않은 범위에서 청취자 성우모집의 돌입이었다.

 

이른바 '아차부인 재치부인'에 출연하는 엑스트라 모집인 셈이다.출연자에게는 출연료는 물론 출연진과의 기념사진과 출연녹음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등 푸짐한 상품도 준다고 군침어린 스파트를 쏘아댔다. 그 결과4~5천명이 몰려와 대 성황을 이루었다. 응모한 사람들은 주부들이대다수였고 여대생과 직장여성까지 다양했다. 주부 등 과거에 연극을 해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거나 자칭'끼'가 있다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든 것이다. 이들이 주인공의 친구거나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로 출연했고 이것이 화제가 돼서 프로그램의 인기를 되찾는데 큰 몫을 한 것이다.

 

두번째, '아차부인 재치부인' 소재공모였다. 주위에 갖가지 싱싱한 이야기가 들어와 프로그램의 활력이 되었고 채택된 소재들은 1978년 책으로 묶어 출간되기도 했다. 세번째 기획 역시 신선했다. '고운 우리말 찾기'로 우리말 순화캠페인을 벌렸고, 잊혀져가는'토속어 발굴' 등으로 우리 언어 순화운동에 보탬을 한 점도 방송의 공적 측면으로 볼  때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 아차부인     ©브레이크뉴스

 

어쨋던 이런 프로젝트 힘으로'아차부인 재치부인'은 청취율 1위 자리를 탈환했고 더욱 가까이 청취자 곁으로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매체와 전파매체의 극적만남-소설극장 1975년 10월 TBC동양라디오는'소설극장'을 편성, 문학의 대중화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겼다.

 

'소설극장'은 70년대 인기작가의 유명세와 그들의 줏가를 폭등케 하는 경이로운 기획이었다. 첫 작품은 한수산의 베스트셀러'부초'였다. 출판가의 히트 소설을 각색해서 출판의 추종자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갓  출판된 조해일의'겨울여 자'를 방송하면서 베스트셀러의 창조자가 되었다. 인쇄매체와 전파매체의 결연을 통해 책이 날개 돋히듯 팔리고 영화화 되면서 '소설극장'은 당당이 베스트셀러의 산실이요 온실로 군림한 것이다. 당시 20만부 이상의 소설은 조해일의'겨울여자'한수산의 '밤의 찬가'최인호의'도시의 사냥꾼' 박범신의 '죽음보다 깊은 잠'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 등이었고,10만부 이상의 베스트셀러 송영의 '땅콩  껍질 속의 연가' 김주영의'목마 위의 여자' 조선작의'미쓰 양의 모험' 등이며 '소설극장'에 방송 되었다 하면 5만부 이상이 보증수표였고 영화화는 당연지사로 여겼다.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거나 신문 잡지에 연재되었던 소설을 선택해서 라디오드라마화 한 이 프로그램의 고정 청취자는 가정주부와 직장여성 중고등학생 등 다양했으며 20%가  넘는  청취율로 각광을 받았다.

 

'소설극장'은 각종 새로운 포맷을 선보이거나 화제늘 만들어서 방송계의 뉴스 초점이 되기도 했다. 소설가 김주영이 자신의 소설'목마위의 여자'에서 소매치기 역을 맡아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선보이며 성우로 출연방송에 입문(?)하게되었고,최인호 역시'가족'이란 자신의 작품에 성우로 우정출연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소설가와 청취자가 함께 출연해서 격론을 벌인 조해일의'겨울여자'편은 방송계의 최대 화제였다.'겨울여자'의 이화 같은 여대생이 실재로 존재할 수 있나를 놓고 갑론을박  논쟁을벌인 것이다.이밖에 박완서 송영 유현종 등은 드라마에 직접  출연해 자신의 작품 배경과 주제를 설명하므로서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소설극장'은 영화화의 교두보였다. 당시 충무로 영화가는 '소설극장'이 방송되면 그 원작자 모시기에 혈안이 되었다. 방송이 되자 말자 작품의  판권을 사기 위해 경쟁이 붙었다. 당시 100만원도 많던 원작료가 500만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해일의'겨울여자'가 영화로 제작돼 당시 우리영 화로는 관객동원 최고인 100만명을  돌파했기 때문이다.어째던 60여편의'소설극장'작품 중 48편이 영화화 되었고 라디오 드라마의 주가는 껑충  띌 수밖에 없었다.

