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흉노족’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였다!

[역사의 재발견] 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

박병식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12/11 [20:42]
▲"고구려인 기상 오롯이"   활달하고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는 무용총 수렵도. 큰 나무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소가 끄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고, 왼쪽에는 사냥 장면이 전개된다.

고구려가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 표면에 나타난 시기는 미천왕(美川王)이 즉위한 지 3년 만인 서기 302년 9월이었다. 왕은 몸소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현토군(玄?郡)에 침입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수도(首都)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한참동안 군사를 움직이지 않더니 서기 311년 8월 장수를 보내어 요동군(遼東郡) 서안평현(西安平縣)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가 오랫동안 숙원으로 삼던 중국 서남쪽으로의 진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중국 내륙으로의 돌파구를 얻은 고구려는 서기 313년 10월 낙랑군(樂浪郡=지금의 북경지방)을 습격하여 남녀 2000명 남짓을 사로잡아 왔다.

그리고 다음 해인 서기 314년 9월에는 대방군(帶方郡, 지금의 遼西 서쪽으로부터 山東半島에 이르는 지역)에 쳐들어갔으며 다음 해에는 현토성(玄?城)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왔다.
 
고구려 작전실패로 요동 빼앗겨

이렇듯 숨쉴 틈을 주지 않는 고구려의 공세와 실력을 지켜보던 동진(東晉)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서기 319년 12월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鮮卑大王)를 자칭하는 모용외(慕容?)의 세력이 막강하니 그를 격파할 수만 있다면 중국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의 소망은 쉽게 풀릴 것이라고 제언한 것으로 짐작된다.

최비는 그 방책으로 제안하기를 ‘선비족 가운데는 모용씨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 중에서 모용씨 북쪽에 있는 우문씨(宇文氏)와 서쪽에 있는 단씨(段氏)를 설득하여 이들과 손 잡고 협공한다면 제 아무리 강한 모용씨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삼각동맹(三角同盟)에 성공한 연합군은 모용씨의 거성(據城)인 극성(棘城)을 에워쌌다. 이렇게 되자 모용외(慕容?)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한편 이들의 동맹을 깨뜨리는 계책을 궁리했다.

▲"춤을 추는 고구려인들"   무용총은 중국 땅인 길림성 집안현 여산 남쪽 언덕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 고분이다. 이 무덤에 그려진 ‘무용총 무용도’ 벽화에는 남녀가 대열을 짓고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 때문에 무용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무용도’는 열네 명의 무용수와 악사가 상하로 그려져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 고구려에 가담해 있는 저들은 우리와 같은 선비족이다. 특히 우문씨(宇文氏)는 우리 북쪽에서 살아온 큰 부족이므로 고구려와는 별다른 인연을 가진 내력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그들에게 적의를 품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면 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렇게 생각한 모용외는 우문씨 진영에 술과 고기를 보내어 노고를 위로했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본 고구려와 단씨(段氏) 양 군(兩軍)은 모용씨와 우문씨 사이에 필시 은밀한 약속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포위망을 풀고 철군해 버렸다. 뜻하지 않았던 의심을 받게 된 우문씨 측은 격분했다.

‘고구려와 단씨 군대가 철수했다고 우리마저 이대로 퇴군할 수는 없다. 우리 혼자 힘으로 모용외를 쳐부수지 못할손가!’

이리하여 우문씨 측은 모용외와의 결전을 작정했다.

우문씨 측의 이러한 태도를 알게 된 모용외는 자신의 아들 황(?)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스스로는 대군(大軍)으로 그 뒤를 따라 진격하니 우문씨 측은 대패(大敗)하여 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비는 마지막 계책으로 자기 형의 아들 도(燾)를 모용씨의 극성(棘城)에 보내 거짓으로 전승(戰勝)을 축하하게 했다. 내심 그러한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모용외가 군사들을 시립(侍立)시키고 위압하니 겁이 더럭 난 도(燾)가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다.

이러한 작전 실패로 고구려는 그때까지 애써 탈취한 요동(遼東)을 모용외에게 송두리 빼앗기고 말았다. 통분(痛憤)을 참지 못하는 미천왕은 그 후 요동(遼東)을 되찾으려고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서기 331년 2월 이 세상을 하직했다.

고구려의 세력이 약해진 이 시기는 옛 부여족(夫餘族)으로부터 갈라진 선비족(鮮卑族)?가라환족(烏桓族=契丹族)?숙신족(肅愼族)?오로족(?婁族)들이 제각기 세력을 늘리려고 서로 싸움을 자주 벌이던 때다. 그 가운데서도 착실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는 부족은 가라환족(烏桓族=契丹族)인데 그들에 관해서는 앞으로 ‘요(遼)’를 다루는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흉노족(匈奴族)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
 

匈奴族은 우리 조상인 桓族의 한 분파…‘桓’이 모음교체로 ‘匈’으로 변화
북흉노족이 쓰는 언어는 우리와 같은 튤크어에 속하며 모음조화가 특징
구라파가 공포대상으로 여기는 ‘훈족’도 우리 민족…‘환→한→훈’ 모음교체



