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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암역사문화재단 강희준 이사장 “증산교의 경전, 대순전경을 말하다”

대순전경(大巡典經)- 이양섭 본(李良燮 本)과 이상호(李祥昊 本)의 실체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 기사입력 2024/11/30 [13:26]

종교에는 경전이 존재한다. 세계 3대 종교인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에도 경전이 있다. 불교에 불경, 기독교(가톨릭)에 성경, 이슬람교에 코란이 그것이다. 

 

강희준 이사장은 “저의 부친 강원영은 진주강씨 26대손으로 조국의 독립과 특히 강일순 선생과 같은 문중이라 더 애틋한 마음으로 민족종교를 복원하기 위해 강증산의 유품과 대순전경을 유물로 남겼다”고 밝혔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우리나라의 전통종교인 증산교에는 경전이 존재할까? 대순전경(大巡典經)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1871∼1909년) 선생(先生)의 가르침을 전(傳)하는 경전(經典)이다.

 

강일순(증산)은 진주강씨 24대손이다. 대순전경 육필본, 참정신으로 배울 일(교리서), 천심경 등으로 1949년 통정원의 전국 순회 역사의 산증인인 강원영은 석암역사문화재단(경남 진주시 소재) 석암 강희준 이사장의 부친이다. 한마디로 대순전경의 육필본이 강원영을 통하여 역사적 승계자인 석암 강희준 이사장으로 그 정통이 맥맥히 흐르고 있다.   

 

이에 그 역사적인 소중한 대순전경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브레이크 뉴스는 석암역사문화재단 강희준 이사장을 인터뷰했다. 

 

강희준 이사장은 “저의 부친 강원영은 진주강씨 26대손으로 조국의 독립과 특히 강일순 선생과 같은 문중이라 더 애틋한 마음으로 민족종교를 복원하기 위해 강증산의 유품과 대순전경을 유물로 남겼다”고 밝혔다.

 

- 대순전경은 언제 기록되었는가?

 

▶ 대순전경 육필본 겉표지를 보면 1949년 7월로 표기되어 있고, 또 후면에 1948년 5월 중순부터 6월 20일 사이에 완기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위 이양섭의 1920년 육필본은 1909년 강일순 상제가 화천한 11년 후인 10주기를 기하여 1920년 신도들에 의해 강일순 상제의 흔적 등을 기록에 의해 1920년 7월 26일에 완필되었다.

 

- 대순전경(大巡典經)- 이양섭 본(李良燮 本)과 이상호 본(李祥昊 本)의 실체는 어떻게 다른가?

 

강희준 이사장은 “이양섭(李良燮)선생이 완필(完筆)한 대순전경(大巡典經)에 실린 기록에 의하면, 단기(檀紀) 4281년(무자년) 즉, 서기(西紀)1948년 5월 중순부터 6월 20일까지 대전(大田)에서 完記(완기)한 것으로 되어있다.“며, ”완기된 필사본(筆寫本)에 서기 1929년에 쓰여진 서(序)와 찬(贊)을 붙여서 제본(製本)을 마치고 간행(刊行)된 해는 단기 4282년, 즉 서기 1949년 7월로 밝혔다.

 

1929년 이상호 선생이 정리한 대순전경을 비교하면 제13장 마지막까지는 그 내용이 옮겨짐이 1920년 이양섭 선생 본과 같음을 확인한다. 다만, 이상호 선생의 대순전경은 제13장 마지막 구절인 ‘終也’와 함께 끝을 맺고, ‘編輯 兼 發行人 李祥昊’로 하였다.

 

강희준 이사장은 “사실은 당년 41세인 이양섭(李良燮:전라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구 4반)에 의해 대략 9년 전인 1920년에 完筆(완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양섭 본(李良燮 本)의 내용을 그대로 필사(筆寫)하고 나서 이상호(李祥昊)가 서(序)를 붙이고, 이성영(李成英: 正立)이 찬(贊)을 붙여서 출간(出刊)을 위한 책(冊)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 이 전에 이상호(李祥昊) 저술로 알려진【대순전경】은 서기 1929년(기사년)에 나왔는데 역사적 사실은?

