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소설가의 소설집 ‘해동머리’가 출간(출판사 ‘Human & Books’)됐다. 아래는 오태규 소설가가 직접, 자신의 삶을 집중적으로 집필 프로필 내용이다.(핀집자 주)
1. 개요
대한민국 소설가이고 영어교육자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문교부시행 영어교사시험에 합격했다.[1] 순천고, 순천대, 단국대 등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82년 단편소설 ‘한려수도’가 월간문학소설신인상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서 크고 비범한 것을 캐내고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독특한 소설을 선보였다. 비단결같이 촘촘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소설문장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2.1. 유년시절
1939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오병윤과 어머니 김아지 슬하의 6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나의 유년시절은 좀 유별났다. 유난히 창밖으로 광장을 내다보기를 좋아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몰려오고 있었다. 영겁의 시간 저편에서 달려오는 나의 의식이었다. 불빛은 유령처럼 커지면서 눈 속으로 확 달려들었다. 쩽그렁,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면서, 무의식 속에 돌이 던져졌다. 내 의식이 번쩍 눈을 떴다. 그건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이었다. 내가 세상을 처음 보았을 때 눈에 띈 것은 광장이었다. 내가 창밖으로 내다보았던 광장은 이 도시 한복판에 있는 타원형 넓은 거리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본정통 5거리’[2]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여서 광장주변 집에서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고 한국인 집은 우리 집과 우리 오른쪽에서 구둣방을 하는 남씨네[3]와 왼쪽으로 길 건너 금방을 하는 천씨네 집뿐이었다. 우리는 일본인과 섞여서 함께 살고 있었던 셈이다.
광장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아스팔트길이었다. 어렸을 때 본 그대로 광장의 모습은 비교적 세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다섯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광장의 주민들을 거의 알아볼 수 있었다. 광장 서북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집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구둣방, 토목간구, 재판소, 우체국이 있었고 맞은편 동쪽에는 문구점, 책방, 소방서, 은행이 있었고 북쪽에는 금방, 병원, 사진관, 잡화점, 식품가게가 있었다. 남쪽은 멀리 남문시장으로 넓은 길이 휑 뚫려 있었다. 광장 한복판은 큼직한 사각형이 그러져 있었는데 그 아래 지하물탱크가 있었다. 광장 남쪽 재판소 앞에는 키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동학란 때 이 고목에서 죄인들의 목을 매달았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 집 뒤에는 좁은 골목 안에는 ‘희락별관’[4]이라는 일본고급식당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사기그릇이 젱그렁거리는 소리와 일본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에서 눈여겨봤던 것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매일같이 죄인들이 줄줄이 묶여서 광장을 가로 질러 재판소로 끌려갔다. ‘하리마오’[5]라는 무시무시한 일본인 사무라이가 늘 목검을 등에 비스듬히 매고 광장을 쏘다니면서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어느 날 S시경찰서 유도사범으로 특채되어 순사로 근무하고 있던 작은아버지(吳月允)가 행패를 부리는 ‘하리마오’를 한판으로 패대기쳐버렸다. 여수 남쪽바다에 B29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본인이 아스팔트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구스게요’를 외쳐댔다. 일본인들이 광장 북쪽 끝에 있는 방공호로 앞을 다퉈 피신했다.
인색하고 불친절하기로 소문이 난 맞은편 문구점 일본인이 아침마다 훈도시 바람으로 신문을 가지러 밖으로 나왔다. 훈도시는 이웃 천씨 아저씨가 골려주려고 집 앞에 갖다놓은 해괴한 춘화를 집어 들고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황급히 안으로 사라졌다.
관동군이 이 광장을 통해 퇴각했다. 군대를 실은 트럭이 지나갈 때 광장을 메운 시민들이 트럭을 향해 각목과 돌멩이를 내던졌다. 어린 나도 집 옆 토목간구에서 가져온 작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관동군이 총을 겨눴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몇 달 후에 미군 탱크부대가 이 도시에 진주했다. 탱크의 캐터필러가 광장의 아스팔트를 걸레처럼 만들어 버렸지만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미군을 환영했다. 미군 탱크들은 미선교사들이 살던 ‘매산뚱’[6]에 주둔했다. 구경하러 간 나를 한 미군이 잠방이 위로 드러난 내 배꼽을 만지더니 훌쩍 나를 안아 올렸다. 그 순간에 나는 깨달았다. “아아, 이것이 해방의 기쁨이구나.” 어린 나이에도 턱없이 으스대고 자랑하고 싶었다.
