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일생을 한국 문화 일본 소개에 바친 나의 아버지 김소운(金素雲)

선친이 수천 편의 우리 민요와 시, 소설을 일문으로 번역, 출간

김인범-김소운의 장남 | 기사입력 2020/07/11 [10:37]

▲ 김소운 수필가. 이 사진은 고 임응식 사진작가가 촬영한 사진으로, 임응식아카이브에 저작권이 있는 작품사진임을 밝힙니다.

시인이며 수필가 였던 김소운(金素雲).1920년 부산항. 당시 13세의 소년이었던 선친 김소운(金素雲)은 오사카로 출항하는 화물선에 홀로 몸을 실었다. 뱃삯이 없었던 선친은 양담배 한 보루를 선장에게 선물하고 무임승선을 할 수 있었다.

 

선친의 조부였고 내게는 증조부가 되는 김치몽(金致夢)은 구한말 통정대부를 지내다가 1880년대 초에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낙향하셨다. 낙향한 증조부는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건너온 서양 선교사와 우연한 기회에 조우하게 되었고 이 양인(洋人)으로부터 필담(筆談)을 통해 기독교 사상을 접한 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유교를 숭상해온 반가(班家)에서, 그것도 당상관 벼슬까지 지내셨던 증조부의 기독교 신앙은 가문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얼마 후 증조부는 문중에서 축출되었다. 가솔들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정착한 증조부는 1896년 작은 교회 하나를 세웠고, 이것이 현재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에 자리잡은 제일영도교회의 시작이었다.

 

내 조부 김옥현(金玉顯)은 구한말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의 소장관리로서 일본에 국권이 거의 강탈당한 을사늑약 후에도 허울뿐인 나라의 패망을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하다가 1909년 어느 몽매한 동포의 손에 암살되었다. 선친의 나이 2살 때의 일이었다. 이 사건 직후 조모는 고부간의 갈등을 견디지 못해 멀리 러시아로 떠나버렸고 선친은 천애고아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 연고도 친척도 없는 일본 땅에 도착한 선친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닥치는대로 ‘넝마주이 식' 공부를 하였고, 17세가 되던 1924년에 제국통신 경성지사의 직원이 되어 귀국하였다. 이후 선친은 조선일보 부산지사 통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29년부터 2년 동안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전국 각지에 있는 독자들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의 구전민요와 동요들을 채집하였다. 이 민요와 동요들은 얼마 후 일본 제일서방(第一書房)에서 『언문조선구전민요집 (諺文朝鮮口傳民謠集)』(1933)으로 출판되었는데, 수록된 민요와 동요가 3천여 수, 680면의 방대한 분량이었다. 일본 <가나>가 한 자도 들어있지 않은, 순 한글본의 『언문조선구전민요집 (諺文朝鮮口傳 民謠集)』에 제일서방(第一書房)의 사장은 서문만이라도 일본어로 넣자고 간청하였으나, 선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고 한다. 

 

▲수필가 김소운의 저서인 '목근통신'.     ©브레이크뉴스

제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는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선생은 외로운 식민지 문학청년인 선친을 일본 문단에 소개하고 선친의 문학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은인(恩人)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당시 동경제국대학,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함께 일본 문화의 3대 상징 중 하나였다는 이와나미(岩波) 출판사는 『조선동요선』(1933), 『조선민요선』(1939), 『조선시집』(1943)을 이와나미문고 (岩波文庫)로 출판하여 선친이 번역한 조선의 문화와 얼을 일본에 알리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선친은 젊은 시절부터 한글과 일본어로 꾸준히 수필을 써서 한일 양국에서 수십 권의 수필집이 출간되었다. 선친의 번역작품과 수필들의 근저에는 향토와 조국의 문화에 대한 애정이 깔려있었고 인간에 대한 엄한 사랑이 담겨있었다. 

 

1952년 아사히신문 기자와 인터뷰한 ‘설화사건(舌禍事件)'으로 13년간 일본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선친에게 당시 상당히 규모가 컸던 휘문출판사는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의 일한사전 편집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선친은 “일한사전은 일본어를 배우는 한국인을 위한 사전이니 이는 일본 문화 수입을 돕는 것”이라며 사양하였고, 그 대신 한일사전의 편찬을 맡아 1967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판매부수에 비례하여 인세(印稅)를 받는 조건하에서 일한사전의 편집을 맡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수십 배 수익이 많았을 것이다. 그 당시 대다수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친도 항상 경제적으로 곤궁하였다. 한류(韓流)도 ‘욘사마'도 없었던 40년 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일본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친은 초지일관 ‘문화수출상(文化輸出商)'의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온후관대'와는 거리가 멀고 항상 근엄하고 격정적 성격으로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선친에게 친구보다는 적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친과 가까이 지내던 분들로는 언론인 홍종인 선생, 시인 구상 선생, 작가 박연희 씨, 제자 격인 수필가 박연구 씨 등이 있었다. “자네 선친보다 내가 서너 살 연상이었는데, 한번도 소운에게 반말을 썼던 적이 없어. 남들은 나를 호랑이라 하는데 자네 선친 앞에서는 언제나 움츠러지더란 말이야, 허허.” 성격이 괄괄하고 호방하셨던 언론계의 거목 홍종인 선생이 선친의 빈소에서 내게 들려 준 이야기였다. 

 

선친이 수천 편의 우리 민요와 시, 소설을 일문으로 번역, 출간하면서 조국으로부터 어떠한 도움과 지원을 받은 적이 없었다. 1977년의 한국번역문학상과 타계하기 1년 전인 1980년에 받은 은관문화훈장이 조국에서 선친에게 인정해 준 노고 대가의 전부였다.

 

재작년 여름이었던가, 이 나라 정권은 친일반민족인사 명단에 선친의 이름 석자를 올렸다. 2차대전 중 언론에 발표되었던 선친의 글 몇 편을 빌미로....... 민족을 위해 쥐뿔도 한 일이 없는 민족주의자들에게 감히 한 말씀 드리고 싶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 하는 우(愚)를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 김인범 (주)CMI 고문.   ©브레이크뉴스

대학을 다닐 무렵 선친에게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해방 직후 신문 사회면에는 거의 매일 “벚나무 애국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어느 지역에 사는 아무개가 일본의 국화(國花)인 벚나무 몇 그루를 베었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그 기사 옆에는 창경원 밤 벚꽃놀이에 10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는 소식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14년 전에 타계하신 내 모친 김한림과 3년 전 세상을 떠난 여동생 김윤은 옥고를 치러가며 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주정권 수립에 밑거름이 되었다. 작년 말 대한민국의 민주화기념 사업회에서는 모친을 추모하는 책 하나를 발간해 주었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노릇이다.        

 

<후기>이 글은 <대산문화/2007년 가을호>에 기고. 게재된 글이며, 게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친은 친일반민족인사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일본의 많은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한 조치였다고, 일본 후지TV의 하마다 이사가 전해 주었다. agroexim@naver.com

 

*필자.김인범.

김소운의 장남. (주)CMI 고문. 번역문학가.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