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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시인. 한글문화원장)
부산 사람. 동아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수학, 월간 “시문학” 서정주 선생 추천으로 등단. 서라벌고교 교사. 월간 디자인 주간. 공병우한글기계화연구소 부소장.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 대표이사. <공병우 박사 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 서울 예술신학교 문창과 교수.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역임. 현재 한글문화원 원장
<지은책:한글기계화개론, 한글자형학, 한글을 기계로 옳게 쓰기, 공병우 위인전(초. 중. 대학생용 근간)
--차례
1.머리말
2.공 병우 박사와 만남
3.공병우식 10대 원칙
1)제 1원칙--빨리빨리주의--시간은 생명이다
2)제 2원칙--정직
3)제 3원칙--알기 쉽게
4)제 4원칙--정의와 용기
5)제 5원칙--고집과 고독
6)제 6원칙--내식대로
7)제 7원칙--한글사랑과 자판통일
8)제 8원칙--발명--한국의 에디슨
9)제 9원칙--겸손--지면서 이겨라
10)제10원칙-박애정신-맹인타자기
4.공병우 박사의 한글기계화분야의 큰 업적
1)실용적 한글타자기를 발명하여 정보사회의 기틀 마련
2)각종 한글기계 글자판 통일을 이룩
3)두 나라 글자를 칠 수 있는 공병우 한영타자기를 개발.
4)과학적인 한글 글자꼴의 기본을 정립
5.남은 일
1)공병우 박사 기념사업회 발족
2)공병우 박사 박물관 건립
3)공병우 박사 추모 문집 전집 간행
4)공병우 한글기계화상 제정
5)세벌식으로 글자판 통일
6)한글문화원 법인화 추진
7)공병우 사이버공과대학 설립
8)공병우 정신을 기리는 각종 사업
1.머리말
공병우 박사는 코끼리이다. 공병우 코끼리는 조선 개화기부터 근 1세기를 이땅에 살다 간 엄청 큰 코끼리이다. 공병우 코끼리를 가까이서 본 사람도 많고 멀리서 본 사람은 더 많다. 그러나 공병우 코끼리를 제대로 본 사람도 흔치 않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 공 병우 박사는 안과 의사요, 한글기계화의 아버지요, 맹인의 아버지요, 사진 작가요, 컴퓨터 연구가요, 생활 혁명가요, 민주투사요, 애국자요, 한글운동가요, 발명가이다. 그래서 공 박사의 어느 한 면만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도 쉽지 않고, 온전하게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의 캔버스에 그리기는 적당하지 않는 너무 큰 코끼리이다.
성경과 불경의 근본적 차이 중에 하나가 경전 집필 방식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방식인데 반해 불경은 제자들이 “이렇게 나는 들었다” 방식이다. 이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기술 방식 바탕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건드리지 말고, 선생님(예수님) 말씀에 토 달지 말고,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받아들여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에 반해 불경에서 제자들이 나는 이렇게 들었다 기술 방식의 바탕에는 제자들의 한없는 겸손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하면 선생님(붓다)께서 하는 말을 내가 듣긴 했는데,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 글은 송현이라는 맹인이 근 삼십여년 동안 공병우 코끼리의 주로 한글기계화쪽을 만지고 더듬어 본 것을 글로 쓴 것이다.
2..공 병우 박사와 만남
내가 서라벌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을 할 때 공병우 속도 타자기를 6개월 월부로 샀다. 타자 연습을 매일 하려고 그 동안 안 쓰던 일기까지 꼬박꼬박 썼다. 글쇠에 홈이 패일 정도로 부지런히 타자 연습을 했다. 마침내 “전화와 한글타자기”란 타자기에 관한 글도 발표했다.
1976년 어느 날 광화문에 있는 유니온타자기판매상사 한 민교 사장으로부터 공 병우 박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뜻밖의 전갈을 받았다. 며칠 후 물어물어 종로구 서린동 111번지 공안과 안에 있는 '공 병우 한글기계화연구소'로 갔다. 말이 연구소지 아무 치장도 없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 작은 방이었다. 그 썰렁한 방에는 연구원 한명이 타자기 활자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공 박사였다. 나는 긴장하여 공 박사에게 인사를 드렸다. 공 박사는 반갑게 악수를 청한 뒤에 입가에 어린이 같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반갑수다. 송 선생께서 밥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학교를 그만두고 잘못된 한글 기계화 정책을 바로 잡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한적이 있어요?"
나는 앞이 캄캄하였다. 이 말을 내가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것이 잘못인지, 잘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뜻 시인도 부정도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가 그 말을 한적이 분명히 있는데,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겁에 질려 이렇게 대답했다.
"네, 박사님. 제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니오. 송 선생이 그런 말을 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 연구소에 와서 저와 같이 한글 기계화 연구를 한번 해보시지 않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하지 않아도 좋아요. 송 선생으로서도 중요한 문제이니 신중히 생각한 뒤에 답변해 주시오."
나는 너무나 뜻밖의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저는 손재주가 얼마나 없느냐 하면, 전기가 나갈 경우 두꺼비집도 손볼 줄 모르고, 형광등 전구도 제대로 끼울 줄 모를 정도입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한글 기계화를 연구할 수 있겠습니까?"
"송 선생,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그 동안 내가 송 선생이 쓴 글도 읽어 보았고, 또 송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는데, 송 선생 정도면 열심히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여튼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니 깊게 생각해 보고 답변해 주시오."
집에 들어와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학교에 사표를 내고 공 박사 연구소로 가는 게 어떻냐고 했더니, 아내는 그게 말이라고 하느냐면서 첫말에 반대하였다. 학교에 가서 친한 선생들에게 같은 의논을 하였더니, 역시 첫말에 반대하였다. 부산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 반대하였다. 다들 "공 박사의 연세가 일흔인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만약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데, 왜 그런 모험을 하느냐'고 반대하였다.
나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멀쩡한 직장인 서라벌고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공 병우 한글 기계화 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취임하였다. 1976년 6월의 일이다. 2년 동안 내가 일하는 것을 지켜본 공병우 박사는 나에게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를 다 맡겼다. 서른 한 살의 젊은 날에 나는 공병우 타자기 주식회사 대표이사에 취임하였다. 그로부터 공박사가 돌아가실 때까지 공박사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돌아간 뒤에는 한글문화원을 재건하여 공병우 기념관을 만들려고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3..공병우식의 10대 원칙
1).제 1원칙--빨리빨리주의-시간은 생명이다.
공병우식 제 1원칙은 빨리빨리다. 1906년 음력 12월 30일.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에 산모는 임신 8개월의 몸을 쉬지도 못하고 소에게 여물을 주기 위해 여물통을 들고 외양간에 갔다. 외양간 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통을 놓고,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시어머니는 방안에 있었지만, 귀가 어두워 며느리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며느리는 혼자서 애를 낳았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시아버지가 이를 보고, 금세 난 핏덩이와 산모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산모는 방에 가자마자 애 하나를 더 낳았다. 엄동설한에 외양간에서 난 애는 살고, 방안에서 난 애는 나중에 죽고 만다. 외양간에서 난 팔삭동이가 자라 나중에 공박사가 된다. 남보다 두달이나 빨리 세상에 나왔다. 이 탓인지 공박사는 일생동안 <빨리빨리>를 생활의 신조 제 1조로 삼고 눈코 뜰새없이 숨가쁘게 살았다.
