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경제의 명과 암

석진욱 | 기사입력 2002/03/12 [16:10]
1. 들어가며
{image1_left}1999년 7월 21일 대우그룹이 마침내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정부와 금융권에 4조원 규모의 자금지원을 요청하면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 파라다임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통해 거대재벌로 성장한 대우그룹이 결국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끝내 좌초하고 만 것은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제 박정희 시대의 경제관이라는 자체가 완전히 종언을 고했음을 웅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이른바 “고도성장”이라는 신화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유신 시대의 잔영에서 헤어나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1997년 한국의 금융공황이후로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외환위기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피폐해진 경제상황, 더욱 넓어진 빈부격차, 실업, 그리고 생활고로 인해 그나마 “꿈을 심어주었다”고 느끼는 박정희-유신시대의 경제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이쯤되면 박정희-유시시대의 잔영 혹은 신화라는 것은 거의 “마약”의 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요즘은 다분히 지역 감정적인 정서 때문인지 과거, 스스로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참칭하는 사람들마저도 은연중, “경제는 박정희..”라는 식의 사고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게다가, 요즘은 전국 경제인 연합회를 중심으로 21세기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지극히 시대착오적이자 유신시대적 경제관이 버젓이 일간 신문 경제란에 매우 중요한 한국경제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은 2003년 이후 다시 한번 한국의 대형 금융공황 혹은 대 공황의 맹아를 이른바 경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머리속에 곱게 싹 틔워 나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더나 유신시대의 고도성장을 목도하고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의 세례를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자유기업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조차 과거 박정희-유신시대의 낡은 파라다임을 이른바 “시장 경제”로 포장하고 20세기 자연과학의 각종 성과를 엉터리로 꿰 맞추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것을 보면 박정희-유신시대의 잔영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깊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만들 정도입니다.

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박정희-유신시대를 관통하는 경제 이데올로기가 자연과학과 공학의 진리들을 왜곡시키고 그런 왜곡의 목소리가 마치 “진리”인양 이야기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요, 문제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박정희-유신시대의 지배적 경제 파라다임을 다시 한번 짚어보고 앞으로 한국경제를 지배해야 할 경제 파라다임은 과연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연과학을 엉터리로 대입하는 사이비 시장경제론이 한국경제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해야 하겠지요.

2. 성공신화의 신앙과 차입경영의 만성화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업적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첫번째의 업적은 바로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입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당시 정부 1년치 예산 보다도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국가적인 대 역사를 뛰어넘는 엄청난 역사였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imf, ibrd등의 한국에 차관을 조달하거나 혹은 차관조달을 도와주던 국제금융 기구들마저도 반대하고 경제학자들, 야당 등이 엄청난 반대를 했던 이 사업, 그러나 경부고속도로는 일본의 주도로 만들어진 아시아 개발기금의 원조를 바탕으로100여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가면서도 끝내 지어졌고 지금은 이른바 산업의 “대동맥”이라 불리며 박정희 경제신화의 가장 근원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무리한 사업이라고 반대했던 “반대의 목소리”들은 지금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엉터리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솔직히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대단한 일입니다. 가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낸 엄청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경부고속도로 때문에 한국이 imf를 맞이하게 되었다면 과연 경부고속도로가 그토록이나 훌륭한 업적으로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박정희-유신시대를 그나마 지속하게 만들었던 거대한 유산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한국은 이른바 “성공신화”의 신앙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대우신화나 현대신화로 이어지는 이른바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와 imf로 상징되는 대 금융공황을 맞기 전 한국에서 벌어졌던 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과잉중복투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신화는 이른바 현대의 50만톤급 유조선 건조의 신화를 이어 낳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소도 없는 상태에서 한 번도 건조해본 적이 없는 50만톤 급 유조선을 끝내 건조하는데 성공, 1999년 현재 세계 조선 건조량 1위의 위치를 탈환한 한국의 신화와 이어 1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대 재벌 대우그룹을 일구어낸 대우신화는 경부고속도로 신화의 연장선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신화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잠시바꾸어 1957년 이탈리아계 미국 경제학자인 모딜리아니 박사는 새로운 경제-경영의 파라다임을 구축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바로 지금 차입경영의 이론적 바탕이 된 모딜리아니 이론의 원천으로 정상적 경제상황에서 간접자본에 의한 대규모 차입은 기업경영과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론이 그 당시 최초로 발표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발표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이어 1960년대가 되자 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세계적인 규모의 대출붐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많은 서방의 기업들은 은행에서 대규모 자본을 차입하여 기업을 확장했고 이렇게 확장된 사업은 엄청난 이윤을 남기면서 금융비용을 카버하며 다시 확장된 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자본을 차입하는, 간접금융의 레버리지(leverage) 홍수가 이루어졌습니다.

