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민중항쟁을 초기에 기록한 사람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다. 당시 광주 대동고 영어교사였던 박 이사장은 항쟁 현장에서 지켜본 참혹한 막전막후(幕前幕後)를 1980년 6월 15일 ‘5·18 光州義擧(광주의거)-市民抗爭(시민항쟁)의 背景(배경)과 展開過程(전개과정)’이란 제목의 '육필원고'를 작성했다. 참으로 값진 기록이다. 박석무 이사장은 지난 2018년 5월 11일 ‘추가기록’에서 그 집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민중항쟁에 고등학교 교사로서 직접 가담하여 5월 27일 전남도청의 시민군이 살육되기까지를 지켜보았던 견해이다. 5월 27일부터 검거령이 내려 필자는 수배되었고, 6월 5일까지 광주의 이곳저곳에서 은신하다가 당시의 무서운 공포 분위기에서 장기간 은신하지 않고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6월 5일 상경하였다. 이 후 6월 13일까지의 보도들을 살피고 운동권 후배들과 긴밀한 상의 끝에 죽기 전에 유언으로 광주의 진실을 밝혀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서울의 숨어있던 방에서 6월 14일과 15일 사이에 기록해 두었던 초고가 이 글이다.
9일 간의 광주항쟁 기간 중 시위현장에 계속 참여하며 만난 여러 사람들의 정보를 종합한 내용이고, 5월 27일부터 6월 5일까지 광주에서 접했던 온갖 소식과 상경 후 10여 일 동안 얻어들은 정보를 합하여 얻은 결론을 토대로 하여 작성한 것이다. 당시 기록할 때에도 가장 객관적인 진실만 기록하였는데, 38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보더라도 사망자 숫자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내용이 진실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글을 이미 읽어 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보다 깊게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그 내용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당시 현직 교사가 피를 토하듯 단숨에 작성한 이 글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그냥 온몸으로 읽으면 된다.
“1980년 5월18일 오후 학생들과 대치하여 데모를 제지하던 계엄군의 모습은 삼척동자가 보더라도 이 나라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군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M16이라는 현대무기로 중무장한 군인에게 기껏해야 돌멩이나 던지는 학생들을 붙잡히는 대로 총에 꽂은 대검으로 찌르거나 신체의 어느 부분인가를 가리지 않고 총대로 치고받으며 박살을 냈고, 학생을 붙잡으면 옷을 벗긴 뒤 그 옷을 찢어 팔목을 등 뒤로 꽁꽁 묶었으며, 또한 길거리에 눕히고 치고 밟는 만행을 저질렀다. 계엄군의 공격에 밀려 쫓겨 가는 학생들을 피할 수 있는 막바지인 고층건물이면 최고층까지, 가정집의 옥상까지, 막다른 골목까지 추적하여 잡아내서는 박살을 내어 군용차에 짐짝 던지듯 실어내곤 하였다. 겁에 질린 학생들은 더러는 옥상에서 그냥 땅으로 뛰어내리고,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다가 즉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목격자들은 이야기 했다.
이를 바라본 시민들은 가슴을 태우며 분노를 참지 못했고, 어쩌면 군인이 저렇게 무자비할 수 있느냐고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남녀 대학생들을 붙잡는 대로 옷을 벗기고 꿇어앉게 해놓고 등을 짓밟고 걸어 다니고 줄줄이 눕혀 놓고 짓이겨 밟는 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옷을 벗겨 줄줄이 묶어 놓고 후려 때리기도 하고, 전봇대에 옷을 벗긴 채 달아 메어 놓기도 하고, 보도블럭 옆 철주에 짐승처럼 묶어놓았다가 차가 오면 짐작처럼 던져서 실어가기도 했다. 야밤을 무서워했거나 시민의 합세를 두려워했는지 계엄당국은 갑작스레 광주권의 통금시간을 단축하여 밤 9시부터 익일 4시까지로 발표하였지만, 신문 방송 TV 어느 것 하나 이날의 잔학무도한 계엄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숫자적으로 열세이고 힘에 있어 부족한 학생들, 가진 거라고는 정의감뿐 하루내 외쳐댄 “불법계엄 해제”, “연행학생 석방”, “휴교령 철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로 목이 메이고 힘이 빠진 학생들은 변두리 곳곳에서 흩어져 싸우다가 십중팔구는 붙들려갔고, 그나마도 날이 어둡자 귀가해버려 18일의 싸움은 잦아지는 듯 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학생들이 집단으로 흩어져간 산수동과 지산동 쪽에서는 밤새도록 집집마다 가가호호를 안방까지 짓밟고 들어가 수색하며 젊은 사람은 모두 구타해서 연행해가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비극의 날, 천인공노할 백성 살륙극은 19일을 절정으로 하는 듯 또 한 판의 승부싸움이 전개되었다. 18일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19일에 다시 일어난 광주학생들의 끈질긴 투쟁, 눈물 겹고 기막힌 의기, 죽음으로써 항거한 혈투가 민족의 저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5월19일 아침 날이 밝자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떼를 지어 몰려오던 대학생들! 그들은 어제 그처럼 많은 수가 연행되고 붙잡혀 실려 갔음에도 쉬지 않고 숫자가 불어 또다시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으로 변해 갔고, 발악을 하듯 계엄군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구경하던 시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찌르고 차고 총으로 치고 박아 광주 시가는 온통 유혈이 낭자하였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했다. 