공 병우 타자기도 이 빨리빨리주의 산물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쁜 글씨 타령을 할 때인데도 공박사는 글자는 알아볼 수 있기만 하면 된다면서 속도를 선택하였다. 공박사의 삶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전설같은 일화들이 수없이 많다.
공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방의 문지방을 톱으로 썰어낸 것도 청소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고, 사과 괘짝을 두 개 놓고 침대를 만든 것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고, 5분 이상 시간을 쓰는 이발소에 가지 않은, 낮에 하는 결혼식에 가지 않는 것도, 멀쩡한 양말의 위쪽 고무줄을 가위로 잘라서 신는 것도, 미리 약속하지 않고 오는 손님을 되돌려 보내는 것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도, 한때 화장실에도 소형 냉장고를 설치한 것도, 그 유명한 공안과 개업 몇주년 기념식 한번 하지 않는 것도 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었다. 기행에 가까운 이런 일화의 바탕에는 공병우 박사의 시간은 생명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공병우 박사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요, 철저한 합리주의자였다.
내가 공병우 한글기계화연구소에 부소장으로 일할 때였다. 어느날 공 박사에게 무슨 영수증을 타자로 찍어서 올렸다. 새로운 타자수가 타이핑을 한 것이었다. 틀린 글자나 빠진 글자가 있나 없나 꼼꼼하게 보고 아무 이상이 없음을 내가 두 번 세 번 확인하였기에 나는 마음 턱 놓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인터폰으로 나를 호출했다. 공 박사는 내가 올린 영수증을 집에 들면서 말했다.
"누가 타이핑했어요?"
"새로온 타자수가 했습니다."
나는 중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을 오래 했기 때문에 교정을 보는 데는 제법 자신이 있었던 터라 공 박사의 질문이 너무 뜻밖이었다. 그렇지만, 공 박사의 질문이 심상치가 않아서 염려가 되어 내가 물었다.
"혹시,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박사님?"
"아주 큰 잘못이 있어요!"
겁이 많은 나는 간이 철렁하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타자수 딴에는 보기 좋게 하느라고 '영수증'이라고 찍지않 고, '영 수 증"이라고 글자와 글자 사이를 보기좋게 띄워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공박사는 '영'자와 '수'자와 '증'자 사이를 넓히기 위해서 사이 띄우개를 사용한 횟수를 세어서 시간 낭비했다며 따지는 것이었다.
"송선생이 왜 타자수 교육을 이렇게 시켰어요! 쓸데 없이 사이 띄우개를 사용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는지 따져보시오! 앞으로 타자수 교육을 좀 똑바로 시키도록 하시오!"
“예 잘 알겠습니다.”
“송선생! 시간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시간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시간은 돈보다 더 귀한 생명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공병우박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발상 아래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발전해 왔다. 시간을 금처럼 소중히 생각하고, 아껴 쓰고, 벌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사회다. 서구 사람들은 대체로 시간을 잘 쓸 줄 아는 지혜를 익히는 데 익숙해 있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미국 전체가 눈이 돌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른바 선진 사회라는 나라를 가보면 모두가 바쁜 사람뿐인 것 같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은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바쁜 기계 문명의 메카니즘 속에서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 역할을 하느라고 한눈 팔 새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곧 재산이나 돈을 낭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간은 곧 생명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도 1953년 미국에 처음 가서 문명 생활이란 것을 체험한 뒤 떠오른 생각이다. 시간을 소중히 아껴 쓸 수 있도록 연구 개발하는 길이 곧 과학 문명의 길이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은 시시각각으로 단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끼고 “시간은 곧 생명이다”라는 글(1965. 4. 1. 한국일보)을 쓴 적이 있다.....
본시 높은 수준의 문명 국가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강하지만, 문화 수준이 낮은 사
람들은 시간 관념이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은 법이다. 문명인은 돈보다도 시간을 더 소중하게 알지만, 미개한 사람은 시간보다도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시간을 생명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한글의 과학화를 꾀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생명처럼 여기는 시간을 온 국민이 모두 함께 효율적으로 절약하며 살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모든 문명의 이기는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도구이다. 우리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길뿐이다. 그것도 고성능으로 높은 능률을 올릴 수 있는 기계를 이용한다면, 그만큼 생명을 더욱 길게 연장시키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반평생동안 고성능 한글 기계의 개발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은 바로 고성능 기계로 생명처럼 소중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2).제 2원칙--정직하게-내가 한글타자기 발명가가 아니다
공병우식 제 2원칙은 정직이다. 공 병우 소년이 의주 농업학교 2학년 2학기 때 작문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와따나베 작문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번 시간에는 ”나의 희망과 농업학교“란 주제로 작문을 써 보아라”
공 병우 소년은 공책 여섯장 분량의 긴 글을 지었는데, 교장 선생과 학교 행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작문을 다 쓰고는 과연 제출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한참 고심하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제출을 하고 말았다. 막상 제출을 하고 나니 간이 조마조마했다. 일주일 뒤 작문시간에 와따나베 선생은 작문 공책들을 학생들에게 다 나눠주었는데, 공 병우 소년 것만 되돌려 주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똑똑히 들어요, 여러 학생들의 글은 천고마비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의 죽은 글들이거나 남의 흉내를 낸 글들이었는데, 공 병우 군의 글은 살아 있는 진짜 글이었어요. 내가 한번 읽어 보겠어요, 나중에 공 군의 글은 '압강일보'에 실을 테니, 그때 다시 한번 잘 읽어 보도록 해요."
나중에 안 일인데, 와따나베 선생은 이 글을 반마다 다니면서 읽어주고, 마침내는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다 모인 자리에서도 읽었다. 그때 교장도 있었는데 끝까지 읽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공 병우 소년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앞이 캄캄하였다. 곧바로 기숙사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퇴학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사흘 뒤에 사환이 와서 저녁 먹고난 뒤 교장 사택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고 교장 선생에게 갔다. 일본인 교장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공 병우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1년을 더 다녀야 졸업을 하지만, 이미 너는 졸업생과 다름없는 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너는 더 이상 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 네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란 것을 너희 보통학교 교장 추천서를 보고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마침 경성 사립 치과 전문학교가 있는데, 내가 추천서를 써 줄테니 그리가서 공부하는 것이 어때? 마침 그 학교 교장이 나와 아주 친한 친구야."