 

강 이사장은 “사실은 당년 41세인 이양섭(李良燮:전라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구 4반)에 의해 대략 9년 전인 1920년에 完筆(완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양섭 본(李良燮 本)의 내용을 그대로 필사(筆寫)하고 나서 이상호(李祥昊)가 서(序)를 붙이고, 이성영(李成英: 正立)이 찬(贊)을 붙여서 출간(出刊)을 위한 책(冊)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1920년 이양섭 선생의 대순전경 정리의 뒷부분을 보면 1920년 7월 26일 완필 이양섭 서 당년 41세. 그 바로 뒤에 이어지는 1)채약가 2)서전서문 3)지지가 4)궁을가 5)상세가 6)증산대 선생 약사 문답 7)제세신약가 로 끝을 맺으며 육필본은 완성이 된다.

 

- 대순전경이 증산교단 설립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광복이 되어 유동열 장군을 중심으로 증산교단 통합으로 증산교의 17개 교단 대표들이 모여 1949년에 유동열 장군(임시정부 참모총장)이 통교로 추대되고 1929년 대순전경을 발표한 이상호 선생이 부통교로 증산교단 통정원이 1949년 설립이 된다. (대순전경육필본 겉표지 1949년 7월 참고)

 

- 일제치하에서 민족종교인 증산교는 어떤 부침이 있었는가?

 

▶ 일찍이 증산 선생의 제자인 차경석 천자의 보천교가 전국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신도를 확보하여 교세가 요원지화(燎原之火)의 세(勢)로 불어나자 일제가 황겁하여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려 탄압했다. 그 결과 교세는 지하의 조직으로 잦아들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자 우리의 민족종교를 되찾자는 자성이 일게 되어 종교지도자들의 활발한 활동이 다시 전개되었다.

 

조작한 흔적은 확실하나, 어떤 所以(소이)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一千九百五十七年 七月二十六日 完筆’로 되어 있으나, 덧칠된 흔적으로 보아 ‘1957년 7월 26일’이 아니고 ‘1920년 7월 26일’로 유추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양본(兩本)이 내용은 동일하나, "『李良燮 本』에서 보이는 문장의 수식어나 접속사 또는 술어 부분에서 부사나 조사의 표현이 어색한 부분은 『李祥昊 本』에서 이해하기 쉽게 임의(任意)로 고친 흔적이 많이 보임으로, 당시의 문체(文體)나 어투(語套)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이양섭 본(李良燮 本)이 이상호 본(李祥昊 本)보다 앞선다“고 유권해석을 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 일제치하에서 증산교단의 활동은? 

 

▶ 1949년 증산교단 17개 교파를 통합하여 증산 교단 통정원이 설립되고, 이에 맞추어 전국의 순회단 조직의 대순전경 강연 행진이 시작되자, 1949년 7월에 이양섭의 대순전경 육필본이 한 권의 책으로 제본이 되었다. 여기에 1948년에 참정신으로 배울 일, 천심경, 그리고 그 시대 아픔의 증언인 서간문 일체가 합본되어 신도 확보 및 전도를 목적으로 전국 차원의 순회강연을 하던 중, 한국전쟁인 6.25동란이 발발되어 유동열 통교가 납북이 되고, 또 1929년 대순전경의 부통교 이상호 또한 통정원이 해체되었으나, 이상호 선생은 1967년 돌아가실 때까지 증산교 교주로 생을 마감했다. 

 

강 이사장은 “1920년 이양섭의 대순전경 육필본 훼손은 1950년 6.25가 끝난 1955년경에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1920년 이양섭에 의해 대순전경의 내용이 완필된 육필본에 1929년에 이상호가 서(序)를 쓰고 이정립이 찬(贊)을 붙인 것은 비로소 책의 형태로 경전을 간행하고자 했던 의지가 확인되는데, 이상한 점은 같은 해인 1929년에 이상호 선생이 별도의 인쇄본을 간행하였다는 점을 들었다. 

 

이상호 선생이 굳이 따로 필사하여 자신의 저술로 명기하여 별도의 인쇄본으로 출간한 까닭인데, 유추해 보건대 ‘이양섭 선생의 육필본에 완기된 연대가 192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 자신의 저술로 밝힌 대순전경 연대가 1929년이라는 점이 불편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을 했다.

 

- 李良燮(이양섭)의 완필(完筆) 연대(年代)에 덧칠을 하여 서기 1957년 7월로 조작한 흔적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가요?

