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군'은 과연 황해도 일대에 있었을까?

[역사의 재발견] 어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

박병식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8/08/01 [23:16]

한반도 안이 아니라 중국 본토 산동반도에 있었던 듯

▲발해고분군. 말갈족의 무덤양식인 토광묘 떼(왼쪽 부분)와 고구려으 무덤양식인 돌무덤들(오른쪽 부분)이 사이좋게 조성되어 있다.

대방군(帶方郡)의 위치

대방군(帶方郡)은 한무제(漢武帝)가 서기전 108년에 설치한 소위 한사군(漢四郡) 가운데서 낙랑군(樂浪郡) 다음으로 자주 거론되어 온 지역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의 위치와 범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대방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우리가 넘어가야 할 다음 고갯길이어야 한다.

낙랑군이 오늘의 평안남도에 있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 일원에 있었다고 믿어온 이병도씨나 신채호씨 같은 이들까지 포함한 우리 학자들은 대방군의 위치도 황해도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사군이라고 불리어 온 지역이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님은 이미 우리가 밝혀낸 지금, 대방군을 황해도 땅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한사군이란 중국 대륙 안에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그 중심 역할을 해온 낙랑군이 지금의 북경(北京)을 포함한 요동(遼東) 및 요서(遼西) 지역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방군도 낙랑군과 인접한 곳에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낙랑군과 인접한 곳'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말해서 '낙랑군의 서남쪽'이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대방군은 고구려가 낙랑군을 수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탈환한 곳이니만큼 고구려와 낙랑군 사이에 있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고구려는 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집념을 불태우며 부단히 요동의 서남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서기 313년에 낙랑군을 수중에 넣은 이후로 대방군마저 수복하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던 것은 수도를 지금의 평양으로 옮긴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병도·신채호 같은 역사학자는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철석같이 믿어
<위지>에는 "왜나라 사람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살고 있다"고 기록
오늘날 황해도 동남쪽엔 바다 없어…대방군이 한반도 있었다는 주장 빗나가

오늘까지의 역사책에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수복한 이후 곧 이어 손쉽게 대방군도 병합한 것처럼 쓰여 있으나 그것은 사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대방군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한 것은 낙랑군을 함락시킨 직후부터였겠지만 대방군 전역을 손에 넣기는 그리 쉬운 일일 수 없었으리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낙랑군보다 더 서남쪽에 위치한 대방군(帶方郡)은 고구려의 힘이 미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반면 중국측에는 중앙으로부터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 데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낙랑군의 서남쪽에 대방군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막연한 이야기고 구체적으로 대체 어디쯤이란 말인가?"라고 묻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푸는 실마리는 <위지(魏志, 왜인전)>의 다음과 같은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왜인재대방동남대해지중(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倭나라 사람은 帶方의 東南에 있는 큰 바다 가운데에 살고 있다."

우선 여기에 보이는 '대방'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대방군인데 그것이 오늘의 황해도 지방에 있었던 게 아닌 것은, 황해도 동남쪽에는 바다가 없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가!

내가 여기서 새삼 말하지 않더라도 황해도의 동남쪽에는 서울과 경기도가 있고 그 보다 더 동남으로 가면 강원도와 경상북도가 있지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동남쪽으로 더 나가야 비로소 바다가 나타나는 게 사실이 아닌가?

혹 어떤 사람은 "결국 바다가 있는 곳은 황해도로부터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황해도의 동남쪽인 것 사실이 아닌가?"라고 우겨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격다짐이지 정당한 논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표현이 정당화된다면 "서울 남쪽에 바다가 있고 부산 북쪽에 압록강이 있다"는 표현도 용납되어야 할 것인데, 그런 말이 통용될 수 없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아듣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위지(魏志)>의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린 <후한서(後漢書)> 편찬자는 '대방동남대해지중(帶方東南大海之中)'을 '재한동남대해중(在韓東南大海中)'으로 바로잡아 놓았다. 그렇지만 과연 '왜인재대방동남대해지중(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밝혀온 대로 한사군이라는 것이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잘못된 것은 그러한 <위지(魏志)>의 기록이 아니라 한사군이 우리나라 안에 있다고 주장한 학자들의 사고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표현을 뒤집어 말한다면 대방군이 있는 곳은 '왜(倭)나라의 서북쪽'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왜나라가 시작되는 지금의 일본열도 큐슈(九州)로부터 서북쪽으로 직선을 그어보자. 그 끝이 닿는 곳에 우리가 찾는 대방군이 있을 테니까…. 이렇게 하여 다다른 곳은 산동반도(山東半島)이다. 즉 산동반도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왜나라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방군 위치는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 일대'라고 믿어온 학자들에게 '대방군은 산동반도에 있었다'고 말하면 펄쩍 뛰어오르겠지만 그것을 입증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 논거를 하나씩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위지(魏志)>는 '대방군으로부터 가야한국(狗邪韓國)까지의 거리는 7000리(里)다'라고 했다.