교장 선생을 비판한 작문 한편이 도리어 교장 선생에게 옳게 평가를 받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정직한 작문때문에 공 병우 소년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공병우 박사가 당신의 자서전 머리말에 자서전을 쓰는 네가지 이유를 밝혀놓았다. 이 중에 하나가 당신이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공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나이 80이 넘은 지금 내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기로 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뜻이 숨어 있다.(중략) 둘째는, 나에 관한 기사가 책 또는 잡지나 신문에 가끔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사실과 다른 점이 더러 눈에 띄었기에 이를 바로 잡고 싶은 것이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잘못 기록된 자료를 바로 잡지 않고 두면, 엉뚱하게 그것이 진실로 둔갑할 우려가 있어, 내 스스로가 진실을 밝혀서 바르게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보기를 들면 “한글 타자기의 시조 공 박사는.... " 라고 운운한 글을 더러 보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잘못된 표현이다. 이미 나보다 먼저 한글 타자기를 만든 분들이 있었다. 가령, 내가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발명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고성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부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과학적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싶은 것이요”
김흥기 박사는 “웨슬리신학의 조명에서 본 미주 한인 이민과 선교 백년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 제3부에서 한글타자기 발명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사람은 로나녹크대학에서 상업을 전공한 이원익(wonic leigh)으로 전해지는데, 그는 1913년 84개 키로 이루어진 최초의 타자기를 발명했다. 그 후에 송기주(keith c. song)는 공병우 타자기의 원조인 송기주 타자기를 발명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25세 때인 1925년 도미하여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b. s.)를 받고 1926년 시카고의 랜드 맥넬리 회사에서 지도 제도원으로 일하면서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다가 뉴욕으로 갔다. 그래서 그는 시카고에 머무는 동안에는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의 교인이었고,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뉴욕한인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시카고에 있을 때 한국 지도를 최초로 서구식 입체 본으로 제작하였으며, 한글타자기를 고안하여 7년 간 연구 끝에 1933년 뉴욕의 타자기 제조회사 언더우드(underwood-elliott-fisher)와 제작에 합의하였다. 종전에 타자기가 있었으나 자판이 복잡하고 타자 열이 고르지 않아 실용성이 없었는데 언더우드-송기주 타자기는 42개 키로 현대체 한글을 고르게 찍을 수 있는 타자기로 각광을 받았다.
뉴욕한인감리교회에서 한글 타자기 개발은 송기주 이후에도 계속되어 1946년 해방직후 담임목사인 김준성 목사가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쳐지는 한글타자기를 제작했으나 상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타자기를 개발했을 때 한국에도 그것에 못지 않은 한글타자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뉴욕한인교회70년사는 한글타자기의 선구자로 알려진 공병우 박사가 1940년대 뉴욕한인감리교회를 출석한 바 있고 김준성 목사와 교분이 있는 사이였다는 점을 근거로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가 김준성 목사가 개발한 모델과 연관성이 있지는 않은가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송기주가 귀국 후 공병우 박사가 발명권 양도를 교섭했는데 이를 거절했다. 그 후 6.25때 송기주가 납북된 후 그 방식의 타자기가 공병우 박사에 의해 시장화됐다.“
위의 공박사의 고백과 김 박사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 최초의 한글타자기 발명가는 공병우 박사가 아니라 재미 교포 이 원익 선생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정확하고 정직하게 말하면 공병우박사는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다.
공병우 박사는 해방 직후, 꿈에도 그리던 내 나라를 찾게 되었으니, 세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 나라 살림을 잘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정직하게 납세를 했다. 그 무렵은 대부분 납세 신고를 속여서 하는 바람에 공병우 박사가 엉뚱하게 재벌급을 제쳐놓고 서울에서 가장 많이 세금을 낸 사람 중에 포함되었다.
내가 공병우 한글기계화 연구소에서 일하던 어느날 무슨 말 끝에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 어떤 여자를 멋있다고 생각합니까?"
"째클!"
마치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 박사의 대답은 빨랐고, 또 간단했다.
'째클'이라니, 나는 '째클'이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도대체 '째클'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재클린 케네디가 아니고, 재클린 오나시스일 때였다. 나는 너무 뜻밖이라 왜 그 여자를 멋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을 했더니 공 박사의 대답은 이랬다.
"생각해 보시오. 그녀가 만약 한국 여자였더라면, 그 아까운 젊음을 썩히면서 수절하였을 것 아니겠소? 만약 재혼이라도 한다면 남편 이름에 먹칠을 한다고 또 욕을 얼마나 먹겠소. 나는 째클의 정직함과 용기가 참 멋있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째클이 가장 멋진 여자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공 박사 나이가 그때 일흔인데, 일흔 노인의 의식이 이처럼 대담하고 진보적인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는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네 살 짜리 딸애가 딸린 이혼녀와 결혼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를 공박사에 터놓고 말씀드렸더니, 서로 사랑하면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쪽으로 조언을 해주시면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래서 용기를 얻고 그녀와 결혼하였다. 공박사는 내 결혼 선물로 신일 선풍기 한 대를 사 주셨다.(공병우 박물관 소장 예정)
3)제 3원칙--글은 쉽게 쓰자
공병우식 제 3원칙은 “글은 알기 쉽게 쓰자”이다. 공병우 박사는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그래서 글을 쓸때는 항상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고 했다. 공박사는 글을 쓰면 반드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잘못이나 보탤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지적해 달라”고 했다. 공병우 박사 연구실에서 일한 타자수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박사의 글을 보고 오자나 빠진 글자 혹은 잘못된 부분을 고쳐준 경험이 많다. 타자수 뿐 아니라 손님에게도 당신이 초안한 글을 보여주면서 잘못이나 빠진 것이나 보탤것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고 하였다.
내가 공병우 한글 기계화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일한 지 서너 달 뒤였다. 연구소에 있는 여러 자료를 꼼꼼히 읽어면서 한글기계화에 대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어느 날 공 박사의 권유로 난생 처음 한글기계화에 관한 글을 한편 써 공박사에게 보여드렸다. 내 글의 앞부분을 몇줄 읽어보시던 공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글이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이 글은 송선생 같이 유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나는 그 순간 기분이 무척 언짢았다. 나는 문단에 시인으로 이미 등단을 한 뒤였고, 또 그 동안 십여년 가까이 국어 선생 노릇을 한 처지였고, 잡지나 신문 등지에 더러 글도 발표하는 문사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내가 쓴글을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공박사가 말했다. "좀 쉽게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떫뜨럼한 기분으로 몇 군데의 단어와 수식어를 쉽게 고쳐서 공박사에게 보여 드렸다. 그러자 공박사는 몇줄을 읽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 글은 송선생갈이 유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보통사람들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 좋겠어요."
나는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꾹 참고 원고를 돌려받아서 쉽게 고친다고 다시 고쳐서 공박사에게 보여드렸다. 그래도 공박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무슨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내가 한 번 내 마음대로 쉽게 고쳐 드릴까요?"
"네. 박사님.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틀날, 내가 연구소에 출근을 하자마자 공박사는 벌겋게 고친 원고를 내 앞에 내 밀었다. 붉은 볼펜으로 고친 부분이 더 많았다. 공박사가 고친 원고는 과연 쉽고 표현이 정확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박사가 물었다.
"송선생! 어떻습니까? 내가 마음대로 고친 부분과 송선생이 처음 쓴 것과 어느 쪽이 더 알기 쉽습니까?"
"박사님께서 고친 쪽이 훨씬 알기 쉽고 또렸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공부가 되었읍니다. 앞으로 글을 쓸때 큰 참고를 하겠습니다."
나는 그뒤 여러 해 동안 공박사에게 그런 애정어린 지도를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는 공박사는 나에게 한글기계화의 스승만이 아니라, 문장론 스승이기도 하다. 내가 쓴글이 쉽다고 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공박사에게 글쓰기 기초를 옳게, 제대로 배운 탓이다.
