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유랑(流浪)의 역사 – 비애의 여인 로그네다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3/11/25 [17:00]

 

▲ 러시아 화가 안톤 로센코(1737~1773) ‘블라디미르와 로그네다’ 1770년 작품 211.5cmx177.5cm oil painting 러시아미술관 소장

 

예프피미 푸탸틴(1803~1883)이 러시아 외교 사절단을 인솔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은 1853년 8월 10일이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은 한 달 전인 7월 8일 가나가와현 우라가(浦賀)항에 도착 후 7월 17일 일본을 떠났다. 이어 10일 후 7월 27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여러 협의가 오가면서 에도 막부는 9월 9일 러시아의 공식 서한을 받았으며 예프피미 푸탸틴은 이에 대한 회신을 기다리던 중 1853년 10월 4일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크림전쟁은 러시아 제국과 오랜 대립의 역사를 가진 오스만제국이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 사르데냐 왕국이 연합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의 뿌리 깊은 대립과 갈등은 1568년부터 1570년까지 격돌한 제1차 전쟁에서부터 1821년부터 1829년에 끝난 그리스 독립전쟁까지 무려 10번을 격돌한 후 1853년 10월 4일 11번째 크림전쟁이 발발하였다. 크림전쟁은 오랜 역사적 배경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 특히 오늘날 가장 우려스러운 전쟁인 우크라이나 전쟁 원인 중 하나로 근원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의 교훈과 헤아림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몽골왕조 창시자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난 후 몽골제국이 4대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손자 바투(1207~ 1256)가 오늘날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의 조상인 루스족을 장악하고 1243년 유목민의 성지 킵차크 초원지대에 황금으로 장막을 두른 전설적인 킵차크 칸국(金帳汗國)을 세웠다. 

 

바투가 장악한 루스족은 753년 무렵 스칸디나비아반도 바이킹들이 사용하던 언어 고대 노르드어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강인한 노르드인 후예이다. 이들은 슬라브족에게 빠르게 동화하여 오늘날 러시아 레닌그라드주 도시 스타라야라도가 일대에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전설의 바이킹 후예 류리크(830~879)가 이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도시라는 뜻인 노브고로드에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이후 912년 무렵 오늘날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로 옮겨 키예프(키이우) 공국으로 확장하였다. 

 

키예프(키이우) 공국을 통치하던 스뱌토슬라프 1세(?~972) 시대였다. 오랜 역사를 품은 불가리아 칸국이 있었다, 그들의 조상은 2세기부터 코카서스 북쪽 대초원과 볼가강 일대에 정주하던 중앙아시아 출신 투르크계 반유목민들이었다. 부침을 거듭하며 강력한 지도자 쿠브라트(606~665)가 흩어진 세력을 규합하여 632년 무렵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불가리아 칸국을 세웠다. 

 

이후 쿠브라트의 죽음으로 세 아들이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과 볼가강 일대에 681년 무렵 새로운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이어 오랫동안 세력을 키운 후 811년 동로마 제국과 격돌한 전쟁에서 완패시키며 여러 차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이때 정교회를 받아들이면서 동로마 제국의 점령까지도 노리는 세력이었다.   

 

971년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키예프(키이우) 대공국과 협약하여 스뱌토슬라프 대공(921~972)이 불가르 칸을 정복하였다. 이때 스뱌토슬라프 대공은 생각을 바꾸어 우크라이나 중부에 있는 고대 도시 페레야슬라브에 제국의 건설을 선포하였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물리쳤다. 크림반도를 포함한 발칸 지역의 영토를 포기하고 돌아가던 스뱌토슬라프 대공이 투르크계 유목민 페체네그족의 기습으로 살해되었다.

 

스뱌토슬라프 대공은 생전에 이미 장남 야로폴크(?~978)에게 키예프(키이우) 공국을 물려주었으며 차남 올렉은(?~977)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와 폴란드 국경에 접한 드레블리안 지역의 공국을 분할하였다. 3남 블라디미르 1세(958~1015)는 노브고로드 공국을 상속한 상태였다, 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였다.  

 

977년 키예프(키이우) 공국의 야로폴크는 자기 오른팔인 사령관의 아들을 살해한 동생 올렉과 내전을 벌여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어 블라디미르 1세가 있는 노브고로드 공국에 군사를 보냈으나 이미 피신한 후였다. 

 

다음 해 978년 블라디미르 1세는 그동안 규합한 바랑기아 용병들을 앞세워 형 야크폴크를 공격하러 키예프(키이우)로 가는 길에 폴로츠크 도시를 점령하였다. 오늘날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북동쪽 도시 야로폴크가 키예프(키이우) 공국과 노브고로드 공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로 점령의 중요성도 있었지만, 블라디미르 1세에게 너무나 깊은 모욕감을 안겨준 도시였다. 