1960년대 서방각국의 10년 대 호황은 미국의 베트남전 특수와 모딜리아니 박사의 차입경영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세계적 규모의 대출붐은 자본주의 경제를 일거에 후루시초프의 사회주의권 경제를 제압할 수 있었고 엄청난 호황이 60년대를 관통했습니다.

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으로 동 아시아의 변방국 한국에도 본격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이미 선언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계는 이 이론에 주목했습니다. 이른바 “중화학 공업 육성”이 본격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박대통령은 북한과의 체제경쟁과 점점 불리해져가는 군비경쟁에 한계를 느끼고 대형 중후장대 사업을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산업전환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대형 중후장대 사업의 시작에 필요한 자본의 조달과 금융비용의 조달 가능성. 과연 엄청난 자본을 빌려서 과연 앞으로 해당 기업체가 금융비용 조달의 걱정없이 산업을 이끌어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미 8.3 사채동결 조치와 같이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은 지극히 허약하였고 국내저축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중후장대 산업의 자본조달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입경영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이른바 서강학파를 중심으로 한 불균등 발전이론의 이론적 토대가 되며 해외에서 대규모 차관을 특히 일본자본의 대거 유치를 통해 중화학 공업을 육성시킬 수 있다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리 성공신화, 절대 실패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에 가까운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정부가 중화학 공업 육성을 발표하자 많은 기업들이 앞 다투어 중화학 공업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정부의 각종 지원과 특혜. 정부의 지급보증 (국책은행이었던 산업은행의 지급보증)을 바탕으로 한국의 기업들은 쉽게 해외에서 자본을 조달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imf의 경제지원 및 감시를 받고 있던 한국에 대한 대출은 서방 금융계의 입장에서도 책임추궁을 피하면서 새로운 대출처의 발굴이라는 의미가 있었기에 일본 자본을 필두로 엄청난 중화학 공업 분야에의 투자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재적 의미의 대 재벌들이 탄생합니다.

{image2_right}그리고 이러한 엄청난 투자는 또한 엄청난 국내수요를 일으켰고 그것이 70년대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중화학 공업 투자 붐은 1973년 이후 시작된 석유파동과 맞물려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발생 시켰습니다. 최대 30%에 이르던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은 것은 때맞추어 터진 중동 건설 붐이었습니다. 이때 들어온 엄청난 오일달러는 정부 경제정책 당국자의 예상을 훨씬 넘는 것이었고 중화학공업 육성이란 명목 하에 엄청나게 풀린 자금에 달러송금까지 들어오자 총통화 관리는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자산가치 하락을 피하기 위해 이때부터 이른바 복부인으로 상징되는 아파트 투기열풍이 불어 닥쳤고 이것이 한국경제의 성장내용을 지극히 불건전한 방향으로 틀어내기 시작합니다.

1979년 가을부터 한국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때맞추어 opec의 2차 석유류 감산이 시작됩니다. 이른바 2차 오일쇼크였습니다. 여기에 한국은 70년대 내내 추구하던 중화학 공업정책이 발목을 잡히면서 엄청난 공황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1 배럴에 36달러까지 유가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직전의 상태로 빠져듭니다. 이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했습니다 (imf때도 50%에는 이르지 않았지요..).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합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기업이 일거에 도산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야 자신이 의욕적으로 추구한 중화학공업으로의 산업전환의 총체적 붕괴를 채 보지 못하고 총탄에 저 세상에 갔지만, 남은 사람들은 지금의 imf 금융위기로 인한 고통에 버금가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살아남은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을 갚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말 180억달러 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달러 수준으로까지 급격히 증가합니다. (이 당시 수출액이 300억달러 수준, 지금으로 치면 약 2000억달러 정도의 수준).