공병우 박사는 글은 누구나 알기 쉽게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바탕에는 단순함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싶다. 공박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복잡한 것을 무조건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복잡한 것을 대했을 때, 나는 피하지 않고 이것을 단순한 것으로 풀어 나간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가위로 싹독싹독 잘라버리는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하게 엉킨 실의 방향을 하나 하나 관찰하고, 추적하면서 풀어 가는 단순함이다.,,,가령, 컴퓨터를 조작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돌발적으로 생기는 수가 많다. 더구나 컴퓨터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일일이 설명서를 보며 익히거나, 전문가의 가르침을 받거나 하면서 조작을 하다 보면 아니 밤중에 컴퓨터가 난리를 칠 때가 있다. 정말 기막히는 노릇이다.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고 엉뚱한 글쇠를 함부로 누를 수도 없다. 잘못 눌렀다가는 몇 시간 동안 타자 한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헛수고가 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답답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빨리 단념하고 새로 시작하는 그야말로 아주 단순한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얼핏 생각하기에는 단순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단순 처리 요령을 익히기 위해서 ‘어떤 조작을 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나?’ 그 원칙을 찾느라고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사에서 단순하게 산다고 싹독싹독 자르거나, 내버리거나, 그만두거나 하다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사는 수가 많다. 복잡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캐 가지고 제거해야 잘못을 되밟지 않고 단순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제 4원칙--정의와 용기
공병우식 제 4원칙은 정의와 용기이다.
공병우 소년은 열 네 살 때 의주농업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밤 상급생 방에 불려갔다. 공병우가 방에 들어서자 별명이 묏돼지인 상급생이 다짜고짜 빰을 때렸다. 2학년 짜리 선배 별명이 묏돼지인데,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맞은 공병우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말했다.
“왜 때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건방진 게 그게 바로 네 잘못이야!”
묏돼지가 공병우의 배를 찼다. 공병우는 그 자리 꼬꾸라졌다. 숨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는 공병우에게 묏돼지는 계속 발길질을 했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구경하던 애들이 아무래도 좀 심하다 싶었는지 묏돼지를 진정시켰다.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대며 자기 방으로 돌아온 공병우는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묏돼지가 무엇 때문에 건방지다고 했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공병우는 매달 서점에서 잡지를 사보았다. 묏돼지는 잡지를 빌려 달라고 했다. 처음 얼마 동안 빌려 주었다. 어느 날 잡지를 보고 있던 공병우에게 묏돼지가 뻣뻣하게 말했다.
“야 공병우, 이 책 좀 보자!”
말하는 투와 태도가 너무나 고자세였다.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말하는 것이 아니꼬와 잡지를 빌려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묏돼지는 앙심을 품고 있다가 ‘하급생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병우를 상급생 방으로 불러다가 상급생 여럿 보는 앞에서 마구 때린 것이다.
공병우는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보다 덩치도 크고 힘이 장사인 묏돼지와 정상적인 방법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
공병우는 주머니칼을 찾았다. 입술을 깨물면서 칼날을 폈다. 하얀 칼날이 반짝였다.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상급생 방으로 달려갔다. 몸을 못 가눌만치 맞고 비틀거리며 돌아갔던 애숭이가 칼을 들고 상급생들이 방에 쳐들어온 뜻밖의 광경을 보고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고 묏돼지 앞으로 다가갔다. 묏돼지는 공병우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는 겁에 질려 얼굴이 새파래졌다. 칼을 묏돼지 얼굴로 들이댔다.
“야! 왜 나를 때렸어? 이유가 뭐야?”
칼날이 번떡였다. 분위기가 너무나 살벌하여 다들 숨을 죽였다. 금방이라도 찌를듯한 공병우의 다부진 태도를 보고 묏돼지는 새파랗게 질렸다. 칼을 휘두르기만 하면 피비린내가 나는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겁에 질린 상급생들이 공병우를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공병우가 소리쳤다.
“다들 비켜! 내 몸에 손을 대거나 나를 가로 막는 놈은 누구라도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퇴학도 좋고, 경찰에 끌려가도 좋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없는 하급생을 구타하고 못살게 하는 놈은 아무리 상급생이라도 절대로 이제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
공병우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조용했던 기숙사는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다른 방에 있던 학생들도 우루루 몰려왔다.
평소에도 하급생이 상급생에게 말로 대드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공병우처럼 상급생에게 칼을 들이대며 대드는 일은 그 학교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하급생이 상급생 귀에 거슬리는 말이나 반항했다가는 몰매 맞기 십상이었다. 상급생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 학교 분위기 때문에 하급생은 누구나 상급생에게 맹종했다. 감히 상급생의 월권이나 부당한 행동에 대해 저학년 학생이 대든다는 것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번뜩이는 칼날 앞에서 새파랗게 질린 묏돼지는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라 판단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잘못했다.”
공병우의 칼부림 사건은 금세 기숙사 전체에 소문이 났다. 그 뒤에 상급생이 하급생을 구타하는 악습이 사라졌다. 나중에 공병우 박사가 3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뒤, 박정희 군사정권과 자판통일을 위해서 외로운 투쟁을 계속한 것도 공박사에게 정의감과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때 미국에 잠시 여행하러 갔다가 여행을 도중에서 멈추고 돌아와서 한글사진식자기와 한글워드프로세서 등을 연구 개발하는 한편 민주투사가 되어 때로는 선봉에 서기도 하고 때로는 뒤에서 후원한 것도 다 공박사의 용기와 정의감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제 5원칙--고집과 고독
공병우식 제 4원칙은 고집과 고독이다. 공병우 박사를 고집불통이라고 하는 수가 더러 있다. 1965년 4월 11일자 한국일보에 “한국의 유아독존 10화”라는 연재물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름이 좋아 유아독존이지, 쉽게 말해 한국 사람들 중에서 이름난 고집쟁이 열 명을 차례로 소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 승만, 최 현배, 양주동 등이 등장했는데 공병우 박사도 그 속에 랭킹 6위로 끼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 공병우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덮어놓고 내 것이 옳다고 내세우는 이기적인 고집을 부린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아마 나를 고집쟁이로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것도 어쩌면 남 보기에는 괴팍한 유아독존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공박사의 고집은 단순한 억지 중심의 고집이 아니다. 낡은 질서, 비과학적인 시스템, 잘못된 습관 등을 반대하고, 이를 바로잡고 계몽하기 위해서 부딪칠 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서 오는 고집이다. 공박사는 일상 생활에서 참으로 많이도 부딪쳤다.
식당에 가서 식사 뒤에 음식이 남으면 싸오고, 넥타이 매지 않고, 사진 전시회 할 때 화환 일일이 돌려보내고, 약속하지 않고 찾아온 손님은 다시 약속하고 만나자고 돌려 보내고, 한문자 명함을 받으면 반드시 한글로 써야 한다고 혼내주고, 당신의 생일잔치 해본적이 없고, 종로 통 그 비싼 땅에 있던 한글 문화원의 사무실들을 한글 문화 단체에게 공짜로 써라고 내주고, 시간 아낀다고 양말 고무줄 잘라버리고, 깍두기나 김치를 물에 헹구어 먹고, 딸의 데이트 도와주다 우연한 인연으로 청평호수가에 별장 짓고, 타자기 이야기라면 입에 게퍼품 물고 두 서너 시간 혼자 떠들고, 매일 아스피린 먹고, 방바닥에 호치키스 놓고 발바닥 운동하고, 공안과 옆 신도라는 일식점 아가씨 중심으로 키스 보급회 만들고, 미국에서 콘돔 처음 보고 그 참 편리한 물건이라 싶어 잔뜩 사서 한국에 보냈을 때 세관에서는 공박사가 풍기문란하게 음란 기구를 사 보냈다고 통관 안시켜 주고....1950년대 미국 다녀와서 방문 문턱 자르고 간장독 때려부시고 사과궤짝으로 침대 만들고 방안에 양변기 만들어 넣는 등 별별 기행을 하였으니, 얼마나 많이 부딪쳤을 것이며, 그러는 가운데 얼마나 고집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고집스럽게 살아오는 동안 공병우 박사는 남들이 잘 몰라 그러지 참으로 고독했다. 그의 고독함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그의 사진이다. 공박사가 사진을 처음 공부하자 가장 많이 찍은 피사체가 바로 달이다. 나는 공박사의 달 사진들 보고 공박사의 가슴 속에 쌓여 있는 고독을 금세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박사님 사진 중에 달 사진을 자세히 보면 공박사님의 고독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자 공박사님은 마치 보여 주면 안될 것을 들킨 사람마냥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니, 송현 선생이 그걸 어찌 압니까?”