 

▶ 조작한 흔적은 확실하나, 어떤 所以(소이)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一千九百五十七年 七月二十六日 完筆’로 되어 있으나, 덧칠된 흔적으로 보아 ‘1957년 7월 26일’이 아니고 ‘1920년 7월 26일’로 유추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양본(兩本)이 내용은 동일하나,『李良燮 本』에서 보이는 문장의 수식어나 접속사 또는 술어 부분에서 부사나 조사의 표현이 어색한 부분은 『李祥昊 本』에서 이해하기 쉽게 임의(任意)로 고친 흔적이 많이 보임으로, 당시의 문체(文體)나 어투(語套) 변화에 비추어 볼 때 이양섭 본(李良燮 本)이 이상호 본(李祥昊 本)보다 앞선다“고 유권해석을 했다. 

 

그 이유는 이상호 본(李祥昊 本)이 이양섭 본(李良燮 本)을 필사(筆寫)한 것으로 유추(類推)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 이러한 유추를 하는 데에는 6.25 후에 그 개연성이 입증되는 일련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희준 이사장은 “1955년경 종단의 모 인사가 마포구 합정동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선친(강원영)으로부터 본(本) 육필본 대순전경을 잠시 빌려간 적이 있었다”며, “나중에 선친께서 화를 내시며 다시 찾아오신 일이 있었는데, 유추컨대 아마도 이양섭 선생의 완필 연대에 덧칠을 하여 조작한 흔적을 보시고 노기를 참지 못하고 흥분하신 게 아닌가 회상해 본다.”고 전했다. 

 

강희준 이사장은 "어찌됐든 대순전경 육필본에 이러한 불미한 흔적이 남아있는 채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기적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하히 지켜져 온 본 대순전경의 파란 많은 역사는 일제치하에서도 살아남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았다“며, ”대순전경 육필본, 참 정신으로 배울 일(교리서), 천심경 등으로 1949년 통정원의 전국 순회 역사의 혼과 대순전경의 정신이 되살아나 남남갈등의 치유는 물론 8천만 겨레의 희망의 등불, 구원의 등불, 한민족의 등불이 되기를 소망해본다“고 힘주어 말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 국내 유일본인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선생(先生)의 가르침을 전(傳)하는 경전(經典)인 대순전경(大巡典經)을 소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이 소장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갈등과 반목의 원한이 상존하는 암울한 오늘의 시대상을 마주하며 드는 생각은 착잡하다. 8천만 민족의 갈등과 반목의 분열상을 치유하기 위한 정신적 대개조와 그를 위한 종교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그 소명의 일각이라도 기여하고자 결심한 바 있다.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본인이 소장한 대순전경의 대의를 찾아 회향할 것을 통 크게 결심하고 있다.  그동안은 굳이 언급하기 언짢은 일이어서 언급을 자제해 온 부분이기는 하나, 실사하는 차원에서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아 전하고자 한다.

 

- 일제치하와 한국전쟁의 혼란으로 대순전경과 증산교의 부침이 심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 어찌됐든 대순전경 육필본에 이러한 불미한 흔적이 남아있는 채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기적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하히 지켜져 온 본 대순전경의 파란 많은 역사는 일제치하에서도 살아남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았다“며, ”대순전경 육필본, 참 정신으로 배울 일(교리서), 천심경 등으로 1949년 통정원의 전국 순회 역사의 혼과 대순전경의 정신이 되살아나 남남갈등의 치유는 물론 8천만 겨레의 희망의 등불, 구원의 등불, 한민족의 등불이 되기를 소망해본다“고 힘주어 말했다. hpf21@naver.com 

 

*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Seokam History and Culture Foundation Director Kang Hee-jun “Speaking of the scriptures of Jeungsanism, Daesunjeonggyeong”

Daesunjeonggyeong (大巡典經) - The Reality of Lee Yang-seop’s Original and Lee Sang-ho’s Original

 

There are scriptures in religions. The world’s three major religions, Buddhism, Christianity, and Islam, also have scriptures. Buddhism has Buddhist scriptures, Christianity (Catholicism) has the Bible, and Islam has the Koran.

 

Does Jeungsanism, Korea’s traditional religion, have scriptures? Daesunjeonggyeong (大巡典經) is a scripture that transmits the teachings of Jeungsan (甑山) Kang Il-sun (姜一淳: 1871∼1909).

 

Kang Il-sun (Jeungsan) is the 24th generation of the Jinju Kang clan. Kang Won-young, who is a living witness to the history of the 1949 nationwide tour of the Tongjeongwon with the handwritten copy of the Daesunjeonkyung, Things to Learn with True Spirit (Doctrine), and Cheonsimgyeong, is the father of Seokam Kang Hee-jun, the chairman of the Seokam History and Culture Foundation (located in Jinju, Gyeongsangnam-do). In short, the handwritten copy of the Daesunjeonkyung flows through Kang Won-young to the historical successor, Seokam Kang Hee-jun.