이듬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으러 시골로 내려갔다.[7] 어쩔 수 없이 나도 광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2.2. 학창시절
입학시험 성적이 우수해서 순천사범병중에 들어갔을 때 반장이 되었다.[8] 중학교 때 오로지 영어공부와 글 읽기에 몰두했다.[9] 성적이 떨어져서 당시 경쟁률이 10:1이었던 사범학교 시험이 걱정됐는데 몇 달 동안 집중하여 무난히 합격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영어교사시험에 합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서 참사 집 옆에 있었던 세책점의 소설을 거의 다 빌려서 읽었다. 학교도서관에 자매학교 피바디 사범대학에서 보낸 영어책이 많았는데 내 독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가 넘었는데 등하굣길에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10] 사범학교를 다녔지만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영어교사시험에 합격하는 바람에 진로가 바뀌고 말았다.
2.3. 대학입학과 교편생활
1962년 단기복무를 마치고 군에서 제대했을 때 자원하여 여수 남쪽에 있는 섬에서 교편을 잡았다.[11] 그때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시작했다. 그 섬이 내 데뷔작 한려수도의 무대가 되었다. 시간이 허락되어서 조선대학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참으로 중요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1964년 대학을 마칠 무렵에 육지로 나와서 순천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해부터 고3 대입영어지도를 했고 중간에 고등학교에 파견된 미 평화봉사단을 3년 동안 관리했다. 순천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지 10년 됐을 때 갑자기 사표를 냈다.[12] 그 후 2년 동안 순천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13]
2.4. 학원강사 시절
‘좋은 자리’가 생겼으니 상경하라는 학교선배의 전화를 받고 무턱대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말한 좋은 자리는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었다.[14] 주간엔 이재순이 운영하는 정진학원에서 강의하고 야간엔 ‘광화문에서’ 강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 광화문은 과외공부의 메카였다. 서울의 소수정예그룹지도의 발상지였다. 구세군회관부터 시작하여 한글회관, 신문로빌딩을 거쳐 경회궁의 아침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광화문교실’ ‘경기교실’ ‘중앙교실’ ‘예일’ 등 원조그룹지도학원들이 집결돼 있었다. 인근에 있는 경기여고, 이화여고, 서울고, 경복고 등의 일류고 학생들이 학교가 파하면 떼를 지어 이곳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본고사영어를 가르치던 명강사였다. 모든 그룹에 드나들면서 터줏대감노릇을 했다. 나는 시간을 돈으로 바꾸면서 환상적으로 돈을 벌었다. 정진학원은 노량진으로 옮긴 후로 국내 최고의 학원으로 성장했다. 1995년 원장이 심장마비로 급사했을 때[15] 내가 원장에 취임하여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총중에도 대학에서 부르면 달려가서 토플강의를 했다.[16] 서울 소재 거의 모든 대학들을 찾아다니면서 토플강의를 했다. 국내 굴지의 명문학원인 대성학원을 끝으로 1993년에 학원생활을 마감했다.
2.5. 등단
나의 등단을 도와주었던 사람은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의 동생 김상옥이었다.[17] 어느 날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억병으로 취해 광화문 국제극장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우연히 나를 발견한 고향후배 김상옥이 다방으로 데려가서 나직이 말했다.
“학원에서 강의만 하실 거예요. 써놓은 소설이 있으면 내일 MBC로 가지고 나오세요.”
그때 김상옥은 MBC PD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월간문학에서 근무하는 평론가와 소설가를 MBC 방송국으로 불러내서 내 단편소설 ‘한려수도’를 건네주었다. 얼마 후에 당시 문단의 실세였고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이었던 극작가 오학영이 나를 불렀다. 그는 과묵하고 자존심이 강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나를 보자 딱 한마디하고 그만이었다.
“내가 만약 소설을 썼다면 ‘한려수도’ 같은 소설을 썼을 거요.”
그제야 나는 당선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등단하게 됐는데 첫걸음부터 파행으로 치달았다. 나는 월간문학소설신인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도대체 네가 쓴 소설이 뭐가 대단하다고 상을 받느냐. 그 나이에 부끄럽지도 않느냐. 20대 초반에 받는 신춘문예라면 또 모르겠다.”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핀잔을 주었다. 나를 뽑아준 심사위원 소설가 홍성유의 말이 생각났다.