가야한국(狗邪韓國)이란 지금의 김해(金海) 지방을 일컫는 말인데 대방군, 즉 지금의 황해도로부터 김해(金海)까지의 거리는 해로(海路)를 굽이굽이 돌아왔다 해도 우리 강산 전체의 길이인 3000리(里)보다 더 길다고 할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대방군의 위치를 황해도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일본학자들은 중국 사절단이 '임진구(臨津口)'에서 출발했다고 가정하고 가야한국까지의 실제 거리는 지금의 척도로 환산해서 약 200리(=약 785.4km)밖에 되지 않는다고 머리를 갸우뚱하고 있다. 일본학자들이 약 200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말하는 출발지점인 '임진구(臨津口)'는 임진강 어구인 한탄강 하구가 아니고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남포(南浦) 부근을 생각한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우리나라의 이병도씨는 "한·위(漢·魏) 시대의 1리는 우리나라가 고래로 쓰고 있는 척도의 1리와 비슷하다"고 하고 있다. 이씨는 그러한 근거로 일본학자 후지다 모도하루(藤田原春)의 저서 <척도종고(尺度綜考)>를 들고 있다.

▲중국 적봉지역에 있는 고조선 때의 성곽 유적지. 이는 고조선의 영토가 만리장성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적봉지역까지 미쳤음을 입증한다.

다시 말하면 이병도씨는 "당시의 중국 척도=현재의 한국 척도 비슷하다"고 했고 따라서 "중국의 7000리=우리의 약 7000리"라고 하는 것이 된다.

만일 이씨가 주장하는 대로 '당시의 중국 척도=현재의 한국 척도와 비슷하다'면:㉠ 대방군으로부터 김해까지 <위지>는 7000리가 된다고 하나 실제로는 황해도부터 김해까지는 오늘날의 우리 2000리 남짓밖에 안 되니 대방군의 위치가 황해도 지방이라는 이씨의 학설은 설 땅을 잃게 되며, ㉡ 우리나라는 삼천리 강산(三千里江山)이 아니라 1만500리 강산이라고 해야 되질 않겠는가?

더구나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이씨가 근거로 인용한 후지다 모도하루(藤田原春)는 "한·위(漢·魏) 시대의 1리는 현재의 일본 척도로 2정(二町)=약 237.6m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다. 이는 다른 일본 학자들의 주장하는 약 4정(四町)=475m의 2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三品彰英 編著 <邪馬台國硏究總攬> 참조).

다시 말해서 후지다 모도하루의 학설에 따른다면 <위지>의 7000리는 약 1663.2km이니 실제 숫자인 785.4km보다 2배 이상 먼 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영토 전체의 길이가 함경북도 최북단부터 제주도 남단까지 포함해도 겨우 1130km 남짓한 것이 실태인데, 후지다 모도하루의 학설로 계산한 1663km는 한반도 전체의 실제 길이보다 1.4배 이상 더 긴 셈이다.

"대방군~가야한국 거리는 7000리"란 기록으로 미뤄 대방군 위치는 중국 본토가 분명

우리 영토는 함경북도~제주도 2000리 남짓…'대방군=황해도' 이병도 학설 설득력 잃어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이병도씨는 어떤 기준으로 '당시의 중국 척도와 현재의 한국 척도가 비슷하다'고 했는지 이해하기 매우 곤란하다.