 

스뱌토슬라프 대공의 장남 야로폴크가 키예프(키이우) 공국을 물려받고 셋째 아들 블라디미르 1세가 노브고로드 공국을 물려받은 직후 두 형제는 폴로츠크를 통치하던 로고볼로드의 미모의 딸 로그네다(960~1000)에게 청혼하였다. 특히 블라디미르 1세 외삼촌 드리고냐는 폴로츠크의 중요함을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중매에 나섰다.   

 

이렇게 청혼을 받은 로그네다는 두 사람을 만나 답한 첫 마디가 로주티 로비치치(розути робичича)였다. 로주티 로비치치란 노예의 신발을 벗겨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첫날 밤 아내가 엎드려 남편의 왼쪽 신발을 벗겨준 후 신발에 이마를 문지르면 남편은 오른쪽 신발을 벗고 자기 겉옷을 아내에게 덮어주는 슬라브족의 관습을 말한 것으로 블라디미르 어머니가 노예 신분의 첩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어 시집을 가야 한다면 야로폴크에게 가겠다고 했다. 이는 당대의 호색한으로 소문난 블라디미르에 대한 거부감과 월등한 세력을 가진 키예프(키이우) 공국의 야로폴크의 청혼을 받은 자신감에서 쏟아진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블라디미르와 외삼촌 드리고냐는 깊은 모욕감에 가슴을 거머쥐었다. 

 

키예프(키이우) 공국의 야로폴크와의 결혼을 준비로 들떠있던 폴로츠크 도시는 블라디미르 1세의 기습으로 폐허가 되었다. 가족이 모두 살해되는 비극적인 강요에 의하여 로그네다는 블라디미르 1세와 결혼하였다.

 

이후 980년 블라디미르는 형 야로폴크의 오른팔이며 군사령관 스베넬드가 사망하면서 새로운 수석 고문을 매수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키예프(키이우)를 급습하면서 도피처로 유인하여 매복 공격으로 살해하였다.

 

모든 공국을 거머쥔 블라디미르 1세 대공(958~1015)의 세력은 막강하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 9대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연이은 반란이 계속되었다. 986년이었다. 오랫동안 칼을 갈아온 불가리아 칸국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왔다. 바실리우스 2세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항하였지만, 연속 참패하면서 포위되어 버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바실리우스 2세 황제는 키예프(키이우) 공국에 긴급하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은 6,000여 명의 바랑기아 용병을 보내 황제를 구출하였다. 이때 황제의 여동생 안나와의 결혼을 요구하였다. 그는 15년 전인 971년 아버지 스뱌토슬라프 1세가 세상을 떠난 아픔까지도 결혼으로 보상받는 역사를 썼다.  

 

당시 바이킹 후예인 바랑기아인 용병의 용맹함에 감탄한 동로마 제국 황제는 이후 바랑기아인 용병 친위대를 만들었다. 이들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에 충성한 이야기도 역사의 한 페이지다.

 

그러나 반란 진압 이후 동로마 황제는 문제가 많은 블라디미르에게 시집보내야 하는 여동생의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화가 난 블라디미르 1세는 988년 크림반도에 있던 동로마 제국 영토 케르소네소스를 침공하였다. 케르소네소스는 크림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주요한 항구였다. 

 

▲ 1853년 크림전쟁 지도 출처: google

 

바실리우스 2세가 여동생의 결혼을 서두르면서 관계를 회복한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은 988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아 989년 동로마 황제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면서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하였다. 

 

대공은 비잔틴 제국 황제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기 위하여 기존 결혼을 모두 무효화 하였다. 이때 로그네다가 아들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남편을 칼로 찌르는 암살을 시도하였지만 어설픈 행동으로 실패하였다. 

 

당시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로그네다를 죽이려 할 때 어린 아들 이지아슬라프가 작은 칼을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머니를 지키려 하였다. 당시 아들 이지아 슬라프(977~1001)는 10살이었으며 둘째 야로슬라프 1세(978~1054)는 9살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은 어린 아들 이지아슬라프의 행동에 마음을 바꾸었다. 이어 부인 로그네다의 고향 폴로츠크 공국을 아들들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이지아슬라프를 공작에 봉하여 987년부터 폴로츠크 공국이 자치령이 되었다.   

 

이렇게 고향에 돌아온 로그네다의 당시 이름은 슬픔과 비애라는 뜻을 품은 고리슬라바(Горислава)였다. 이는 슬픔(Горя)이라는 러시아어와 맞닿은 이름으로 블라디미르 1세가 자신을 모욕한 분노에 로그네다 가족을 살해하고 강압으로 결혼하면서 붙여준 이름이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물론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장르의 소재가 되었던 로그네다에 대한 작품 중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광장에 있는 국립 러시아 미술관에 소장된 러시아 화가 안톤 로센코(1737~1773)가 그린 ‘블라디미르와 로그네다’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