“문학평론가나 예술비평가들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보고 작자의 내면 세계 심지어 무의식 속까지 꿰뚫어 보는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을 신기한 듯이 듣고는 공박사가 말했다.
“송선생이 바쁘시겠지만. 내 달 사진에 대해서 지금 말한 요지의 글을 하나 써주세요. 내 사진집에 해설하는데 쓰겠어요.”
“예, 박사님!”
공박사가 미국에서 한글컴퓨터 사진식자기 등을 연구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80 고령으로 몇 해 째 미국에서 자취 생활을 하시니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이 점에 대해서 공박사는 다음과 갈이 말했다.
“내가 하는 짓이 보기가 딱해 하는 말인 듯하다. 물론 내 아내나 딸들은 나 혼자 자취를 해 가며 연구 생활을 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처량하지도 않고, 짜증스럽지도 않다. 그야말로 나는 나의 고독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편리한 취사 시설을 이용하며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정말 나의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다. 나는 진정으로 고독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요 속에 잠길 수 있어 좋고, 연구를 하는 데도 고독한 분위기가 안성맞춤이다. 80이 지난 뒤부터는 내 나름대로 쉬고 싶을 때 쉬고, 눕고 싶을 때 누워야 편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실은 고독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 몸을 내 자신이 이끌 수 있는 건강이 있으니 자취를 하는 것 또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평소에도 떠들썩한 곳보다는 한적한 곳을 즐겨 찾는다. 고요를 찾아 내 생각을 다듬고 키우는 습관이 있다....어차피 인생이란 혼자 왔다가 홀로 떠날 몸이다. 그야말로 고독하게 떠나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 나를 걱정해 주는 아내가 있고, 아들딸들이 있고, 나의 연구를 격려해 주는 수많은 친지들과 동지들이 있는 한 나는 고독한 몸일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아무리 혼자서 말벗 없이 자취를 해 가며 연구에 몰두해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도 않다. 나는 진짜 고독의 맛을 누리면서 홀로 담담하게 떠날 연습을 서서히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에서 말했듯이 “보다 더 유유하게, 보다 더 마음대로” 지낼 줄 아는 진짜 고독의 지혜를 익혀야 할까 보다“
6)제 6원칙--나는 내식대로-- 콘돔과 유서
공병우식 제 6원칙은 나는 내식대로 산다이다. 6. 25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 언더우드 타자기회사에서 한글 타자기 제작 건으로 공병우박사에게 급히 미국에 와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공병우 박사는 부산에서 미군용기 편으로 36시간이 걸려서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공박사는 타자기 건 외에도 안과계, 맹인계 시찰 등 일정이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처럼 흩날리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낙엽은 아니고,낯선 물건이었다. 알고보니 콘돔이란 것이었다. 공박사 자신이 8형제였고,3남 6녀를 둔 가장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산아제한의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 싶다.
■야,그것 참 신통한 물건이군 그래. 이런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활용해야 애들을 많이 낳지 않겠구나. 애들을 너무 많이 낳아서 제대로 양육도 못하고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 참 편리한 물건이구나!■
이런 생각을 한 공박사는 콘돔을 잔뜩 사서 한국의 공안과 사무장 조충희씨 앞으로 보내면서 ■이 편리한 물건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잘 활용하게 하시오.■라고 일렀다. 조 사무장은 콘돔을 찾으러 세관으로 갔다. 세관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박사님 같이 저명인사가 이런 풍기문란용 기구를 사서 보내시다니,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이런 풍기문란용 기구를 통관시킨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통관시킬 수 없습니다!■
공박사는 이 이야기를 호탕하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송 선생, 풍기문란이라면서 통관을 안시켜주던 정부가 몇 해 안가서 산아제한을 강조하면서 전국적으로 무상으로 배포를 하더군요! 원 참! ”
오늘날은 콘돔은 전국 약방은 물론 심지어 다방의 화장실, 역 화장실, 고속버스 화장실, 심지어 도심지의 다방이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음식점이나 유흥업소의 출입문 근처 어디서건 동전만 넣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공 박사는 생활 환경 개선 작업을 착수하였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집 밖에 있던 변소를 집 안 목욕탕으로 옮긴 것이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빈정대었다.
"공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미쳐 버린 모양이다."
이때 공 박사의 성급한 생활 개선은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한옥 내부를 양옥 스타일로 고쳤으니, 종전과는 완전히 생활 양식이 달라졌다. 밖에 있던 변소가 안으로 들어오고, 수돗물을 뜰에 나가 길러 오던 것을 이제는 부엌에서 줄줄 나오게 하고, 거기다가 밥상을 나르던 것이 개선되었다. 상을 차린 곳에서 방 안까지 운반하려면 깊은 부엌에서 상을 차려 일단 마당으로 나갔다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온 뒤, 안방 문을 열고 높은 문턱을 넘어, 안방 온돌방에 가져다 놓아야 하던 것을, 부엌에서 안방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안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벽에 구멍을 뚫었다. 그러자 우선 제일 좋아한 이는 가정부였다. 물 한 그릇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떠 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공 박사는 문지방을 톱으로 쓸어내고 말았다. 왜냐면, 문지방은 사람이 넘어 다닐 때 불편함은 물론, 특히 청소를 할 때 문지방 때문에 안방에서 마루 끝지 대번에 빗자루 질을 할 수 없어 불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 박사의 생활 개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독대 차례다. 공 박사의 표적은 김치와 간장이었다. 김치를 담아 먹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채소를 그대로 먹으면 될 테고, 간장을 먹지 말고 소금을 먹으면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공 박사의 눈에는 간장과 심치는 시간 낭비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아침내 공 박사는 간장독과 김칫독들을 때려 부수고 말았다.
공 박사의 환경 개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안방을 고칠 차례이다. 안방에다 사과괘짝을 들여다 놓았다. 가족들 중에 어느 누구도 왜 공 박사가 사과괘짝을 안방에 들고 들어가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무엇인지 몰랐다. 설마 그것이 공 병우식 침대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침대 생활을 하는 것이 온돌방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쪽보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생각에서 공 병우식 침대를 만든 것이다.