 

경제주역의 생생한 육성 들려 준-'경제실록 50년' 라디오다큐멘타리'경제실록 50년-거대한 물결'은 1988년 11월1일부터 방송되었는데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최고의 주역들이 직접 육성으로 증언해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정주영회장과 박태준회장은 단골손님으로 자주 출연했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화나 포항제철 창설 비사는 최초의  증언 이어서 뉴스의 촛점이 되기도 했다. '경제실록50년-거대한 물결'의 경부고속도로 건설편에 출연한 정주영 회장의 증언비사-1968년 2월 무렵이었다고 했다.

 

정 회장이 수원 근처 막사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독려하고 있을 무렵 어느날, 새벽에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점버 차림의 박정희 대통령이 서 있더란 것이다. 박대통령이 ,정 사장! 오늘 나와 함께 헬리콥터를 탑시다’라고 말해 영문을 모른 채 헬리콥터를  탔는데 탑승객은  주원 건설부장과 셋이었다.

 

그 무렵 경부고속도로는 통과구간 문제로각지역  주민들이 생떼를 부리거나 반대시위가 한창이었다. 자기지방을 지나는 걸 반대하거나 우리고장은 꼭 지나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고 그래서 공사가 지연되었다. 이런 지지부진한 진행방향을 박대통령이 직접 헬리곱터를 타고 지시해 정해졌고 그 것이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구간이  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포병장교 출신의 박대통령이 헬리곱터  밑의 지리를 너무나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증언이다. 박 대통령이 1964년 서독방문 중 독일의 그 유명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보고 시작한 경부고속도로는 이렇게 해서 가장 적은 건설비인 430억원으로 428Km를 3년만에 완공했고 그 5분지 2인 134Km를 현대건설이 이루어 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지금은 너무나 잘 알려진 또 다른 이야기지만 정주영회장의 500원짜리 지폐의 위력에 관한 비사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육성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971년 9월이었다.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일본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한 장을 갖고  영국을 찿은 정회장은 정말 막막했다고 했다. 허황된 꿈이라고 비아냥대는 모든 사람들의 냉소를  차관도입만 이루어진다면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뛰어든 일이었다. 그래서 기술협조 계약을 체결한'애풀도어사' 롱바톰회장을 우선 만났다. '상환능력도 문제지만 도대체 배를 만들 능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정회장은 그 말에 맥이 쭉 빠졌다. 그런데 불현듯 호주머니에 있는 500원 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그리고 지폐를 꺼내 테이블에 펴보였다.

 

'이 돈을 보시요! 이것은 거북선이라는 철갑선이요! 우리는 1500년대에 이 배를 만들었소! 그런데 영국은 우리보다 300년이나 늦게 이런 배를 만들고 있지 않소! 우리가 산업화 늦어 그렇지 아이디어나 잠재력은  탁월하다오!' 이 말에 롱바톰 회장은 빙그레 웃더니 버클 레이 부총재를 소개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그 부총재의 소개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매부였던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유조선 두척을 8천만달러에 수주받아 지금의 현대 미포조선을 탄생시킨 것이다.

 

'경제실록50년-거대한 물결'은 이밖에'고독한 황제'편에서 박태준회장이 출연해서 포항제철의 숨은 비사를 털어놓아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필자:김선옥.

 

TBC 동양방송 프로듀서입사 KBS라디오 제작센터장,KBS아트비전 상임 이사, 경인방송 대표이사 전무,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방송통신심의원회 광고특별위원 '소설극장' '여인극장''아차부인 재치부인''즐거운 우리집''경제실록 50년' 등400여 편의

라디오드라마 연출'한국방송대상 연출상'(83년)'ABU라디오대상(83년)''한국방송대상작품상(93년)'93한국프로듀서상라디오대상'등 수상. 

시집 '오후 4시의 빗방울''모과나무에 손풍금소리가 걸렸다등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PEN클럽 한국본부, 대한언론인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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