“신인 주제에 타자기로 작품을 쳐서 보냈다. 응모작은 원고지에 쓰는 것이 기본 아닌가. 참으로 경솔하고 오만방자하다. 몇 번 낙방시키려다가 살려두었다. 앞으로 행적을 지켜보겠다.”
나중에 나를 다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홍성유는 다짜고짜 나의 두 손을 붙잡고 사과부터 했다. 그의 첫마디가 또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렇게 지긋하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내가 시상식에 불참했던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시상식에 불참했군요. 방금 문인협회 유 총무한테서 연락을 받았어요. 어디 아프세요?”
김상옥이 전화 속에서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야. 미안해”
나는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쨌든 소설가로 첫발을 내딛는 날에 나는 몹시 방황했고 불행했다.
2.6. 녹후잡기
1987년 겨울에 대학로 어느 강당에서 열린 고 손소희 소설가의 추도회에 참석했다. 두 가지가 나의 기억의 서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홍윤숙 시인의 추도사가 너무 감동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동리 선생이 고인의 부군으로 참석했다가 짤막한 인사말만 하고 금세 퇴장했다. 그때 참으로 우연히 선생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선생이 나를 보자 대뜸 “‘한려수도’를 발표한 작가군요. 내가 좋아합니다. 앞으로 잘해 보세요.”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내가 서라벌 쪽 출신도 아닌데, 나를 기억하고 격려하신 것이었다. 내가 귀를 의심할 만큼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다.
내가 받은 소설신인상 상장에는 이사장직무대행으로 수필가 조경희 선생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마 김동리 혹은 조병화가 이사장을 그만둔 때였을 것이다. 이분도 내 소설을 무척 좋아했다. 가끔 문인협회에 들를 때마다 나에게 다가와서 “오 박사, 이것 좀 해줄 테?” 하고 소소한 일을 부탁했다. 주로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미국인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번역해준 일도 있었다. “‘한려수도’ 괜찮은 소설이야. 잘 읽었어.” 그 특유의 잔잔하고 은근하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나는 부끄러움 때문에 월간문학소설신인상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이름도 오태완이라고 썼는데 필명이라기보다 나를 감추는 가명이었다. 이런 나의 처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고 박재삼 시인은 한려수도를 칭찬하는 독후감까지 편지로 써서 보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7. 나의 문학 이야기
‘소설가 길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세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 ‘나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영어교사시험에 합격한, 뛰어난 어문학(語文學) 실력을 재능으로 간주하고 덤볐던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재능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애초 문학을 넘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재능과 노력이 혼신의 힘을 기울어서 써내는 소설을 나는 ‘불멸의 보물’(timeless treasures)로 생각하고 목숨같이 사랑했다. 나의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를 무엇보다 중요시했으며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서슴없이 절대적 가치를 인정했다. 어떠한 변수나 조건도, 일테면 독자의 반응이나 비평가의 평가도 나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변함없이 작품을 신뢰하고 사랑했다.
2. ‘무진기행’ 김승옥과 ‘소문의 벽’ 이청준 같은 소설가들이 나의 문학의 파트롱(patron)이 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승옥은 고향후배이고 이청준 역시 가까운 남도의 소설가다. 같은 또래고 동향이고, 취향이나 재능도 비슷해서 말하자면 친구 따라 강남 간 셈인데, 그들이 일찌감치 퇴장해 버리는 바람에 나는 거리의 복잡한 인파 속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아버린 미아 꼴이 되고 말았다.
문단과 담을 쌓고 외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자 나의 문학을 독려하기 위해 두 가지 원칙과 소신을 목숨 줄처럼 붙들고 살아왔다.
“닐어디미러리(niladmirari)를 붙잡고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라.”
‘닐어디미러리’는 라틴어인데 영어론 'to wonder at nothing' 즉 “이름과 명성을 보고 쉽게 감탄하지 말라”는 뜻이다. “작가는 선입견이나 사전정보 없이 어떤 작품의 가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인에게 ‘정신적인 조루증’보다 금기해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퍼세이이즘(perseism)을 실천하라.”
‘perse’도 라틴어인데 영어로는 ‘intrinsically or in itself’ 즉 ‘그 자체로서’라는 뜻이다. 작품은 그 자체만을 보고 평가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권위나 명성에 위축되지 않고 작품도 사람이나 이름이 아닌 작품 자체만을 보고 평가하라는 것이다. 예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고달프고 외로울 때마다 나의 원칙과 소신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닐어디미러리’와 ‘퍼세이이즘’은 나를 지탱해 준 두 개의 기둥이었다.