한편 중국 사전에 의하면 고대 중국의 1리는 576m이며 이것은 일본의 0.1273리(里)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다. 즉 이것에 의거하여 계산한다면 <위지>의 7000리는 4032km가 되는데 이것은 일본 학자들이 말하는 대방군 '임진구'부터 김해까지의 실측수인 785.4km보다 5배 이상이나 많은 숫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들을 비교하기 쉽게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사전

1리=약 576m
7000리
=4032km(고대 중국 척도)

일본학자(日本學者)(一般)

1리=약 475m
7000리
=3325km[한(漢)·위(魏) 시대 척도]

후지다 모도하루

1리)=약 237m
7000=1659km[한(漢)·위(魏) 시대 척도]

이병도

7000리
=1659km[한(漢)·위(魏) 척도=고래(古來)부터 한국(韓國) 척도]
대방군을 황해도로 볼 때 김해까지 실측(實測)
=785km[일본 <邪馬台國硏究 총람(邪馬台國硏究 總攬)> 인용].

이와 같이 학자들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서야 우리들은 어느 척도를 따라야 할지 난처하기만 하다. 다만 어느 것을 택해보아도 대방군의 위치가 황해도 지방일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치 않은가?

즉 다시 말해서, <위지>의 7000리라는 숫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어느 학자의 학설을 따라도 대방군의 위치는 중국 본토 안에서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럴 경우 또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학설 중의 '어느 것을 택해야 위(魏)와 한(漢)나라 때의 옳은 척도가 되느냐'이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후한서(後漢書)>의 척도를 인용하는 것이 상책임을 깨닫게 된다.

② <후한서>에는 '낙랑군은 낙양(洛陽)의 동북 500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에는 '낙랑군은 유주(幽州)에 속하며 옛 조선국(朝鮮國)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주는 지금의 요동반도로부터 서쪽, 북경(北京)을 포함하는 요령성(遼寧省) 지역을 뜻한다. 즉 이 기록은 낙양(洛陽)으로 동북(東北)으로 5000리 떨어진 곳에 지금의 북경(北京)이 있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5000리를 측정한 척도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위지>의 7000리가 실제로 얼마나 먼 거리인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자면 낙양으로부터 북경까지의 거리를 실측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에는 차선책으로 지도(地圖)를 이용하는 방법도 그리 빗나간 방법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이 있다. 그 가운데서 <삼국시기전도(三國時期全圖)>를 펼쳐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직선거리를 재어 보면 약 3cm임을 알 수 있다. 즉 <한대(漢代)>의 5000리는 이 지도의 축척으로 약 3cm에 해당되니, 1cm가 약 1666리인 셈이다. 따라서 <위지>의 7000리는 이 지도의 축척으로 4.20cm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 김해로부터 서북쪽으로 4.20cm 반경(半徑)의 호(弧)를 그려 그 끝이 닿는 곳을 살펴보면 대방군의 위치가 어렴풋이나마 떠오르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본 결과 4.20cm의 끝이 가닿는 곳의 북쪽은 옛날의 노룡(盧龍) 부근이며, 서쪽으로부터 남으로는 산동반도의 황하(黃河) 하구(河口) 지역이다. 다만 이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일은 중국 사절단이 탄 배가 '한국 해안을 따라서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항해했다'는 <위지>의 기사이다. 즉 저들은 해상에서의 조난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한국 해안이 가까워 보이는 해상을 따라 항해한 것이다.

따라서 지도상의 측량은 직선을 긋기는 하되 될 수 있는 한 중국 땅과 우리나라 해안이 가까운 곳을 잇는 선을 연결하도록 하여야 실제의 항해거리에 가까운 수치가 얻어질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몇 백리 정도의 차이를 따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점을 고려하면, 대방군이 내가 말하는 산동반도라고 할 때 출항지점은 동래(東萊)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동래는 옛 이름을 래주(萊州)라 하고, 지금은 액현(掖縣)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여기가 바로 서기 660년 신라를 도우려는 당나라 대군이 배를 타고 출항한 곳이기 때문이다.

즉 산동반도로부터 우리나라로 향하는 배는 이곳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 아니겠는가? 그곳을 기점으로 하여, 황해도 첨단이 보이는 지점까지 동쪽으로 온 다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동쪽으로 항진(航進)하여 김해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저들이 '한국 해안을 따라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항진(航進)하여 김해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생생하게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 상고사 흔적이 발견되는 중국 갈석산.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인터넷 신문사 '브레이크뉴스' 발전에 쓰여집니다.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