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사상누각이었습니다. 한국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의 이자도 갚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은 불안정한 국제 원자재 가격에 대한 전망도 없이 단지 선진국의 과다 에너지 사용 산업을 헐값으로 (그럼에도 당시 한국의 경제 여건상 엄청난 자금이었지만..)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을 과신하여 행한 도박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중화학 공업 구조 조정이었지, 사실상 박정희가 계획한 모든 계획의 총체적 폐기가 불가피했습니다. 1982년부터1985년까지 한국은 중화학 공업 구조조정을 시작합니다. 당시 한국최대의 중공업 회사였던 한국 중공업은 몇 개의 회사로 분할되어 오늘날의 현대중공업, 대우 중공업의 모태가 되었으며 자동차 업체도 통폐합 정리되어 오늘날의 대우자동차등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수한 회사가 부도날 판이었으니까요.

대대적인 부채감면 이자탕감 이자지급 유예등이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화학 공업을 세우느라 들어간 외채는 정부의 지급보증에 의해 국민의 혈세로 메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외채는 500억 달러까지 늘어났습니다. 금융비용의 무서움을 간과하고 선진각국으로부터 돈을 빌어다 쓴 결과 엄청난 국민혈세가 외채이자 갚는데 쓰여졌지만, 외채는 기하 급수적으로 더욱 늘어나 버렸습니다.

이 당시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의 후유증으로 1984년 가을 한국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이 때문에 일본을 방문 60억달러 규모의 거액의 융자를 요청할 지경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공하지 않으면 한국은 이른바 80년대 남미 외채위기와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어쨌든 일본은 논란속에 60억달러의 원조를 결정합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 당시 많은 일본 기업들이 지금의 대 재벌들의 계열사들의 대 주주였었고 이들이 무리한 투자에 대해 제동을 걸어주는 바람에 대 금융공황의 상황으로는 몰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60억달러 융자가 없었다면 한국은 남미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10년을 똑 같이 당했을 것입니다. 일본입장에서도 당시 일본상품의 세번째 수요처였던 한국경제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60억달러 원조가 가능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신화가 박정희-유신정권으로 하여금 엄청난 경제위기 상황을 스스로 자초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것을 망각해버렸습니다. 박정희 경제의 실패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전 7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1997년 대 금융공황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3. 대 금융공황-박정희 경제의 종언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60년대 호황기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조짐을 보이고 잇던 선진 각국의 산업계는 일거에 공황상태에 빠져듭니다. 포드 대통령 당시 미국의 재 할인율이 18%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스태그 플레이션으로 알려진..)이 선진각국의 경제를 죄어 왔고 고도성장은 막을 내리면서 저 성장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동안 선진각국은 고 에너지 사용산업에 대한 후진국 이전을 적극 추진합니다. 그 대상은 멕시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각국과 한국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이란 결국 국제 자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손오공 장난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탄생한 한국의 재벌들에게 산업은행 특례보증으로 맛본 선진각국의 저렴한 금리의 자본 즉, 외채는 엄청난 유혹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금리 수준은 15~20% 사이, 1986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 때도 14~15%의 금리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시대의 금리를 저금리라고 불렀습니다. 그 정도로 한국의 금리수준은 높았습니다.