3. ‘나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 가볍고 일상적인 것에서도 얼마든지 삶의 의미를 캐낼 수 있고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瑣末主義), trivialism)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서 크고 비범한 것을 캐내는 능력이야말로 참으로 빛나는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큰 것을 크게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은 것을 크게 만드는 것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난 작가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쓸 때마다 “관념소설, 민중소설, 지식소설, 추리소설, 실험소설, 탐미소설, 심리소설” 이런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렇듯 복합적이고 다양한 주제와 경향을 항상 생각하면서 내가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다. 어김없이 세태풍자와 내면탐구에 몰두했고 무엇보다 문체에 심혈을 기울었다.
그러나 그런 소설은 의식과 정의가 없다고 폄하되기 일쑤였다. 거대한 시대적 절규 속에서 나는 움츠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떤 사조 속에 소설이 규격화되고 유형화 되는 것도 싫었다. 나는 이데올로기의 한복판에 서기를 싫어했다. 일테면 분단소설이 휩쓸고 있는 80연대의 문단은 나에겐 찬바람이 부는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작품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감동은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주와 분노, 증오와 투쟁만이 난무하는 토양에서는 결코 참된 문학이 성장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자에 내 소설은 때론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물방울처럼 튀어 오르는 작가의 육성 혹은 생소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내 머릿속은 늘 무수한 생각들로 들끓고 있다. 혹은 울고 혹은 웃으며 저마다 생각들이 그럴듯한 모양을 지어서 내게 보여주는데 나는 그 모습에 부지런히 언어의 옷을 입혀주었다. ‘물방울 하나의 기록’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유난히 짧은 ‘미니멀 같은 소설’과 실험소설의 수술대에 뉘었다가 변방으로 밀려나버린 ‘쉬르풍의 소설’들도 합류했다.[18]
내게 재능이 있을까. 나를 여전히 괴롭히는 생각이다. 재능이 없으면 누가 뭐래도 문학은 안 되는 거니까. 가당찮게도 나는 아직도 의지가 재능을 이기고 집념이 운명을 바꿔놓는다는 따위의 말은 믿지 않는다. 만약 하늘이 내려준 재능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나는 변함없이 불후의 작품을 쓰고야 말 것이다. 오랜만에 하나의 가능성, 언어에 서식할 수 있는 무한한 아름다움과 진실을 창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꿈에 부풀어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제 문체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소박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비단결같이 촘촘하고 은은하고 매끄러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산문 속에, 청춘의 빛나는 나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내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다. 작고 평범한 것에서 영원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는 재능을 보여주고 싶다. 격앙된 시대적 정서나 아편 같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서 향수 짙은 서정을 일궈낼 수 있는, 살아서 펄떡이는 문체를 보여주고 싶다.”
2.8. 창작동인시대
1984에 월간문학 출신 소설가들이 결성한 ‘창작동인’에 참가했다.[19] 1984년에 창작동인지 제1집 ‘태어난 새는 날아야 한다’를 발간했다. 이어서 1985에 ‘새들은 둥지를 떠났다’ 1992년에 ‘겨울 하늘, 열두 개의 풍선’ 등이 출간되었다. 나는 창작동인지에 해동머리(1984) 먼 나라 십자로(1985년) 불꽃세월의 벌판(1992)을 발표했다. 최초로 월간문학 출신만으로 만들어진 창작동인은 1980년 문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정예작가로서 저마다 활동이 활발했는데, 특히 나는 당시 태동한 ‘실천문학’ 쪽에서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았다. 창작동인시대는 등단하고 나서 내가 오로지 소설쓰기에 심혈을 기울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90연대에 나는 사실상 절필했고, 문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2.9. 가정파탄과 유리표박
1993년에는 나를 무너뜨리는 일들이 많았다. 맏딸의 파리유학으로 시작된 가족이산은 그해 여름 막내의 결혼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한 해 동안에 세 딸이 모두 내 곁을 떠났다. 단란했던 시절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홀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느낌이 나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오월부터 심한 신경성대장염을 앓기 시작했다. 여름에 뜻밖의 불행이 찾아왔다. 멀쩡하던 김 서방이 갑자기 심장혈관절개와 발목절단수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고 있었다. 둘째 사위가 수술은 받던 바로 그날, 막내가 대구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나서 느닷없이 김 서방이 쓰려졌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막내부부는 허둥지둥 파리로 떠났다. 그때 아내가 결정타를 먹여 버렸다. ‘움직이면 손해(動卽損)‘라고 내가 그토록 신신당부했는데도 아내가 먹자골목에서 다섯 번째로 식당을 개업했다. 얼마 안 되어 가게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20] 나는 1994년에 다시 송파에서 외국어학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국어학원도 다음해 문을 닫았다. 노량진 정진학원 이재순 원장이 급사하자, 학원오너가 원장을 맡아서 학원을 관리해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학원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내부의 분란이 일어나서 이 년 만에 학원을 그만두었다.[21] 화불단행(禍不單行)이었다. 가정도 풍비박산이 되었고 결국 아내와 헤어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의 유리표박(流離漂泊)[22]이 시작되었다.
