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어느 공동체나 힘들게 하는 염소 같은 사람 반드시 있어

우리는 과연 양 과인가요 아니면 염소과인가요?

김덕권 시인 | 기사입력 2020/07/29 [11:25]

▲ 김덕권 시인.     ©브레이크뉴스

요즘 추미애 법무장관의 검찰개혁(안)이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7일에는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 ‘검찰총장 지휘권 폐지하고 그 지휘권을 각 권역 고검장에 분산하겠다.’는 개혁안이 전격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악마(惡魔)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天使)가 악마가 되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선(善)의 타락, 즉 선이 만들 수도 있는 어두운 그늘이 악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느 특정인이나 어떤 사태를 보고 선과 악으로 함부로 규정하는 태도는 여간 섣부르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현실속의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갖 사태를 두고 대충이라도 선과악의 그 경계를 가늠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부정한 정권의 거악에 맞서는 정의의 투사로 보였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제 와서 보면 그의 모든 행적은 놀랍게도 오로지 검찰조직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것임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추미애 장관과 검찰총장 중, 누가 양(羊)이고 누가 염소일까요? 어떤 분이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의 이야기를 전해 준 것이 있어 인용합니다.

 

『우리를 안내해 주신 분은 칠십이 넘으셨던 분 이셨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가던 버스 안에서 차를 잠깐 세우고 갑자기 그 분이 밖을 보라고 해서 보았더니 완만한 경사가 진들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牧歌的)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때 그 분이 손으로 가리키시는 곳을 보니 염소가 양 가운데 섞여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고, 양들은 염소를 피해서 이리 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그분의 설명에 따르면, 양들은 본성이 게으르고 움직이기를 싫어해서 배가 고파도 잘 움직이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염소는 양과는 정 반대의 성질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닥치는 대로 뿔로 받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양들 속에 염소를 석어 놓는다고 하셨다.

 

양들을 받으며 돌아다니는 염소를 피해서 도망 다니다 보면, 그 곳에 새 풀이 있어서 양들이 양식으로 삼을 뿐 아니라 자연히 운동도 하게 되어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들을 받고 돌아다니는 염소가 양에게 귀찮고 원수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고마운 존재인가?’ 라고 물으셨다.

 

우리는 삶 안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을 염소 과에 속한다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는 가? 또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시어머니만 아니면, 시누이만 아니면, 남편만 아니면, 우리 단체에 누구만 없으면, 직장의 누구만 없으면 우리는 행복할 텐데’ 라는 말을 자주한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힘들게 하는 염소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래서 ‘저 사람만 없으면 우리 공동체는 잘 되어갈 텐데’ 라는 말들을 많이 하고 또 듣는다. 나는 늘 양과에 속하는 사람인가? 누군가는 나를 염소 과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는가? 염소 같은 그들로 인해 인내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며, 이해하는 마음이 되지는 않는가?

 

그러면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은 나에게 정녕 미워하고 섭섭하게 생각할 염소 과인가? 나로 하여금 덕을 쌓아가게 하는 동기를 주지는 않았는가? 내 영혼생명에 도움을 주는 은인이 되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양과 염소를 가를 수 없다. 그 누구는 ‘양과 다 염소 과이다.’ 라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양과에 속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소 과에 속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사랑하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수용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양 과와 염소과로 이루어가며 서로에게 성숙한 인격을 위해 성장하도록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양 과인가요 아니면 염소과인가요? ‘사람의 성품(性品)이 정(靜)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動)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성품의 원리’를 드러내고 있는 곳이지요. 유교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대개 ‘이(理)에서 받은 것은 순선무악(純善無惡), 기(氣)에서 받은 것은 유선유악(有善有惡)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그 단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본래의 ‘무선무악’으로부터 현실 인과가 적용되는 ‘능선능악(能善能惡)’에 이르는, 보다 너른 성품의 폭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의 성품에 어찌 동정과 선악만 있을 것인가요?

 

지금 펼쳐지는 추미애 법무장관의 검찰개혁도 다 이 나라를 일등국가로 만들기 위한 몸부림일 것입니다. 우리 ‘나는 양인가 염소인가’를 편 가르기 이전에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치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