흉노족은 韓민족의 한 분파

고대 대부여(大夫餘)가 많은 부족으로 갈라지고 중국 북부가 어지럽게 되기 시작한 서기전 3세기 말부터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흉노족(匈奴族)은 우리 환족(桓族)의 한 분파다. 이들의 부족이름인 ‘흉(匈)’은 ‘환(桓)’으로부터 모음교체한 소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과 가라환족(烏桓族=契丹族)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전한(前漢)을 빼앗아 신(新)나라(서기 9년~24년까지 존속)를 세운 왕망(王莽)은 흉노족과 가라환족의 교통을 방해했기 때문에 흉노족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던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선비족인 모용외가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鮮卑大王)를 자칭했는데, 선우(單于)라는 말이 흉노족의 황제(皇帝)를 가리키는 말인 것을 보아도 이들은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임을 알 수 있다.

이 흉노족은 서기 48년에 내분을 일으켜 그 일파는 후한(後漢)에 항복하여 남흉노(南匈奴)라고 불리게 되었고 다른 일파는 북흉노(北匈奴)라고 일컫게 되었다.

북흉노로 불린 부족은 그 후 선비족과 후한(後漢)에 쫓겨서 2세기의 중반에는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아왔던 몽고(蒙古)의 ‘올혼강(orkhon)’ 유역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킬기스(kirgiz) 지방으로 이동했다. 옛 소련연방국의 하나인 ‘키리지아공화국(共和國)’을 비롯하여 현재 약 190만명 이상의(1979년 통계) 이들 북흉노족이 그곳에 살고 있다. 이들이 쓰고 있는 언어도 우리와 같은 튤크어족(語族)에 속하며 우리말과 같이 모음조화(母音調和)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조상이 북아시아에서 온 민족이라는 것은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4세기의 구라파는 이들 북흉노족의 침입을 받아 공포에 떨었고 그 기억은 오늘날의 영화에서 역력히 재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라파 사람들은 이들을 지금도 ‘훈족’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모음교체된 ‘환→한→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5세기 이후의 구라파 사람들은 화북(華北), 즉 중국대륙의 황하 하류 이북을 ‘키타이(kitai)’라고 부르는데 ‘키타이’는 흉노족이 살고 있던 거란(契丹)의 중앙 및 북아시아 민족의 호칭임도 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어디 그뿐인가! 거란 그 자체도 ‘키타이’라고 불리었고 그들이 중국 내륙에 세운 요(遼)나라가 망하자 중앙아시아에 가서 다시 ‘서요(=西遼)’를 세웠는데 저들은 자신들이 세운 ‘서요=西遼’를 ‘가라 키타이’라고 불렀다.

‘가라’라는 말은 우리 민족만이 써오던 고어(古語)로서 서쪽을 뜻하는 말이다. 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제 나라 이름을 다른 민족의 말로 부르는 민족이 없을 터인즉, 거란족 또는 흉노족이라고 불리었던 민족이 모두 다 우리 민족이었음을 이로써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서양 사람들이 황하 하류 이북의 중국 땅을 ‘키타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로서 치우천왕(治尤天王) 이후 그 지역이 우리 민족의 영역이었다는 사실도 재확인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이들을 서양 사람들이 ‘키타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문자 ‘契丹=계단’에서 유래된 것임은 짐작하고 남는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스스로를 ‘계단’이라고 표기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독자는 필자의 글을 읽어오는 과정에서 옛날에 한문자로 표기된 명칭들은 이두(吏讀)로 씌어진 것이며, 많은 경우 우리의 말뜻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게 됐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부여(夫餘)는 ‘하라→바라→부러→부여=태양자손의 나라·광명의 땅’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한문자다.

‘계단’의 계(契)는 ‘하라→가라→걸=오(烏)·현(玄)’을 나타내는 것이며 ‘단(丹)’은 ‘하라→환→한=밝음·광명·적(赤)’을 나타내기 위해 씌어진 것임을 다른 어원의 예에 비추어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의 굴욕

자, 이제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를 요동(遼東)에서 몰아낸 모용씨(慕容氏)는 황이 스스로 연왕(燕王)이라고 일컫게 되었으나 고구려를 경계하는 마음은 늦추지 않았으니 힘이 부족한 고구려는 눈물을 머금고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세자를 연왕(燕王)에게 보내어 조공(朝貢)의 예(禮)를 다하며 굴욕을 참고 견뎠다.

이러면서도 고구려는 서기 342년 2월 환도성(丸都城)을 개수(改修)함과 동시에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通溝 山城子)을 쌓고 8월에는 왕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환도성은 평지에 자리하는 국내성과 달라서 산 위에 만드는 것이며 왕이 그곳으로 잠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전쟁을 예기(豫期)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자를 연왕에게 보내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고국원왕은 그 치욕을 씻기를 마음속에 단단히 다짐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연왕도 국도(國都)를 금주(錦州)의 극성(棘城, 지금의 渤海灣 서쪽 연안)으로부터 더 서북쪽에 있는 용성(龍城, 지금의 朝陽)으로 옮겼다. 즉 고구려로부터 좀더 멀리 떨어진 안전지대로 왕의 거처를 옮긴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 보면 한걸음 물러선 연왕 쪽이 고구려의 기세에 밀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곧 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고구려는 크게 패하여 왕은 환도성을 홀로 빠져나가고 왕모(王母)와 왕비(王妃)는 사로잡히는 몸이 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광활한 대륙 누비던 고구려…고국원왕·소수림왕 거치며 위신 땅에 떨어져
고국양왕 집권하면서 고구려 군대가 요동·현토 함락시켜 다시금 용맹 떨쳐