2.10. 재혼과 강남문협시대
20세기 저물어가는 1999년 어느 가을날 나는 소설가 최병탁의 초대를 받고 대모산 산행에 참가했다. 그날 조정애 시인과 유현종 회장을 비롯한 강남문협 문인들을 만났다. 예닐곱 명이 대모산 모임을 갖고 일요일마다 대모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정애 시인을 계속 만났고 마침내 결혼했다.[23] 친구 따라 강남에 왔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린 것이다. 그리고 강남문협에 가입하여 제2문학인생을 시작했다. 2000년에 조정애 시인이 유네스코 세계시의 날 기념 문화일보시낭송회를 주관했을 때, 3월 21일부터 12월 26일까지 9회에 걸쳐 열린 범문단의 시문학행사에서, 나는 아내를 도와서 낭송회 사회를 보고, 매달 시인들을 초대하고, 낭송시집 9권을 발간했다. 시인과 소설가 부부의 빛나는 케미를 보여주었다. 나의 문학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시간이었다. 이후로 강남문협을 중심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왔지만 문단을 멀리하고 문인과 교유하지 않은 것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한때 몇 날을 뜬눈으로 새우며 고민했다. ‘이름을 낼 것이냐, 맘 편히 살 것이냐. 유명의 구속을 택할 것이냐, 무명의 자유를 택할 것이냐.’ 입신양명이냐 유유자적이냐. 결국 나는 무명의 자유를 선택했다. 써놓은 글조차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별의별 이유를 붙여서 항아리 속에 담아서 묻어버렸다. 타고난 나의 품부(稟賦)와도 무관치 않았다. 이제 와서 빈손으로 이생을 떠나간들 무엇을 아쉬워하랴. 한순간 한순간을 알차게 살아낸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2.11. 근황
1997년 정진학원 원장에서 퇴임한 뒤로 나는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 글 쓰는 일 이외는 하는 일이 없었다. 사무한신이 따로 없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생활에 푹 빠졌다. 근자에는 책도 여러 권 냈다.
2021년 4월 15일 수상록 ‘클럽방문기’ 출간
2022년 12월 1일 장편소설 ‘우시아로 가는 길’ 출간
2023년 4월 25일 수상록 ‘아고니스트 당신’ 출간
2023년 4월 25일 장편소설 ‘친구줄리앙’ 출간
2024년 6월 18일 수상록 ‘완벽한 구멍’ 완성
2024년 9월 22일 수상록 ‘쾌적한 악몽’ 완성
2024년 10월 5일 수상록 ‘내가 버린 시대’ 완성
2024년 11월 25일 소설집 ‘해동머리’ 출간
2008년부터 편년체 장편소설 ‘당신’을 쓰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한두 편의 중단편소설로 꾸며서 일 년을 단위로 한 권씩 완성했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빠짐없이 소설로 형상화했다.[24] ‘질풍노도시대’(疾風怒濤時代)를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작가의 내면풍경과 시대상을 낱낱이 증언해놓았다. 이데올로기나 정치비판이 끼어들면 문학은 오염되고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중적의미로 쓰였다. 우선 소설을 쓰고 있는 필자를 가리킨다. 바로 고뇌하는 사람 ‘아고니스트’(agonist)이다. 가장 위대한 당신은 예수였다. 겟세마네에서 고뇌에 찬 그의 기도는 핏방울이었다. 가장 소중한 ‘당신’은 나의 모든 지성과 감성을 쏟아놓을 때 내가 다가가서 붙잡고 의지하고 싶었던 무수한 타인들이다. 그들은 발칙하고 당돌한 내 언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종착지요 고향이었다. 내 글이 때론 서사와 맥락이 없고 태깔만 고운 ‘추상덩어리’로 변질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이 시대와 인간에 대한 불평이나 터뜨리는 ‘게정꾼 혹은 싸움닭’으로 전락한 사람으로 느껴졌을 때 나는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썼다. 가장 하찮은 것, 가벼운 것, 발칙한 것, 어설픈 것, 맞갖잖은 것에서도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얼마든지 캐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소설을 ‘인류의 정신사’에 바치고 싶다. 문헌적 가치가 있는 정신적 유산으로 영원히 살아남기를 몽매에도 기원하고 있다. 기어코 완간(完刊)하고야 말 것이다.