이때의 계엄군이야말로 언어 그대로의 폭도였고 흡혈귀였으며 굶주린 이리떼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데모의 주력부대인 학생들은 시위 중 고충건물의 사무실에서 구경만 하는 시민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우리는 죽어 가는데 구경만 하기냐고 외쳐대며 시민의 합세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분노한 데모대는 CBS 앞 차량을 불지르고 MBC 앞 차량도 불질렀다. 도망간 학생을 쫓아온 계엄군은 사무실이나 건물마다 들어가 박살을 내는 등 미친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곳저곳에서 학생들의 희생자는 늘어만 갔고 육탄으로 총칼 앞에 혈투를 감행하여 목불인견의 비참상이었다. 적십자병원 앞과 중앙극장 앞에서 여학생 유방을 도려낸 만행, 임동에서 임부의 배를 찌러 태아가 튀어나온 사실, 법원 앞에서 4세의 어린이를 죽여서 새끼줄로 목에 걸고 끌고 다니던 만행을 시민들은 목격하였고, 학생을 실어다 준다는 이유만으로 택시운전사들이 계엄군의 대검과 총개머리에 찔리거나 박이 터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만행을 보다 못해 혀를 차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에게도 무차별 찌르고 후려치는 폭악상을 보였다.
식당이나 다방, 사무실이나 관공서까지 쳐들어가 젊게 보이거나 학생 모습이면 무차별 치고 박고 끌어내어 차에 싣고 연행해가자 보다 못한 시민들, 참다못한 시민들이 분노와 악에 북받쳐 이날 오후부터 중심가에서는 학생들과 함께 돌을 던지며 구호를 외치고 악을 쓰며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금남로 일대는 인산인해의 인파 속에서 계엄군과 밀리고 닥치는 참극이 벌어졌다. 공용터미널 부근이나 신역 근처에서도 운집한 시민이 함께 합세하여 노도와 같은 기세를 이루었고, 시민의 맨주먹과 무장계엄군의 총칼이 맞부딪치는 싸움이 치열하였다.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에서는 계엄군이 인파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이때의 발포가 그들의 첫 발포임을 광주시민은 모두 알고 있는데, 당국은 계속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필자/조한규 언론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person who initially recorded the May 18 Gwangju Uprising was Park Seok-mu, Chairman of Dasan Research Institute
- Jo Han-gyu, Journalist
The person who initially recorded the May 18 Gwangju Uprising was Park Seok-mu, Chairman of Dasan Research Institute. Chairman Park, who was an English teacher at Daedong High School in Gwangju at the time, wrote a ‘handwritten manuscript’ titled ‘Background and Development Process of the May 18 Gwangju Uprising - Citizens’ Uprising’ on June 15, 1980, describing the tragic events he witnessed at the scene of the uprising. It is truly a valuable record. Chairman Park Seok-mu explained the background of the writing in ‘Additional Records’ on May 11, 2018 as follows:
“This is my opinion from the perspective of a high school teacher who directly participated in the Gwangju Uprising that began on May 18, 1980, and watched until the massacre of the citizens’ army at the South Jeolla Provincial Office on May 27. An arrest warrant was issued on May 27, and I was wanted. I hid in various places in Gwangju until June 5, and then, judging that I would be killed if I did not hide for a long time in the terrifying atmosphere of the time, I went to Seoul on June 5. After reviewing the reports up until June 13 and consulting closely with my juniors in the activist community, I wrote this draft between June 14 and 15 in a hidden room in Seoul with the solemn determination to reveal the truth about Gwangju in my will before I died. This is a compilation of information from various people I met while continuously participating in the demonstrations during the nine-day Gwangju Uprising, and it was written based on the conclusions I got from combining all the news I encountered in Gwangju from May 27 to June 5 and the information I received over the ten days after returning to Seoul. At the time, I only recorded the most objective truth, and even today, 38 years later, almost all of the content is being revealed to be true, except for the significant difference in the number of deaths.”
Many of you may have already read this article, but I would like to introduce part of the content below to help you understand the novel “The Boy Comes” by Nobel Prize-winning author Han Kang in a deeper way. This article, written in one breath by a current teacher at the time, as if spitting blood, needs no further explanation. Just read it with your whole body.