 

Accordingly, Break News interviewed Kang Hee-jun, the chairman of the Seokam History and Culture Foundation, in order to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the precious historical Daesunjeonkyung.

 

Chairman Kang Hee-jun stated, “My father, Kang Won-young, is the 26th generation of the Jinju Kang clan and left behind Kang Jeung-san’s relics and the Daesunjeonkyung as relics in order to restore the national religion with a more affectionate heart because he is from the same clan as Kang Il-sun.”

 

- When was the Daesunjeonkyung written?

 

▶ Looking at the cover of the Daesunjeonkyung handwritten version, it is written as July 1949, and if you look at the record on the back that it was completed between mid-May and June 20, 1948, the above Lee Yang-seop's 1920 handwritten version was completed on July 26, 1920, by the believers in 1920, recording the traces of the great master Kang Il-sun, 11 years after his death in 1909, 10 years after his death.

 

- Daesunjeonkyung (大巡典經) -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Lee Yang-seop version (李良燮 本) and the Lee Sang-ho version (李祥昊 本)?

 

Chairman Kang Hee-jun stated, “According to the records in the Daesunjeonkyung (大巡典經) written by Lee Yang-seop (李良燮), it was completed in Daejeon (大田) from mid-May to June 20, 1948 (西紀), in the year 4281 of the Dangi (檀紀) calendar (the year of the rat).” He added, “The completed manuscript was bound with a preface and annotations written in 1929 (西紀) and published in the year 4282 of the Dangi (檀寫) calendar, in July 1949 (西紀).” Comparing the Daesunjeonkyung compiled by Lee Sang-ho in 1929, we can confirm that the content up to the end of Chapter 13 is the same as that of Lee Yang-seop’s version in 1920. However, Lee Sang-ho’s Daesunjeonkyung ends with the last phrase of Chapter 13, “終也,” and writes, “編輯 兼 發行人 李祥昊.”

 

- The [Daesunjeonkyung] previously known as the work of Lee Sang-ho (李祥昊) was published in 1929 (the year of Gisa). What is the historical fact?

 

Chairman Kang said, “In fact, it seems that the content of the original copy of Lee Yang-seop (李良燮: Jangseong-eup, Jangseong-gun, Jeolla-do, Yeongcheon-ri, 1-gu, 4-ban) was written by Lee Yang-seop, who was 41 years old at the time, approximately 9 years ago in 1920, and then Lee Sang-ho added a preface and Lee Seong-yeong (李成英: 正立) added a compliment, and it seems that it was prepared as a book for publication.”

 

Meanwhile, if you look at the latter part of the Daesunjeongyeong compilation by Lee Yang-seop in 1920, it appears that the book was written by Lee Yang-seop, who was 41 years old at the time, on July 26, 1920. The handwritten version ends with 1) Chaeyakga 2) Seojeonseomun 3) Jijiga 4) Gungeulga 5) Sangseaga 6) Q&A with Jeungsan Dae Seonsaeng Pharmacist 7) ​​Jeseseinyakga, which is the end of the original manuscript.

 

-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Daesunjeonggyeong and the establishment of Jeungsanism?

 

▶ On August 15, 1945, Korea was liberated, and 17 Jeungsanism representatives gathered around General Yoo Dong-yeol to integrate Jeungsanism. In 1949, General Yoo Dong-yeol (Chief of Staff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was elected as the Tonggyo, and Mr. Lee Sang-ho, who announced Daesunjeonggyeong in 1929, was appointed as the Vice-Tonggyo, and Jeungsanism Tongjeongwon was established in 1949. (Refer to the cover of Daesunjeonggyeong handwritten version, July 1949)

 

- What ups and downs did Jeungsanism, a national religion, experien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When the Bochonkyo of Cha Gyeong-seok, a disciple of Master Jeungsan, gained a huge number of followers nationwide and the religious power grew to the point of a burning flame, the Japanese were so frightened that they issued an order to disband pseudo-religions and suppressed them. As a result, the religious power suffered the pain of being reduced to an underground organization.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rule, there was a sense of self-reflection to reclaim our national religion, and religious leaders began to actively engage in activities again.

 

- What were the activities of the Jeungsan Church under Japanese rule?