3저 호황으로 한국경제의 위기는 극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박정희의 유산은 끈질기게 한국경제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1990년 3저 호황이 끝나고 다시금 불황이 찾아 들었습니다. 산업생산은 곤두박질 치고 무역수지는 다시 적자로 반전되었습니다. 이때 전 세계적인 조선산업 불황이 찾아들면서 한국의 조선업계는 엄청난 위기에 빠져듭니다. 당시 한국 중공업의 조선 사업부 일부를 인수하여 출범시킨 대우조선은 박정희 때부터 가지고 있던 엄청난 부채로 인해 금융비용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산업 불황으로 인해 대우조선은 파산 직전의 상황으로 몰립니다. 이른바 대우그룹의 1차 위기로 알려진 대우조선 사태였습니다. 김 우중 회장 개인의 필사적인 사투로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는데 성공하면서 대우조선은 파산을 모면하지만, 박정희 시대 경제 파라다임의 망령 ? 모딜리아니식 차입경영의 망령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기성 산업계는 전반적인 이윤 하락으로 서서히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경제공황에서 벗어난 남미국가들과 동남아 그리고 중국산 제품에 한국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막대한 금융비용 조달을 위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통해 생산한 제품들은 국제시장에서 외면 받아 엄청난 재고 혹은 쓰레기 양산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상품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관리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을 중국사람 수준으로 낮추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대량생산으로 이를 만회할 수 있다고 한국의 산업계는 생각했습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반도체 호황으로 한국의 많은 기업은 이 시기부터 대대적인 시설확장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주택 2백만호 건설사업을 통해 한국의 건설업계는 필요이상으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집니다. 거기에다 한국의 자동차 업계는 이른바 2백만대 생산 필생론이 퍼지면서 자동차 3사가 대대적인 라인 증설에 뛰어듭니다. 이 자본들의 공급처는? 말할 것도 없이 은행권이었습니다.

기업-정치인-금융계의 3각 커넥션을 형성할 수 있던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엄청난 자본이 국내은행, 해외은행을 통해 조달되었습니다. 차입경영이라도 문제없다는 모딜리아니 이론은 1990년대에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선진각국은 1970년대 스태그 플레이션을 거치면서 차입경영의 문제점을 간파, 부채비율을 줄이는데 힘을 쏟았는데 반해 한국은 정 반대의 경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1996년 반도체 호황이 막을 매리고 다시금 불황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주택 2백만호 건설에서 막대한 철강 수요가 일어남을 보고 엄청난 자본을 끌어들여 지었던 한보철강이 파산하면서 한국의 금융공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삼미-진로-기아-뉴코아-거평-쌍방울-한라 그룹등 재계의 걸출한 대 재벌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1997년에만 총 60조원의 부실채권이 양산되며 이른바 외환위기로 일컬어지는 대 금융공황이 시작됩니다.

박정희 시대 차입경영의 파라다임이 일거에 한국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사건입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신앙,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사업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한국의 경영인들은 무모한 투자를 일삼았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투자한 사업이 투자액의 이자 조차도 지급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익률을 지속했고 다시 이러한 금융비용의 조달을 위해 또 은행으로부터 “운전자금”을 차입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imf로 상징되는 대 금융공황이었습니다.

4.한국경제의 나아갈 길 -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

1998년 초, 대우그룹의 김 우중 회장은 현 상태에서 위기극복의 길은 오직 수출이다 라고 했습니다. 현재 상황은 외환위기이므로 달러를 많이 벌어오면 imf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믿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국제 투기자본의 농간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달러를 쓸어가는 바람에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때부터 이룩해온 한국경제 파라다임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김회장은 수출을 늘리기 위해 엄청난 연불수출 및, 외상거래를 통해 밀어내기식 수출을 지속했습니다. 그래봤자 몇 달후에는 수출대금을 달러로 받아 오면 되니까요..그런데 김 회장은 한국의 상황을 간과했습니다.

수출대금을 3개월 6개월 후에 받을 것이라면 제품생산을 위해 국내에서 동원되는 자금은 1개월 3개월의 단기자금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대 금융공황으로 그 어느 누구도 장기로 자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출채권과 매입채권간의 이러한 프로세스 차이를 메우기 위해 대우그룹은 고금리 자금이라도 운전자금 마련을 위해 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자가 다시 불어나며 단기 운전자금의 비중은 더욱 커졌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대우 그룹은 1998년 12월 치명적인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결국 1997년 7월 끝내 좌초했습니다.