공병우 박사는 1953년도에 미국엘 갔다 와서는 ‘유서는 젊고 건강한 때라 하더라도 미리 써 놓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미리 써 두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하다가 80세에 들어선 해에 간신히 뉴욕에서 유서를 썼다. 공박사의 한글 유서가 미국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영문 서식에 맞추어 정리를 해 달라고 뉴욕에 있는 정진우 변호사에게 착수금 150달러를 지불하고 맡겼다. 공박사 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생명이 위독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동거 가족 또는 보호자는 다른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위독 사실을 일절 알리지 말고, 의사의 지시에만 순종할 것.
둘째, 만일 죽더라도 누구에게도 일절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일절 하지말고, 아래 적은 순서로 가능한 방법을 택하여, 시체를 처리할 것,
1) 시체 중에는 조직 또는 장기를,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적출한 뒤,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 또는 해부학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의과 대학에 제공할 것.
2)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 만약 법적으로 화장 또는 수장이 불가능할 때에는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단, 매장할 때에는 새옷으로 갈아 입히지 말고,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관)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매장한다. 시체는 현장에서 100킬로미터 밖으로 운반을 못한다. 현 거주지로부터 100킬로미터 밖에서 사망하였을 때는 가급적 현지에서 위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여행 도중 바다나 강물에 익사하였을 때는 수장으로 삼고, 시체를 찾아내지 말 것,
3) 죽은 지 1개월 후에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점차 알릴 것. 만일 매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화장한 것과 같은 경우로 알고, 누구에게나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 것. 화장을 하였을 때,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 두지 말 것.
셋째, 죽은 후, 나의 유형 무형의 재산이 있을 경우는 신체 장애자들, 특히 앞 못보는 장님들의 복지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가족과 내가 법적으로 지명한 집행인과의 협의에 의해 처분할 것.
1993년 년 10월 한글날에 정부는 건국 후 처음으로 한글 유공자 4명에게 훈장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 공 박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주었다. 훈장 받기 전날 저녁을 마치고 헤어질 때였다. 공 박사가 문화원으로 도로 들어가시기에 내가 물었다.
"박사님, 오늘 댁에 들어가시지 않으십니까?"
내일 공 박사가 훈장을 받는 날이니까 오늘은 댁에 들어가서 주무시고, 옷도 양복으로 갈아 입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 박사는 문화원에서 주무시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세종문화회관 한글날 기념식 전에 문화 훈장이 수여되었는데, 공 박사는 어제 저녁에 입고 있던 그 낡을 대로 낡은 푸른색 점퍼 차림에 평소 입던 그 푸른색 셔츠에 구두는 구겨신은 채로 단상 위에 올라왔다. 예사로 본 사람은 이런 모습을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것이다. 공 박사는 평소에 입고 있던 낡은 옷 차림새 그대로 였고, 거기다가 평소대로 구두 뒤축은 구겨신은 채였다.
공박사는 5분 이상 하는 이발소에는 가지 않고, 낮에 하는 결혼식에도 가지 않고, 그 유명한 공안과가 개업한지 그렇게 오래되어도 이날까지 개업식 기념식 한번 한 적 없고, 식당에 가서 음식이 남으면 꼭 싸서 가지고 오고, 넥타이 매지 않고, 사진 전시회를 할 때 축화 화환을 받지 않는다고 미리 선전했는데도 화분을 보내오자, 일일이 다 돌려주고, 미리 예약하지 않고, 불쑥 오는 손님은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되돌려 보내고, 한문자로 된 명함은 받으면 반드시 한글로 써야 한다고 혼내주고, 자신의 생일잔치를 해 본적이 없고, 종로 그 비싼 땅에 있는 문화원 사무실을 한글 문화단체에 공짜로 쓰게 내어주고, 멀쩡한 양말 윗부분의 고부를 잘라서 신고, 깍두기 물에 씻어서 먹고, 맥주는 한잔 이상 절대로 마시지 않고, 딸의 데이트를 도와주려다 우연히 청평에 별장을 짓고, 타자기 이야기 나왔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입가에 거품을 버글버글 물고 이야기하고, 언제나 동안으로 밝게 웃으며, 하루에 반드시 아스피린 한알씩 먹고, 방바닥에 호치키스를 놓고 운동 삼아 발로 밟고, 공안과 옆 신도라는 일식집에 아가씨들을 중심으로 키스 보급회 만들고.....
7)제 7원칙--한글사랑과 자판 통일
공병우식 제 7원칙은 한글사랑과 자판통일이다. 평소에 공박사 머릿속에는 한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자나깨나 한글을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훌륭한 것을 갖고도 소중하게 간수할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른 채, 500년 간을 천대하며 보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민족 문화를 고도로 발달시킬 수 있는 한글을 갖고 있으면서도 활용할 줄 모르는, 한자에 병든 지식층들이 초등학교에서 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뜻 있는 분들이 한데 모여,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크게 문제 삼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 세상 천지에 “훌륭한 제 나라 글자를 갖고도 제발 제 나라 글자를 좀 씁시다”하고 애원에 가까운 운동을 벌이는 나라가 우리 나라 말고 어디에 있을까? 제 나라 글을 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한글 전용합시다”의 운동을 펼쳐야 하는 세월이 한스럽기만 하다. 요즘 온통 한글만 쓰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시대의 흐름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일반 신문 잡지, 단행본들이 다투어 한글 전용의 방향으로 흐르는 까닭은 그만큼 과학적인 실효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인 한글을 실제 생활에서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공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소부터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이 즐겨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화를 통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한글 기계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절로 한글 전용이 된다고 믿고, 합리적인 세벌식으로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 프로세서 등을 개발해 왔다. 요즈음은 세벌식 한글 전자 타자기도 개발했다. 편리한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도 한글의 기계화 문제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은 곧잘 하면서도 실제는 천대를 일삼아 왔다. 나는 그 같은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앞장을 서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 중에서는 한글 기계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그저 평범하게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싶다.”
그래서 공박사는 겨레의 통일에 대한 생각도 한글과 한글 기계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의 숙원인 남북 통일도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쓰고 있는 한 핏줄의 한글 민족의 통일이라는 맥락에서 논의해야 한다. 이 같은 동질적인 요소가 있기에 우리는 동족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같은 말과 글을 가진 것을 공통 분모로 삼고 통일을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과 북은 우리말과 우리 글을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사용하므로 이질적인 말과 글로 변해 가고 있다. 한글 맞춤법도 서로 달라졌고, 외래어 표기법도 서로 다르다. 표준어제정을 서로 다르게 하여 대화도 안 될 상태로 변해 가고 있다. 북한에서는 표준어라 하지 않고 문화어라 해야 알아듣는다. 반면에 남한 사람들은 문화어가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다....우리나라가 참다운 민주주의 나라로 통일을 하려면 먼저 민주주의적 글자인 한글만 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시간을 가장 많이 절약할 수 있는 길은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길밖에 없다. 그 동안 한글은 종교와 문화와 과학의 어머니 구실을 해 가며 뿌리를 내렸다. 고도의 기계 발달로 모든 문물이 발전한 미국을 볼 때, 우리나라는 영문자보다 더욱 과학적인 기계화를 할 수 있는 한글 때문에, 고도 성장의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피드 시대를 이겨내려면 한글 전용을 꼭 해야 한다. 세종대왕께서는 컴퓨터 시대에서도 선두로 달릴 수 있는 기가 막히게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중국 글자의 종살이를 자청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 세종대왕께는 면목이 없다. 한글 전용을 해야만 최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글의 전산화도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공박사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든 공안과는 망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안과 병원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3벌식 한글기계는 절대로 망해서 안됩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실을 정부에서 모르고 도리어 천대를 하고 있으니 한글의 앞날과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김구선생의 소원은 첫째도 통일이고 둘째도 통일이고 셋째도 통일이었는데, 공박사의 소원은 첫째도 자판통일이었고, 둘째도 자판통일이었고, 셋째도 자판통일이었다.