3. 문학계 평가
우리사회를 사나운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원흉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위선과 편견과 광기라는 사실을 증명해보임으로써 우리를 아연케 하는 소설- 그것이 바로 오태규 문학의 읽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마력이다. 해부의사처럼 냉정한 눈으로 우리사회 어둠의 가면을 하나하나 벗겨 보이는 오 선배의 작가적 역량은 사회적 결백한 아웃사이더로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능력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다. -김승옥(소설가)
오턔규의 소설은 통시대적으로 우리 소설을 아우른다. 그의 소설에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부터 김동인의 ‘광염소나타’(1930)와 이상의 ‘봉별기’(1936),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6)의 특징들이 얼마만큼씩 80연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녹아 들어가 있다. 이러한 복합성과 복잡성이 그가 대중적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이유로 보이기도 하다. 그의 박학다식과 다층적인 문화적 소양은 오히려 문학에 대한 순수성을 강화시켜, 그는 외골수로 자신만의 문학적 금자탑을 몰래 쌓아왔다. 그에게 주어진 대가는 외로움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하응백(소설가, 문학평론가)
그의 소설 문장 속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얼마든지 색채를 귀로 들을 수 있고 음향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언어의 살집과 영혼이 떠올랐고 문자의 몸부림과 비명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명조체 한글이 머리칼이 까맣고 눈빛이 초롱초롱한 아이들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의 문체는 영롱하고 생동하고 발칙했다.[25] 박재삼(시인)
4. 주요작품
4.1. 장편소설
2001년 친구줄리앙
2022년 우시아로 가는 길
2008년 ‘당신’부터 2019년 ‘당신’까지 11권을 탈고
4.2. 중단편소설
1982년 한려수도
1983년 주말나그네
1984년 해동머리
1985년 칠칠년 봉별기
1985년 알리바이 서설
1985년 인간밀화집
1986년 도시의 허영독본
1986년 유랑시대
1988년 의장횡사
1988년 어머니의 가출
1988년 우시아로 가는 길
1988년 바다의 환상곡
1989년 굿판의 추억
1992년 ‘작은 불평의 천국’ 출간
2003년 물방울 하나의 기록
2006년 지붕 위에서 외쳐보리라
2006년 그대 레비아탄
2010년 종생기
2010년 일곱 번째 복둥이
2015년 제일강산
2015년 네 탄생은 큰 축복이었다.
