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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여성노숙인은 무엇으로사는가?

46세 김해미씨 “막장인생 견뎠으니…꿋꿋하게 살렵니다”

김문수 | 기사입력 2009/04/27 [11:31]
최근 경기불황 여파로 노숙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서울시 노숙인시설협회 발표에 따르면 지난 6개월 새 노숙인이 20% 이상 늘어났다는 것.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자영업자의 실패와 비정규직 해고가 잇따르면서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노숙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여성 노숙인의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난 1999년 175명으로 집계된 여성 노숙인이 지난해 8월에는 600여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한 상황. 여성 노숙인의 경우 길거리를 떠돌거나 쪽방촌·술집·찜질방·식당 등을 전전하며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영등포역 뒷골목 거리에도 노숙자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그곳에는 절망의 수렁에 빠진 노숙자들에게 다시금 새 삶과 희망을 안겨주는 노숙자들의 터전이 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의 아픈 곳을 매만져 주고 사랑과 희망을 주는 서울 영등포 광야교회가 마련한 재활센터가 바로 그곳. <주간현대>는 여성 노속인의 애환과 아픔을 취재하기 위해 영등포 광야교회에서 마련해준 쪽방에서 생활하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김해미(가명·46)씨를 만났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 신세가 되었다가, 지금은 쪽방에서 생활하며 재기 의지를 다지는 그녀의 곡절 많은 사연을 들여다봤다. 
 
겨우내 꽁꽁 숨어 있던 노숙인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오고 있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던 지난 3월9일 기자는 서울 영등포역 굴다리를 찾았다. 오후 3시경, 영등역 앞 번화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철길 옆 굴다리를 따라 이어진 길에는 노숙인들이 공허한 눈빛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터운 점퍼를 걸치고 길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 잠을 자는 듯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는 사람, 소주 한 병을 들고 다니며 병나발을 부는 사람 등 수많은 노숙인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 여성 노숙인 거주지  ©브레이크뉴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고 

낡고 허름한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어두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광야교회 자리였던 이곳은 몇 년 전 발생한 화재로 인해 벽이 검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오래된 건물 사이를 가로질러 여성 노숙인 5명이 거주하는 쪽방에 들어섰다. 5평 남짓한 방에는 옷가지와 이불, 작은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전철과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소음이 심한 쪽방에서 여성 노숙인 김해미씨를 만나볼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녀가 노숙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단발머리에 고운 피부, 잠옷 차림으로 기자를 만난 그녀는 말투마저 차분해 살림 잘하는 가정주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혼 이후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곳 쪽방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고 현재 자활과정을 거치고 있는 여성 노숙인이다. 자신의 신분노출을 우려하며 기자와의 인터뷰를 꺼리던 그녀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내 이야기가 언론에 알려지면 딸아이가 볼까봐 무섭다. 그 아이를 만나게 되더라도 괜찮은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하다가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하고 사진도 안 내보낸다”는 기자의 설득에 마음을 바꿔 그동안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서울에서 줄곧 살아온 김씨는 지난 1983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유년시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생활했던 터라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여러 차례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른두 살 되던 해 한 남자를 알게 됐고, 6개월의 연애 끝에 한 살 터울 연상의 남편과 결혼을 하고 새롭게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남편이 술과 노름에 빠져 일을 하지 않았고 생활비도 가져다주지 않았던 것.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둔 김씨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본인이 직접 생계를 꾸리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나섰다. 고등학교 시절 재봉일을 배워뒀던 김씨는 어렵사리 제봉공장에서 보조로 취직을 했고 새벽까지 야근을 하는 날이 잦아지면서 몸은 곪을 대로 곪아갔다. 
김씨는 “남편이 경제력이 없었다. 택시운전 일을 했지만 돈을 몇푼 벌어도 노름을 하러 다녔고 생활비는 한푼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몸이 힘든 데다 그 같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고 토로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김씨는 자신의 수첩에 ‘살기 힘들다.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메모를 남겼다. 늦은 밤 귀가한 김씨의 남편이 우연히 그 메모를 보게 됐고 이를 계기로 부부는 술을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던 도중 김씨는 남편에게 ‘살기 힘들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 말을 듣고 감정이 격해진 남편은 급기야 아내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이용해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했고 김씨는 정신을 잃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날 밤 남편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이 맞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눈을 떴는데 남편이 뱀같이 느껴졌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새벽녘, 온몸에 통증을 느끼고 깨어난 김씨에게 남은 것은 멍과 마음의 상처뿐이었다. 남편의 행동에 공포를 느낀 김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친정으로 갔고 그 후 한 달 만에 이혼했다.
“아직도 비가 올 때면 맞은 곳이 아파온다. 그때의 후유증이 남아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
 
알코올 중독, 두 번의 자살기도

이혼 후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물거품처럼 무너졌다. 친정 어머니가 간경화로 쓰러지면서 힘겨운 나날이 계속된 것이다. 어머니 병수발을 하는 사이 외로움은 커져갔고 병원비로 인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년 동안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유랑과 방랑은 시작됐다.  

김씨는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가 힘들어 그때부터 술을 흥청망청 마셨다. 하루에 소주를 몇 병씩 마셨다. 그 당시엔 술 먹고 돌아다니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이어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진 수백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그동안 부은 적금을 깼다. 그 후 보험도 해약해 남은 돈으로 집에서 술만 먹고 살았다. 결국 월세가 밀리면서 수중에 그 집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다. 300만원 정도를 가지고 집을 나왔고 그때부터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됐다.”