8)제 8원칙--발명--한국의 에디슨
공병우식 제 8원칙은 발명이다. 공병우 박사는 한국판 에디슨이다. 공병우 박사의 발명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내게 공병우 타자지 회사를 다 맡기면서 공병우 박사의 발명품 족보를 내게 넘겨 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분야에 걸처 수많은 발명특허 건수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박사 한테서 발명가를 천대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이 승만 박사 이야기를 나는 골백번도 더 들었다. 실용적인 한글타자기를 비롯하여 한글과 영문을 함께 찍을 수 있는 한영타자기, 한글과 영문 대소문자를 같이 찍을 수 있는 한영 3단 타자기, 공병우텔레타이프, 공병우볼타자기, 공병우사진식자기, 중국주음부호타자기, 맹인점자타자기, 한손용한글워드프로세서 등에서 콘텍트렌즈에 이르기까지 공박사의 발명특허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우리 나라 여자들 중에 쌍꺼풀 수술을 한 여자는 전적으로 공 박사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개발한 분이 바로 공 박사이기 때문이다. 공 박사는 쌍꺼풀 수술을 우리 나라 뿐 아니라 멀리 하와이까지 전파시키기까지 하였다. 공 박사가 1957년 미국 여행 길에 하와이에 들렸다. 하와이에는 이국 안과 학회 총무인 홈스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공 박사가 공항에 도착하는 날 홈스 박사는 병원일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대신 홈스 박사의 부인이 환영을 나왔다. 부인이 손수 운전을 하는 것을 보고, 공 박사는 부럽게 생각하였다. 공 박사는 이미 한국에서 운전 시험에 주번이나 낙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받은 인상 때문에 공 박사가 하와이 여행을 마지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운전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홈스 박사는 공 박사에게 극진한 대접을 한 뒤, 다음과 같이 물었다.
"곤 박사님! 당신은 여자들의 눈을 예쁘게 하는 특별한 수술을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어떤 수술입니까?"
"여자들의 눈꺼풀에 하는 간단한 수술인데 쌍꺼풀 수술이라 합니다."
"그 수술을 한 여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한국에서 나에게 쌍꺼풀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대단히 만족해 합니다. 이 수술은 눈을 예쁘게 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날로 인기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공 박사님, 수고스럽지만 이곳 하와이 여성 중에서도 그런 수술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 박사님께서 그 수술을 시범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하와이에서는 그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아무도 없습니다."
"좋습니다. 홈스 박사께서 원하신다면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튿날엔가 공 박사가 홈스 박사와 여러 명의 다른 의사들과 조수들이 보는 앞에서 쌍꺼풀 수술을 시범으로 해 보였다. 이것이 하와이에 쌍꺼풀 수술이 최초로 보급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내가 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던 어느 날의 일이다. 공안과 원장실에 한쪽 구석에 유리대접에 뭐가 들어 무슨 액체 속에 잠겨 있는데, 얼핏보기에는 고구마를 밤톨만큼 썬 것 같기도 하고, 밤을 깐 것 같기도 해서 내가 물었다.
“박사님, 저게 뭡니까?”
“밤이오.”
“밤으로 뭘 연구를 하시는 겁니까?”
”예, 밤 저장방법을 실험하는 중입니다.“
“왜 그런 연구를 하시는 겁니까?”
“삶은 밤을 여러 개 까놓고 먹다보면 남은 것이 빨리 상하니까 상하지 않는 법을 연구하는 중이예요.”
만약 공박사가 박정희 독재 정권과 글자판 싸움하는데 그 많은 시간과 정력과 돈을 쓰지 않았다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발명하였을 것이다. 공박사의 발명가적 재능을 타자기 자판 싸움하느라고 사장시킨 것은 공박사 개인의 불행은 물론이고, 이 나라의 불행이기도 하다.
9)제 9원칙--겸손하게--지면서 이겨라
공병우식 제 9원칙은 “겸손하게”와 “지면서 이겨라”이다. 공병우 박사는 아주 겸손한 분이다. 연구소에 일하는 타자수나 병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도 늘 겸손했다. 말씨도 겸손했고 몸가짐도 겸손했다. 아무리 어린 타자수나 여직원 심지어 손자뻘 되는 운전기사에게도 반말 하는 것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셋째 아들뻘 밖에 안되는 나에게도 처음 만나서 돌아가시기 까지 단 한번도 반말을 한적이 없고, 농담으로도 반말을 한적이 없다.
내가 박정희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럴 때 온갖 위협을 받으면서 자판 통일을 위한 투쟁을 할 때 공병우 박사는 내게 자주 이런 충고를 했다.
“송현 선생, 지면서 이겨야 해요”
나는 좀처럼 남과 싸우지 않지만 일단 싸움을 했다하면 성격에 극단적인 면이 있어서 과격하게 싸우고 끝장을 보려고 한다. 공병우 한글기계화 연구소 부소장으로 취임한 서너달 뒤쯤엔가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표준자판 폐지 건의서를 제출했다. 청와대는 내 건의서를 과학기술처로 넘겼다. 과학기술처 장관한테서 나를 호출(?)하는 공문이 왔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와 싸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과학기술처로 갈 때 공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송현 선생, 오늘 과학기술처에 가서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과격하게 싸우지 마시오. 이길려고 하면 지기 쉬운 법이니, 지면서 이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젊은 혈기에 뭘 집어던진다거나 책상을 뒤엎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지면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명심하시오.”
공병우 박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날껏 살아오면서 싸움을 많이 했는데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싶어서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것이 과학기술처에서 정한 비과학적인 표준판을 폐지하라는 한글 기계의 글자판 싸움이다. 이 싸움을 근 20년 가까이 해 오면서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승산도 없는데 왜 싸우느냐?” “그렇게나 오래 동안 싸웠지만 아무 소용이 없지 않느냐?”등의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그 싸움을 하면서 내가 꼭 이기려고 싸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한글 기계화 정책을 잘못해서 나라를 망치는 것을 보고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싸운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역사에 한 줄 올바른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싸운 것이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한글을 아직도 천대하고 있는 남한 동포들에게 한글 기계화에 관한 올바른 과학을 어찌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밝히려는 것이요, “
공박사는 나처럼 과격한 싸움을 하지 않고, 순리대로 조용조용 싸우는 스타일이다.
“...남과 어울린다 해도 논쟁은 별로 안 하는 편이다. 정식으로 나의 신념을 말하고, 나의 주의 주장을 보호해야 할 때와 장소가 주어지면 나의 소신을 밝힌다. 과학적인 나의 신념 대문에 싸울 일이 있으면, 대체로 글을 통해 의견을 말하는 경우는 있어도 말 싸움질은 삼가는 편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우겨대기만 하는 사람을 상대로 논쟁을 하게 된다는 것은 막대한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내 건강 관리를 위해서도 피해야 할 일이다. 내 성미가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말할 재간도 없을 뿐 아니라. 성급해져서 혈압부터 올라가기가 십상이니 말이다....”