“Even a three-year-old child would not believe that the martial law army, which confronted students and suppressed the demonstration on the afternoon of May 18, 1980, was a national army maintained by the taxes paid by the citizens of this country. Students who threw rocks at soldiers heavily armed with modern weapons such as M16s were caught and stabbed with bayonets attached to their guns or beaten with guns without regard to any part of their bodies, and when students were caught, they were stripped of their clothes, torn off, and their wrists were tied tightly behind their backs. They also committed atrocities by having them lie down on the street, beating them, and stomping on them. They would chase students who were being chased by martial law troops to the top floors of high-rise buildings, rooftops of houses, and dead-end alleys, where they could escape, and then they would be torn apart and carried off like luggage onto military vehicles. Witnesses said that some of the terrified students would simply jump from the rooftops to the ground, and many of them would die instantly after jumping from high-rise buildings. Citizens who watched this were heartbroken and could not contain their anger, and they were clicking their tongues wondering how soldiers could be so merciless. They committed the worst atrocities that a human being can commit, such as grabbing male and female college students, stripping them naked, making them kneel, trampling on their backs, walking around them, and making them lie down in a row and trampling on them. They stripped them of their clothes, tied them up, and beat them. They hung them naked on electric poles, and tied them to iron posts next to the pavement blocks like animals, and when a car came, they threw them and carried them away as expected. Perhap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night or fearing the citizens’ participation, the martial law authorities suddenly shortened the curfew in the Gwangju area from 9 p.m. to 4 a.m. the next day, but not a single newspaper, broadcast, or TV reported on the brutal atrocities committed by the martial law forces that day.
The students, who were numerically inferior and lacking in strength, had nothing but a sense of justice, and they shouted “lift illegal martial law,” “release arrested students,” and “abolish the school closure order” all day long. Students, who were choked up and exhausted by slogans such as “Chun Doo-hwan, step down” and “Free Kim Dae-jung,” dispersed to the outskirts and fought, and most of them were captured and returned home when it got dark, so the fighting on the 18th seemed to be getting worse. However, the martial law army trampled on every house in Sansu-dong and Jisan-dong, where students had dispersed in groups, and searched them all night long, beating and taking away all the young people.
However, on that tragic day, the atrocities of the people that would be unthinkable reached their climax on the 19th, and another round of fighting unfolded. Despite the atrocities of the 18th, the tenacious struggle of the Gwangju students, their tearful and breathtaking spirit, and their bloody fight to the death were the manifestation of the strength of the nation.
As soon as the morning of May 19th dawned, university students swarmed from every alley! Even though they were arrested and taken away in such large numbers yesterday, their numbers continued to grow and the fight turned into a street battle, and as if they were going crazy, the martial law troops stabbed, kicked, and shot not only the students but also the citizens who were watching, regardless of age or gender, and the streets of Gwangju were covered in blood and turned into a battlefield of chaos. The martial law troops at that time were literally rioters, vampires, and nothing more than a pack of hungry wolves.
The students, who were the main force of the demonstration, threw rocks at the citizens who were just watching from the offices of the Gochung Building during the demonstration and began demanding that the citizens join in, shouting, “Are you just watching us die?” The angry demonstrators set fire to the vehicles in front of CBS and MBC. The martial law troops, who chased the students who had run away, showed the appearance of mad dogs by entering every office and building and destroying them.
The number of student victims continued to increase here and there, and the bloody fights with guns and bullets were a sight of unbearable suffering. Citizens witnessed the atrocities of cutting off a female student’s breasts in front of the Red Cross Hospital and the Central Theater, the fetus jumping out of a pregnant woman’s stomach in Im-dong, and the atrocities of killing a 4-year-old child and dragging him around with a rope around his neck in front of the courthouse. There were countless instances of taxi drivers being stabbed or stabbed with bayonets and gun butts by martial law forces simply for transporting students. They also showed indiscriminate violence by stabbing and beating grandfathers and grandmothers who could not stand to see the atrocities. They stormed into restaurants, teahouses, offices, and even government offices, indiscriminately beating and dragging out anyone who looked young or a student, putting them in cars, and taking them away. The citizens who could not stand it any longer, filled with anger and evil, began to run toward the city center with students, throwing stones, shouting slogans, and cursing from that afternoon. As a result, a tragedy unfolded in the Geumnam-ro area, with people pushing and shoving against the martial law forces in the midst of a sea of people. The citizens who had gathered near the public terminal and the new station also joined in, creating a fierce battle between the citizens’ bare fists and the armed martial law forces’ guns and swords. In front of Gwangju High School in Gyerim-dong, the martial law forces fired indiscriminately at the crowd, causing countless people to fall. (All Gwangju citizens know that this was their first shot, but the authorities continue to turn a blind eye.)”
*Written by/Jo Han-gyu, journa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