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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기자의 아류들이 만드는 '조선일보 감상법'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 기사입력 2003/08/20 [18:23]

'감상법'은 조선일보의 김대중 이사기자가 그의 칼럼에서 주로 써먹는 화법이다. 예컨대 '개헌 연기 감상법' '내각제 포기 감상법' '김정일 답방 감상법' '2002년 정계개편 감상법' 등이 그것인데, 그 감상법마다 '왜곡의 달인'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몇몇 다른 필진들에 의해 '거야 정국 감상법' '노무현 정치 감상법' 따위의 감상법 아류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왜곡과 편견의 정도가 그 아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일보가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은 채, 늘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사안의 본질마저 틀어버리는 것이 바로 그 잘못된 감상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문이 세상을 '감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감상에 따라 잣대를 들이밀고 강요한다면 그처럼 위험천만한 일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일보는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확대하는 신문이지 않는가.

최근 대법관 후보문제, 한총련 학생들의 미군 장갑차 점거 시위, 8·15행사 등을 보도하면서 조선일보는 예의 상투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감상법을 '보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국민들에게 불안과 혼란을 부추기는 짓마저 서슴지 않는다.

시민사회단체가 대법관 후보를 추천하고 사법개혁을 주장한 것은 열린사회로 가는 길에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있는 대법원의 폐쇄성과 연공서열식 인사제도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이를 보·혁간의 갈등으로 몰아치고 있다. 그러면서 "지나치게 우물 안 지향적이고 분열 지향적인 양태여서 우리 사회의 앞날에 어떤 파장을 낳을지 걱정"(동서남북/ 세상 바꾸기 /8.5)이라고 하는 데서는 할말을 잃어버릴 정도이다. 조선일보한테는 '근래 우리 사회 전체가 개혁과 도약을 이루는 전환의 계기를 맞았지만 (사법부만) 과거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대 사법의 기본구조를 지금 이 시점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어느 판사의 호소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사설을 통해 대륙법과 영미법을 들먹이며 지금의 대법관 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또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미군 장갑차 점거 시위를 벌였던 한총련에 대한 편견과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전쟁반대와 평화를 외치는 젊은 학생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제쳐버린 채 '과격·폭력시위'만 있게 만드는 그들의 의제설정이 몸서리쳐질 만큼 무섭다.

조선일보는 이 나라가 "데모 천국"이고 한총련 학생들의 시위는 '평화를 위장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아니, 아예 '도시게릴라'로 단정을 짓고 있다. 그런 신문이 두 명의 여중생을 처참하게 죽였던 미군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관대했을까. 조선일보가 정녕 평화와 폭력의 의미를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가 법학 교수의 입을 빌려 장갑차 점거 시위를 '사태'로까지 비화시키고 사설에서 집시법의 허점과 강화를 통박하지만 조선일보가 정작 언제부터 그렇게 '법의 존재가치'를 숭고하게 여기고 국민들의 생활권을 따졌는지 오히려 되묻고 싶을 따름이다. 또 8·15 광복절에 열렸던 두 개의 집회를 굳이 '시위대결'로 부추기는 데서는 그들의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만 남게 된다.

조선일보가 이처럼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과 목소리를 인정하기보다는 편을 가르고 세를 나누며 대결을 부추기는 것은 무언가 분명 득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거기에 조선일보의 감상법이 있다.

* 본문은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가 발행하는 [주간 안티조선] 20호(2003. 8. 19)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주간 안티조선 가기 http://www.antichos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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