300만원을 들고 유랑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제주도까지 가서 노숙자로 떠돌기도 했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죽을까’하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을 작정으로 밤바다를 찾았다. 하지만 자살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둠에 둘러싸인 밤바다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바닷물에는 발 한번 담가보지도 못하고 결국 돌아와야 했다. 자살에 실패한 김씨는 다시금 살 궁리를 하게 됐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살아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02년경 카드 할부로 1200만원짜리 차를 사면서 다시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결국 또다시 유랑생활을 하게 됐다. 

김씨는 “빚이 생겼는데도 갚아야 한다는 의지와 의무가 안 생겼다. 빚을 안고 또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친구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모든 걸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했다.
야심한 시각 그녀는 또다시 자살을 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찾았다. 투신자살을 기도하기 위해 소주 한 병을 먹고 다리 중앙에 다다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이내 강가로 몸을 던졌고 기억을 잃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김씨는 암흑 속으로 한없이 내려가면서 숨이 조여오는 것을 오랫동안 느끼다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는 “내가 떨어질 당시 살려달라고 소리친 것을 근처에 있던 낚시꾼이 듣고 119에 연락을 했고, 구조대가 배로 달려와서 나를 구조한 것이었다. 어떻게 물 위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적처럼 나는 살아났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맺은 인연

두 번째 자살에 실패한 이후 김씨는 ‘다시는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술을 먹고 떠돌더라도 살아가기로 한 것. 한겨울 지하철역 대합실 바닥에서 자기도 하고 떠도는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노숙자를 만나 좋은 감정을 갖게 됐고 그와 여관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그는 지방에서 직장을 잡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일이 잘 안 풀려서 거리를 떠도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잘해 보려고 했지만 나보다 어리고 총각이라서 나중에는 마음을 접었다”고 말했다.

그 남자와 헤어진 이후 다시 유랑생활을 하던 김씨는 밥을 얻어 먹기 위해 찾아간 영등포 광야교회에서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됐다. 그 교회 목사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성 노숙인들이 생활하는 쪽방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다른 남자 노숙인과 얽히면서 다시 쪽방을 나와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광야교회에서는 서로 마음 맞는 노숙인들을 연결하기 위해 결혼식을 올려주고 작은 쪽방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다. 김씨는 한 남자 노숙인과 마음이 맞아 ‘합동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이를 앞둔 상황에서 파혼을 선언하고 다른 교회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김씨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결혼 날짜가 다가오다 보니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딸을 볼 생각을 해보니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교회에서 웨딩드레스까지 맞춰주었지만 못하겠다고 하고 도망 나왔다”고 말했다.

그 직후 김씨는 옹달샘 노숙인 센터 도움으로 강원도의 한 찜질방에서 일을 하게 됐고 이후 몸이 쇠약해지면서 충청도의 기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1년 정도 무보수로 일을 하던 그녀는 2007년 파산신청을 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왔고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면책을 받게 됐다. 그 후 또다시 광야교회와 인연이 닿아 이곳 쪽방에서 생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씨는 “이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다. 지금 내가 이렇게 쪽방에서 지내는 것도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현재 내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희망 다이어리 쓰는 중

10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방황하던 김씨는 최근 쉼터에서 생활하며 바쁜 하루일과를 보내고 있다.

지난 2007년 11월부터 광야교회의 쪽방에서 지내면서 새롭게 일을 시작한 것. 매일 새벽 6시부터 지하철역에서 무료신문을 배포하고 9시면 구청에서 운영하는 자활센터에서 봉제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일을 한 뒤 저녁 7시부터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느라 쉴 틈이 없다. 하루빨리 ‘여성 노숙인’ 타이틀을 벗고 당당한 엄마로서 딸아이와의 재회를 희망하고 있는 까닭이다. 

김씨는 “결혼 전부터 관광 가이드가 꿈이었다고 한다. 일본어에도 관심이 많고 내가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다. 현재 버는 돈도 꾸준히 저축하면서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녀는 “한때 불행하다는 생각에 자살을 기도했지만 이렇게 교회와 인연이 닿고 또 하나님을 만나면서 희망을 품게 됐다. 외롭고 슬퍼 좌절할 때도, 의지할 사람이 없어 술 먹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이 나를 돌봐준 것이다”며 “3년이면 자활과정이 끝나 이곳 쪽방에서 나가야 하는데 그때를 대비해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 무엇보다 딸아이를 만났을 때 괜찮은 엄마로 보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솔직히 그동안 살아온 게 후회도 된다. 이혼 당시 조금만 참았더라면 딸아이와 함께 살고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상황에서 후회만 할 게 아니라 앞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딸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전했다.

최근 정부에서는 ‘희망 플러스 통장’이란 이름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는 서울시 거주자
중 수입이 최저생계비의 150% 이하(4인 가족 기준 198만원)이며 채무가 없고 최근 10개월 이상 근로소득이 있는 사람에 한해 신청이 가능하다. 이에 김씨는 지난해 ‘희망 플러스 통장’ 참가 신청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그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희망 플러스 통장을 들 수만 있다면 돈을 열심히 모으고 싶다. 그러고 난 후 딸아이에게 조그마한 것이라도 물려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기자는 김씨를 취재한 지 나흘 지난 3월13일 그녀로부터 한 통의 반가운 문자를 받을 수 있었다.

김문수 기자
 
 

하면된다. 바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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