10)제 10원칙--박애정신--맹인타자기의 아버지
공병우식 제 10원칙은 박애정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는 장애자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나쁜 편이다. 이에 대해서 공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침 출근길에 장님을 보고는 침을 뱉으며 “에이,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불구인 애가 무관심한 가족을 항해 악을 썼다 해서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병신 육갑하네”로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세상 천지 어디에 병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그 모습을 흉내내며 얼씨구 좋다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보다 온전치 못한 장애자를 조롱하며 추는 이른바 병신춤이란 정말 불구자를 가슴아프게 하는 비인도적인 짓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수많은 발명품들은 대부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타자기의 발명도 그렇고,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공박사가 1953년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여러 가지를 깨알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눈먼 이에게 희망을 주는 맹인재활 의학 분야이다. 공박사의 말마따나 그전까지는 “눈 치료만 할 줄 아는 안과 의사”에 불과했다. 일단 치료할 수 없는 환자에게는 손을 툭툭 털고 실명 선언만 하면 그만이었다. 미국에서 실명자에게 베푸는 각종 재활 프로그램에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나는 눈먼 환자에 대해 너무 무지했으며, 마치 무슨 큰 죄를 저지른 사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게 온 환자 중에는 다른 병원에서 이미 실명 선고를 받고 온 사람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서울에 가서 공 박사의 진찰이라도 한 번 받아 보고 싶다’면서 논밭을 팔거나, 소를 팔아 가지고 병원에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하늘에 무너지는 듯한 절망으로 울부짖는 이 실명자들 앞에 두고 의사로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냉정하게 진찰 결과만 말해주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나는 재활 의학에 백지 상태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재활 의학에 눈을 뜨게 된 나는 그제사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 재산을 다 처분해서라도 장님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곧 귀국했다. ”
공박사는 곧바로 서울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에 2천여 편 대지를 마련하고 ‘맹인 부흥원’을 설립했다. 여기서는 점자 타자기와 한글 타자기 등을 가르치면서, 장님들이 일반인들과 같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장을 계획하였다. 눈먼 사람은 으레 밤에 피리를 불며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안마사 노릇밖에는 못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회 통념을 깨기 위한 것이었다. 이분들이 사회에 나가서 당당한 일꾼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꿈이었다.
공박사는 맹인부흥원을 본격적인 ‘맹인 재활 센터’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 대만, 홍콩 등지에 견학 여행을 하였다. 갖고 있던 부동산을 모두 팔았다. 그리고 일본인 전문가 기무라 씨를 초빙해서 건축과 특수 시설을 만들었다. 물론 기숙사 설비까지 갖춘 맹인 재활원을 만들었다. 그 때 지은 건물이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그 당시는 맹인들을 위해서는 너무 사치스러운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재활 센터를 공 안과 병원의 부설 기관으로 편성하고 재활 센터의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불하었다.
공박사는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70년대 초반에 점자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ibm 회사에서 만든 전동 점자 타자기는 2천 달러가 넘는 고가였다. 그래서 맹인들이 150달러 정도의 싼값으로 구입해서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수동식 타자기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명하였다. .... 의 맹인들을 위해 중국의 주음 부호 타자기를 개발하기도 해서 중화민국 장 경국 총통 비서실장으로부터 감사장과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을 돕고, 나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밀어주고, 불구인 사람을 격려해 주고, 신체 장애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그런 사회가 곧 우리가 바라고 있는 민주 시민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결국 나나 내 가족이 그와 같은 지경에 빠졌을 때에 나를 돕고 나를 밀어 주고 나를 격려해 주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남을 도울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나라도 진정한 민주주의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995년 3월 7일 공박사가 돌아갔다. 그러자 어느 일간신문은 "공박사의 삶과 죽음"이라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고집불통의 치열했던 외길 인생과 빈손으로 온 인생 빈손으로 허허롭게 돌아가는 도인 같은 공병우박사 죽음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그는 정치인도 아니었고 인기를 좆는 유명인도 아니었다. 독학으로 공부해 안과 전문의가 되어 90평생을 의료사업에 종사했고 한글 사랑을 통해 나라 사랑에 기여하는 치열한 삶을 알았던 그가 또한번 온몸을 바쳐 마지막 헌신을 했다. 그의 고귀했던 삶과 죽음을 나의 일상속에서 새롭게 하자."
공병우 박사는 삶뿐 아니라 죽음도 공병우식이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도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기증하라." 이 바람에 죽은 지 이틀이 지나서야 텔리비젼 뉴스 시간을 통해 공박사의 부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국무회의는 3월 14일 공병우 박사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키로 의결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공병우식으로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공박사가 가장 염원하던 것은 글자판 통일이었다.현행 엉터리 표준자판을 폐지하고 과학적인 3벌식으로 글자판을 통일하는 일이다.당신 살아생전에 글자판 통일은 커녕 글자판 통일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빨리빨리주의>로 한 세기를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간 공박사는 과학과 애국이 한데 어우러진 삶을 산 우리시대 마지막 큰 별이었다.
4.공병우 박사의 한글기계화 분야의 큰 업적
1)실용적 한글타자기를 발명하다.
쌍초점 원리를 발명하여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만들었고, 이것이 한글정보화의 초석이 되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인터넷 최강국이 되는 바탕에는 초성,중성,종성의 세벌식으로 구성된 과학적인 한글과 자음, 모음, 받침으로 구성돤 공병우식 3벌식 타자기가 있기 때문이다.
2)각종 한글기계 글자판 통일을 이룩하다.
한글타자기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각종 글자 생산 기계들간의 수직적 글자판 통일을 이룩하였다. (한글기계화개론.송현. 청산출판사 1985년)
3)과학적인 한글 글자꼴의 기본을 정립하다.
공병우식은 한글 글자꼴의 구조대로 닿자(초성글자)와 홀자(중성글자) 받자(종성글자)를 각각 1벌로 하는 세벌식이기 때문에 가독성과 판독성이 높은 합리적인 글자꼴의 터전을 마련하였다.(한글자형학. 송현. 디자인출판사. 1985년)
4)공병우 한영타자기를 개발하다.
수동.전동.전자식 한글기계에서 한글과 영문 대소문자를 완벽하게 두 나라 글자를 찍을 수 있는 공병우 한영타자기는 세계적인 발명품으로 한글의 과학성과 한글기계화의 우수함을 입증하였다.
5.남은 일
한글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박사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남은 일은 산 자들의 몫이다. 쥐뿔도 없는 내가 그 동안 앉은뱅이 용쓰듯이 마음으로만 구상했던 것들은 대강 다음과 같다.
1)공병우 기념사업회 구성
2)공병우 박물관 건립
3)공병우 전집 간행
4)공병우 한글기계화상 제정
5)세벌식으로 남북한 글자판 통일
6)한글문화원 법인화 추진
7)공병우 사이버공과대학 설립
8)공병우 정신을 기리는 각종 사업
위에서 열거한 일들은 어떤 것은 공박사의 제자들이, 어떤 것은 공박사의 가족들이, 어떤 것은 한글과 한글기계화 관련 인사들이, 어떤 것은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할 일이다. 내년이면 공병우 박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데,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공 박사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닭 울기 전에 스승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처럼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다.(2006.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