그뿐인가. 연왕은 군사를 시켜 미천왕(美川王)의 묘를 파서 그 시체를 가지고 희군(回軍)하면서 환도성에 불을 지르고 대대로 내려온 국보(國寶)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결국 고구려 왕은 왕제(王弟)에게 많은 보물(寶物)을 가지고 가서 연왕(燕王)에게 바치도록 하고 스스로는 연왕의 신하가 되기를 약속함으로써 겨우 화해를 성립시켰다. 그러고 나서 왕은 압록강을 넘어 지금의 강계(江界) 지방에 있는 평양성(平壤城)에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은 별다른 지략도 무용도 없으면서 오기만 앞세운 탓으로 더할 수 없는 굴욕을 초래한 고국원왕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한편 연왕은 그 후에도 왕모(王母)를 볼모로 잡아둔 채 돌려주지 않으면서 계속하여 고구려 땅을 잠식하더니 그 전쟁이 끝나고 13년이 지난 서기 355년 12월이 되어서야 왕모를 돌려보내 주었다.
 

대륙진출 단념하고 백제 침공

이리하여 대륙 진출을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된 고구려는 한반도 안으로 울분을 풀 길을 찾더니 서기 368년 9월 왕이 직접 군사 2만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아마도 고국원왕은 지난날 잃은 왕으로서의 위신을 되찾고 싶었겠지만 고국원왕은 이 싸움에서도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한반도 안에서 다시 면목을 잃게 된 고구려는 다음 해에(서기 370년) 뜻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여 묵은 체증을 오랜만에 풀 수 있었다. 그 뜻하지 않은 기회는 전진(前秦)의 왕맹(王猛)이 안겨주었다. 즉 왕맹이 연(燕)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연의 태부(太傅=高官職名) 모용평(慕龍評)이 고구려로 도망 오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모용씨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서러움을 받아온 고구려는 지체 없이 모용평의 목을 베어 진(秦)나라에 보냈다.

이것으로 기세(氣勢)를 되살린 고구려는 서기 371년 백제를 침공했다가 또다시 패퇴(敗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제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고구려의 침범(侵犯)에 자극 받은 백제는 서기 371년 10월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직접 3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포위하니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몸소 이에 맞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아들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년-384년) 시대도 그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기만 했다. 세 차례 시도한 백제침공에서 번번이 패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백제에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당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이렇게 무력해지자 북부여가 있던 지역에서 힘을 기르던 거란(契丹)마저 서기 378년 북변(北邊)을 침범한다. 이때 여덟 부락을 탈취했으니 남북(南北)으로부터 협공 당하는 고구려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꼴이었다.

그러던 고구려가 되살아난 것은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죽고 그 아우 이련(伊連)이 등극한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년-391년) 때부터다.

고국양왕은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385년 6월 4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군(遼東郡)을 습격했다. 이에 앞서 후연왕 모용수(後燕王 慕容垂)는 대방왕 모용좌(帶方王 慕容佐)로 하여금 지금의 조양(朝陽)에 있던 용성(龍城)을 지키게 했었다. 그러므로 모용좌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왔다는 연락을 받자 군사를 보내서 이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고구려 군대는 이를 격파하고 요동(遼東)과 현토(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오는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니 참으로 오랜만에 고구려의 용맹이 대륙 하늘에 떨쳐 오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중에 넣었던 요동과 현토는 석 달 만에 연(燕)에 도로 빼앗겼다. 하지만 이 싸움으로 고구려의 재기를 알고 유주(幽州, 지금의 北京을 중심으로 한 지역)와 기주(冀州,  지금의 직예지역=直隸地域으로서 山西省 동쪽이며 山東省 북쪽 지역) 주민들이 몹시 동요하여 고구려 쪽으로 이동하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당황한 연(燕)은 요동태수(遼東太守)로 하여금 유민(流民)을 달래고 진정시키느라 무척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 백제는 여전히 고구려의 남쪽을 자주 침범하니 백제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의 큰 두통거리로 떠올랐다. 고구려는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동맹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이병도씨의 <국역 삼국사기(國譯 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이 제안을 한 것이 고국양왕 9년 때의 일로 적어 놓았다. 하지만 고국양왕은 재위 8년에 사망했으므로 오류가 있는 듯하다. 같은 책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이것이 나물왕(奈勿王) 37년 서기 392년, 즉 고구려 광개토왕 2년 정월에 있었던 일로 적혀 있으므로 이것이 맞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의를 받은 신라 나물왕(재위 356년-402년)은 강대한 고구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이찬 대서지(伊浪 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내어 서약을 다짐했다.

이 실성이 훗날 신라 제18대 임금이 된 실성왕(實聖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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