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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집단 서방의 횡포에 최초로 저항한 인물,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 파샤

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11/16 [10:30]

▲필자/ 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집단 서방 연합국의 횡포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난 조직이 청년 투르크당의 무스타파 케말이 최초일까?, 혹은 그가 유일할까? 정답은 단언컨데 "아니다!" 

 

집단 서방의 횡포에 최초로 저항한 인물 은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 파샤이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에 분노해 자신의 군대를 시리아에서 앙카라로 진군시켰다.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 파샤의 봉기에 호응하여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가 해산된 군인들과 동부 지역의 투르크 인들을 결성해 연합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들 저항 조직 중 게릴라 전을 중점으로 한 조직이 생겨났는데  이들 조직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은 체르케즈 에템(Cherkhez Ethem)이 이끄는 카프카스 조직으로 이들 중 다수의 아제리 인과 조지아 인들이 섞여 있었다. 이스탄불에서 사실상 집단 서방 열강의 포로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던 장군들을 달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지역 요충지에 태수로 임명하여 더 이상의 연합국과의 충돌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의 입장에서 터키 봉기군이 자신을 포로로 잡고 있는 집단 서방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자신의 무력함을 비판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양다리를 걸친 것으로 해석된다.

 

아나톨리아 남쪽 근해는 사실상 영국 전함이 장악하다시피 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이곳에서 서로 영유권을 두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터키 봉기의 사령부는 매우 황량한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한 술탄과 오스만 정부는 반기를 든 주요 파샤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들에게도 당시 세브르 조약 규정에 따라 연합군이 통제하지 않는 "오스만 직속 종주권"하에 있는 남은 영토의 요직에 등용하고자 하였다. 물론 술탄의 이러한 조치는 현재 학계에서는 다양한 논란이 있다. 혹자는 민족 봉기를 지원하려는 국제적인 움직임 때문이라고도 하였으며 술탄이 이스탄불을 자신이 통제하길 원했지만 이러한 부분들이 술탄에게 이스탄불을 맡길 수 있던 점령군의 목표와 일치하였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 주요 장교들을 수도 외곽으로 내보내도록 술탄이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술탄이 수도 내에 이들 군인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이 강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술탄은 조직화 된 군대 없이는 연합군을 이길 수 없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첫 번째 작전의 성공이 바로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그러나 결국은 연합국에 패전했지만 그래도 투르크 족의 기상은 남아 있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갈리폴리 전투의 승장 무스타파 케말 파샤이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한 임무를 받게 된다. 1919년 5월 16일 저녁, 무스타파 케말과 참모들은 낡은 증기선 SS 반디르마 호를 타고 이스탄불을 떠나 삼순으로 갔다. 터키 역사교과서에는 이날 무스타파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 반드르마호가 항구를 벗어나자 공해상에서 월성기를 바꾸어 게양하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은 삼순에 당도하였으며, 민티카 궁전 호텔을 사령부로 삼았다. 이후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무스타파 케말은 혁명을 선언하여 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를 시작한다. 

 