 

▶ In 1949, the 17 Jeungsan Church denominations were integrated to establish the Jeungsan Church Tongjeongwon, and in line with this, the Daesunjeonggyeong lecture march of the nationwide traveling organization began, and in July 1949, Lee Yang-seop's handwritten copy of the Daesunjeonggyeong was bound into a single book. Here, in 1948, the things to learn with the true spirit, Cheonsimgyeong, and all the letters that testified to the pain of that era were combined and were given as a nationwide lecture tour for the purpose of securing believers and evangelizing, but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Yoo Dong-yeol was kidnapped to the North, and in 1929, the vice-chairman of Daesunjeongyeong, Lee Sang-ho, was also disbanded, but Lee Sang-ho ended his life as the leader of the Jeungsan Church until his death in 1967.

 

Chairman Kang stated, “It seems that the damage to Lee Yang-seop’s handwritten copy of Daesunjeongyeong in 1920 was done around 1955, when the Korean War ended in 1950.”

 

Looking back, he said that the intention to publish the sutra in book form was confirmed when Lee Sang-ho wrote the preface and Lee Jeong-rip added praise in 1929 to the handwritten version of the complete Daesunjeonkyung by Lee Yang-seop in 1920, but what was strange was that Lee Sang-ho published a separate printed version in the same year, 1929.

 

He speculated that the reason Lee Sang-ho wrote it separately and published it as his own work was because ‘the date of completion in Lee Yang-seop’s handwritten version was recorded as 1920, so he may have been uncomfortable with the fact that the date of Daesunjeonkyung, which he stated in his own work, was 1929.’ - What does it mean that the date of Lee Yang-seop's handwriting was altered to July 1957?

 

▶ The alteration is clear, but the reason is unclear. However, it is noted that although it is written as '일천957년 7월26일 完筆', it is inferred to be 'July 26, 1920', not 'July 26, 1957', based on the alteration. In addition, although the content of both versions is the same, many traces of awkward expressions of adverbs or particles in the modifiers, conjunctions, or predicates of sentences in the “Lee Yang-seop version” were arbitrarily corrected in the “Lee Sang-ho version” to make them easier to understand. Therefore, considering the changes in writing style and speech patterns at the time, the Lee Yang-seop version is older than the Lee Sang-ho version, according to the authoritative interpretation.

 

The reason is that there are parts where it can be inferred that the Lee Sang-ho version was copied from the Lee Yang-seop version. This inference is made because there were a series of circumstances that proved its plausibility after the Korean War.

 

Chairman Kang Hee-jun said, “Around 1955, a certain person from the religious order was living in Hapjeong-dong, Mapo-gu, and borrowed the original handwritten copy of the Daesunjeonkyung from my father (Kang Won-young) for a while,” and added, “Later, my father came back angry. I think he must have been angry and upset after seeing the traces of the complete manuscript of Lee Yang-seop that had been tampered with.”

 

- I understand that he owns the Daesunjeonkyung (大巡典經), a scripture that conveys the teachings of the only Japanese person in Korea, Kang Il-sun (姜一淳), a Japanese person. Isn’t it problematic for an individual to own it?

 

▶ My thoughts are complicated as I face the dark reality of today’s times, where conflict, animosity, and resentment that permeate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coexist. At a time when a great spiritual overhaul and religious determination are required to heal the conflict and division of 80 million people, I have decided to contribute even a part of that calling. I have made a firm resolution to find the meaning of the Daesunjeonkyung that I own and return it to the past before it is too late. It is a part that I have been reluctant to mention, but I would like to correct the distorted parts and convey them in the interest of truth.

 

- The ups and downs of Daesunjeonkyung and Jeungsanism were severe due to the chaos of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Korean War. If you have any hopes for the future, please tell me.

 

▶ In any case, it is a miracle that the Daesunjeonkyung original manuscript has been preserved until now with such unpleasant traces remaining. The turbulent history of the original Daesunjeonggyeong, which has been preserved despite various difficult twists and turns, survive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Korean War, a tragedy of fratricide,” he said, emphasizing, “I hope that the soul of the history of the Tongjeongwon’s nationwide tour in 1949 and the spirit of the Daesunjeonggyeong will be revived through the handwritten copy of the Daesunjeonggyeong, Things to Learn with the True Spirit (doctrine), and Cheonsimgyeong, and that it will become a beacon of hope, a beacon of salvation, and a beacon of the Korean people, as well as a healing of the conflict between the South and the South.” hpf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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