2021년 미니멀 산책
2021년 춘원을 찾아서
2022년 화두의 보물창고
2023년 빈곤의 꿈
2023년 고맙다, 친구야
2023년 우리는 모두 홈리스야
2024년 지고지순한 영혼의 이동
2024년 법불아귀, 네 멋대로 하라
2024년 떠도는 사유의 바다
2024년 영광은 죽음과 손잡고 오는 것
4.3. 수필
2016년 수상록 ‘내가 버린 시대’ 탈고
2017년 수상록 ‘완벽한 구멍‘ 탈고
2021년 수상록 ‘클럽방문기’ 출간
2024년 수상록 ‘쾌적한 악몽’ 탈고
*주석[1] 고등학생이 이 시험에 합격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영시론, 영문학사, 영어학습지도법까지 출제되었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합격했을 때 세상이 놀랄 만했다. 이로 인한 후유증도 있었다. 나의 오만과 독선이 그때 싹 텄을 지도 모른다.[2] 본정통은 도시 중심가의 길을 가리킨다.[3]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 선수의 집안이었다.[4] 식당 여주인이 어머니와 친해서 해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식당기명을 몽땅 주고 갔다.[5] 나중에는 순한 양이 되어 작은아버지지 시키는 대로 했다.[6] 산 밑 높은 지대로 미국선교사 거주지고, 매산학교가 있었던 곳이다.[7] 아버지는 일본 경도로 유학을 갔다가 각기병이 걸려 조기 귀국하신 분이다. 특히 일본말을 잘하고 친화력이 뛰어나서 본정통에서 구장(區長)을 하면서 일본사람을 부리며 사셨다.[8] 그때는 국가고시로 중학교입학시험을 치렀다. 성적이 우수하여 반장이 되었다.[9] 어머니가 다녔던 여학교가 있는 매산뚱에 갔다가 미국선교사를 보고 그들이 쓰는 말을 배우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한테서 영어를 배웠다.[10] 나는 하루같이 영어단어를 외우면서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등하굣길에서 단어만 암기한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땐 ‘50가지 유명한 이야기’(Fifty Famous Stories), 고등학교 땐 찰스 렘의 ‘셰익스피어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를 줄줄이 외웠다. 가장 유명한 4대 연설인 패트릭 헨리, 링컨, 안토니우스, 데모스테네스의 웅변을 암기한 것도 그때였다.[11] 내가 몇 년을 보냈던 ‘금오도’는 ‘조선시대 왕실사냥터’였다고 이야기할 만큼 숲이 수려하고 깊었다. 나는 오로지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12] 한 십년 동안 고향의 명문고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나자 어찌된 셈인지 촉망받던 교육자로서의 그 패기와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느닷없이 학교에 사표를 던져 버렸다.[13] 흐지부지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자 완고한 아버지가 건건이 나를 어거(馭車)하고 윽박질렀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을 이루려고 그토록 안정된 직장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단 말인가. 나도 모르겠고,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사표를 냈을 뿐이다. 여름의 문턱에서 나는 기어이 고향에서 탈출하고 말았다.[14] 수송동 숙명여고 앞에 있던 작은 학원이었는데 나중에 노량진으로 가서 한국제일의 단과학원이 되었다.[15] 어느 날 아침, 홀로 관악산에 올라간 원장 이재순이 돌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시장마비로 급사한 것이다. 그는 학원가의 전설이 되었다.[16] 각 대학이 학원에서 유명강사를 초대하여 토플강의를 들었다. 주로 학생회에서 강사를 선정하여 불렀는데 청강생들은 의대생들이 많았다.[17]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행운 때문이었다. 내 고향 순천은 예향(藝鄕)답게 걸출한 소설가 김승옥 서정인 조정래 세 사람을 배출했다. 일찌감치 소설에 대한 깊고 수준 높은 안목과 취향을 갖게 되었고, 특히 김승옥 형제의 도움으로 내가 등단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18] 초기소설 ‘의장횡사’ 중기소설 ‘지붕 위에서 외쳐보리다’ 근작소설 ‘화두의 보물창고’ 등은 실험소설이나 쉬르풍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썼다.[19] 창작동인은 김호운 강인수 최병탁 홍성암 강승원 오태규 김만태 이상문 고시홍 고영엽 곽의진 이원규 김예나 등 13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했다.[20] 수유리에서 ‘대연관’을 비롯해 다섯 군데에서 식당을 개업했는데 모두 실패했다.[21] 죽은 원장 이재순의 미망인과 학원 오너인 신문로사모님 간의 불화와 민사재판으로 학원이 풍비박산이 되었다.[22] 일정한 주거도 없이 떠돌았다. 아내(조정애 시인)를 만나기 바로 전날에도 친구 최병탁 소설가와 함께 서울 인근 어느 절에서 머물고 있었다.[23] 일요일마다 대모산 친구들과 함께 산행에서 조정애 시인을 만났다. 그때 아내는 강남구민회관에서 3인 시화전을 열고 있던 어느 날 저녁 홀로 전시회를 찾아갔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인연은 싹이 트고 자라서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24] MB가 2008년에 집권할 때부터 2017년에 박근혜 정권이 붕괴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빠짐없이 소설로 형상화했다.[25] 나는 월간문학소설신인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고향후배인 김승옥은 벌써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휩쓸고 한국문단의 전설이 돼 있었다. 이제야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오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름도 오태완이라고 썼는데 필명이라기보다 나를 감추는 가명이었다. 이런 나의 처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고 박재삼 시인은 한려수도를 칭찬하는 독후감까지 편지로 써서 보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