케말은 삼순 주민들이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상륙에 주의하라는 첩보를 발령하였으며, 대중 집회를 열고 집단 서방과의 항쟁을 촉구했다. 이와 같은 전보망으로 인해 아나톨리아 내의 오스만 군 부대와 신속히 연락하여 여러 민족주의자 집단의 연대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케말은 외국 대사관과 전쟁부에 전보를 보내어 영국이 이 지역에 있는 그리스 부대의 지원을 확대한 것에 항의하였으며 1주일 뒤 케말과 그의 참모부는 삼순에서 내륙으로 85km 떨어진 하브자로 이동하게 된다. 한편 오스만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했다. 따라서 정부군의 체포가 있을 수 있기에 케말과 참모본부는 하브자에서 안전한 내륙의 시바스(Sivas)로 이동했고  1919년 9월 4일 시바스에서 최초의 터키 의회를 개최하게 된다. 터키는 이날의 "터키 민주주의 의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후 보다 많은 독립 군벌들을 규합한 의회는 1920년 4월 23일에 앙카라에서 대국민의회(Büyük Millet Meclisi)로 개칭하면서 오늘날 터키 입법부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때 대국민의회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국적인 지지가 필요했다고 서술했다. 그는 중요한 감찰감직을 맡은데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쟁 영웅으로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군대는 무장이 해제되어 있는 상태이고 공식적으로 집단 서방의 식민지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투르크 민족 봉기를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과 만났다. 1919년 6월 21일, 그는 라우프 오르바이(Hüseyin Rauf Orbay, 1881~1964),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 레페트 벨레(Leffer Belle)와 만나, 터키 아마시야(Amasya)에서 봉기 이후의 회칙을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터키 대국민의회로 명명된 봉기군은 사방이 적에 둘러싸인 상황이라 매우 고립되어 있었다. 당장 동부 지역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얻은 아르메니아가 고토 수복을 명분삼아 침공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서는 프랑스군이 세브르 조약에서 약속받은 영토를 접수하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고 서부에서는 그리스 군과 터키의 잔여 군대의 치열한 대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국민의회의 병력으로는 사방의 적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가장 세력이 크고 아나톨리아의 곡창지대를 장악한 그리스 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시킨 상황이었다. 그리고 터키군의 빈 자리는 결국 민병대가 맡게 되었으며 이 때 민병대들의 활약은 가지안테프 전투에서 두드러진다. 1920년 4월 1일부터 1921년 2월 9일까지 샤힌 베이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는 그보다 10배는 되는 도시 내 주둔하고 있었던 많은 프랑스 군과 아르메니아계 민병대를 상대로 농성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저지시켰고 인근 도시인 카흐라만마라쉬와 샨르우르파에서도 민병대들이 협공까지 감행하면서 프랑스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남동부 지방의 대 프랑스 전선은 앙카라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터키 대국민의회(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가 신경 써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이 전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안테프 전쟁(Antep Savaşı)이라고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first person to resist the tyranny of the Western collective in Turkey, Ali Fuat Cebesoy Pasha

 

- Columnist Jeong Gil-seon

 

Was Mustafa Kemal of the Young Turk Party the first or only organization to rise up in anger against the tyranny of the Western collective? The answer is a resounding "no!"

 

The first person to resist the tyranny of the Western collective was Ali Fuat Cebesoy Pasha. He marched his army from Syria to Ankara in anger at the Treaty of Sèvres signed on August 10, 1920.

 

In response to the uprising of Ali Fuat Cebesoy Pasha, the Kâzım Karabekir based in Erzurum in eastern Anatolia formed a group of disbanded soldiers and Turks from the eastern regions and declared war on the Allies. Among these resistance groups, groups focusing on guerrilla warfare emerged, the most powerful of which was the Caucasian group led by Cherkhez Ethem, which included many Azeris and Georgians. Padishah Mehmet VI Vahidettin, who was now virtually a prisoner of the Western powers in Istanbul, appointed satraps in key areas of Anatolia where Ottoman administration remained in order to appease the generals who were still loyal to the Ottoman Empire and prevent further clashes with the Allies. However, this action is interpreted as a double-cross from Mehmet's perspective, as it could be useful for the Turkish uprising to drive out the Western powers that were holding him captive, but they could also criticize his powerlessness and stage a coup.

 

The southern coast of Anatolia was practically controlled by British warships, making it difficult to control this area, and since the atmosphere was becoming tense between Greece and Italy over territorial rights, the headquarters of the Turkish uprising had no choice but to move to the very desolate central Anatolia. Faced with resistance from nationalists, the Sultan and the Ottoman government attempted to persuade the major rebellious pashas by appointing them to important posts in the remaining territories that were under the "direct Ottoman suzerainty" of the Allied forces under the Treaty of Sevres at the time. Of course, this action by the Sultan is currently controversial in academic circles. Some say it was because of the international movement to support the national uprising, and others say it was because the Sultan wanted to control Istanbul himself, but these aspects coincided with the goals of the occupying forces who could entrust Istanbul to the Sultan. Of course, the most important reason the Sultan decided to send these key officers outside the capital was that he wanted to minimize the influence of these soldiers in the capital. The reason was to eliminate the possibility of a coup.