박정희식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최후 희생자가 박정희가 그토록 총애하던 김우중 회장이 되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지요…김우중 회장이 간과한 것은 한국의 경제위기가 외환위기가 아닌 금융공황이라는 것을 몰랐던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대우그룹 계열사의 부실을 빅딜 상대업체의 실사결과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실토할 정도일까요…)

금융공황 상황이므로 금융시스템의 신용은 붕괴하여 자금의 이동은 원활하지 않으며 금리는 치솟게 마련입니다. 김 회장은 이것을 간과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환위기임을 끈질기게 믿습니다. 박정희 경제에 대한 신앙 때문이지요. 금융공황이라 함은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가 총체적 붕괴상황에 이르렀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경제를 재구성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박정희 신앙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사이비 시장경제론을 들고 나와 기업은 자체적인 적응과정을 거쳐 모든 상황에 최적하게 기업활동을 유지하게 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정부의 개입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합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의 밑바닥에는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박정희 패러다임이 폐기될 정도의 사회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새로운 성장동력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금융권으로부터 신사업을 위해 대출을 받으라고 해봅시다. 그러나 정부가 산업은행등을 통한 지급보증은 서지 않겠다고 해 봅시다.

아마 그러면 여전히 성장동력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들은 실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라고 하면서 가장 큰 개입 중의 하나인 민간사업에 대한 정부의 보증을 은연중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박정희 때 그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기업 혹은 민간의 자체적인 적응과정이라는 자연과학적 현상을 통해 이른바 하이에크류의 정부개입 불필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외부환경에 적응과정을 통해 최적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적한 적응과정 자체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인데 이러한 적응과정은 최적한 외부환경 적응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라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외부환경에 자체적으로 최적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성립 불가능의 명제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심지어 대우그룹 같이 재계 2위의 대 그룹마저도 끝내 도산하고 말았을까요? 실은 정부가 그 엄청난 충격을 겁내 대우그룹의 도산을 막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실제로 자연계에서 그나마 최적한 적응과정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충분 조건으로 많은 개체들에 의한 경쟁이 존재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소수의 몇몇 개체의 경쟁에 의해 적응과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많은 수의 개체들의 경쟁이 보장되지 않으면 최적한 적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이에크 마저도 “경쟁”에 의한 적응을 이야기 했지, 한국처럼 기업 자체의 적응과정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변할 때는 천천히 누구나 적응할 수 있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하찮고 관심가질 필요도 없는 작은 움직임에 의해서도 사회는 엄청난 급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으며 오히려 이것이 사회변화의 일반적 경향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에 의해서도 쉽게 설명이 되는데, 수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진화의 중간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진화의 중간고리를 찾아내는데는 매우 극소수의 종들에 대해서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진화의 과정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급속도로 진행되어 거의 화석을 남길 새도 없이 전혀 다른 종으로까지 급격히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돌연변이에 의한 자연선택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해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계, 경제계, 혹은 사람이 살고 있는 하나의 사회라는 비 선형 시스템에서는 매우 작아서 통계로도 잡을 수 없는 작은 잡음의 영향만으로도 시스템의 출력은 크게 변화하며 전혀 엉뚱하고도 새로운 방향으로 시스템 출력이 나타납니다.  (보통 단위에 대하여 10의 마이너스 4승 정도..이 정도면 통계에는 잡히지 않음)

그 실제적인 경우도 1997년 9월 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1997년 9월 21일 한국의 외환시장에서는 평소보다 단 2억달러의 추가적인 달러 매입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원화는 가격 제한 폭인 8원이나 떨어지며 이른바 외환위기로 알려진 원화 대폭락의 시발점이 되었지요. 단 2억달러가 한국의 외환 보유고를 거덜내 버린 셈입니다.

지금 2000년을 앞둔 한국사회는 이러한 chaos 환경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지만 약간의 변화로도 경제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으며 초 고속으로 전 세계 경제의 모든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며 세계 이곳 저곳에서 금융시장에 실 시간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제의 최적 상황이 오늘의 불 최적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세계적인 대출 붐과 선진각국의 산업구조조정의 틈 바구니에서 형성되었던 30년전 박정희 시대 경제 패러다임이 과연 2000년대에도 통할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능입니다.

마지막으로 1997년 11월, 한국이 외환위기로 알려진 금융공황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을 때 국제 경제학계에서는 두 편의 주목할 만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논문의 내용은 모딜리아니의 차입경영이론이 실제에 접근하는 경제상황에서는 전혀 들어 맞지 않는 다는 것이며, 따라서 기업 경영은 예상치 못하는 외부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강인성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이론적으로 논증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국은 차입경영에 의한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 본 글은 대자보 24호(1999.1.23)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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