 

At the time, the Sultan said that he could not defeat the Allied forces without an organized army, and the first successful operation was the victory in the Battle of Gallipoli. However, even though they were eventually defeated by the Allied forces, the spirit of the Turks still remained. The person who appeared at this time was Mustafa Kemal Pasha, the commander of the Battle of Gallipoli. Mustafa Kemal Pasha was given the task of supervising the disbandment of the remaining Ottoman army by Mehmet VI and was given the task of suppress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On the evening of May 16, 1919, Mustafa Kemal and his staff left Istanbul for Samsun on the old steamship SS Bandirma. Turkish history textbooks tell the story of Mustafa Kemal ordering the British-flagged steamship Bandirma to change its flag on the high seas as it left port. On May 19, Mustafa Kemal arrived in Samsun and made the Mintika Palace Hotel his headquarters. After meeting with figures such as Kyazm Karabekir and Ali Fuat, Mustafa Kemal declared a revolution and began an uprising to drive out the Allied forces. Kemal issued intelligence warnings to the residents of Samsun to be on guard against the landing of Greeks and Italians, and held mass rallies to urge them to collectively fight against the West. Through this telegram network, he quickly established contact with Ottoman military units in Anatolia and began to form solidarity among various nationalist groups. Kemal sent telegrams to foreign embassies and the War Ministry protesting the British expansion of support for Greek troops in the area, and a week later Kemal and his staff moved from Samsun to Habja, 85 km inland. Meanwhile, the Ottoman government, having discovered Kemal's betrayal, sentenced him to death in absentia. Therefore, in order to avoid arrest by government troops, Kemal and his staff moved from Habja to the safety of Sivas, further inland, where they convened the first Turkish parliament on 4 September 1919. This day is celebrated in Turkey as the "Day of the Turkish Democratic Parliament." The parliament, which later included more independent warlords, renamed itself the Grand National Assembly (Büyük Millet Meclisi) in Ankara on 23 April 1920, laying the foundation for the Turkish legislature today.

 

At this time, the Grand National Assembly elected Mustafa Kemal Pasha as commander-in-chief. Mustafa Kemal described in his memoirs that he needed nationwide support. He was able to gain their trust because he held an important post as inspector general and had a reputation as a war hero in the Battle of Gallipoli. However, this alone was not enough to win over everyone. With the army disarmed and officially a colony of the West, he met with several people to further expand the Turkish national uprising. On 21 June 1919, he met with Hüseyin Rauf Orbay (1881–1964), Ali Fuat Zebesoy, and Leffer Belle, and issued the post-uprising decree in Amasya, Turkey. However, the uprising, called the Grand National Assembly of Turkey, was very isolated, surrounded by enemies on all sides. Armenia, which had received French support in the eastern region, was invading under the pretext of recovering the old territory, while in the south, the French army was advancing north to take over the territory promised in the Treaty of Sevres, and in the west, a fierce confrontation between the Greek army and the remaining Turkish army continued.

 

At that time, the Grand National Assembly's forces were not enough to deal with the enemies on all sides, so they concentrated their forces on the Greek army, which was the largest in power and controlled the granary of Anatolia. The Turkish army's empty position was eventually filled by the militia, and the militia's activities at that time were prominent in the Battle of Gaziantep. From April 1, 1920 to February 9, 1921, the 300-strong militia led by Shahin Bey fought a siege against the French troops and Armenian militias stationed in the city, which were ten times larger than his own, and finally defeated them. In the nearby cities of Kahramanmaras and Şanlıurfa, the militias also successfully blocked the French troops with joint attacks. However, the anti-French front in the southeastern region was too far from Ankara for the Turkish Grand National Assembly (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 to pay attention to, and as a result, the events that took place on this front are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Antep War (Antep Savaşı). lukybaby7@gmail.com

 

*Author/ Jeong Gil-seon.

 

 

Member of Novatopos, historian, paleo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Paleoanthropology, Russian Academy of Sciences.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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