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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바라밀을 실천하실 때,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개신교 목사 열린선원 강의…불교선원과 연합으로 크리스마스 축하행사

손원영 목사 | 기사입력 2019/12/11 [09:48]

지난 2018년 12월10일, 열린선원과 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가 연합으로 크리스마스 축하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에서는 손원영 목사(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가 성탄절을 축하하는 연설을 했다. 다음은 이날 발언의 전문이다.(편집자 주)

 

오늘 성탄절 축하행사를 열린선원에서 저희 종교대화가나안교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할렐루야! 제 평생 처음으로 절에 와서 성탄절 축하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지 모르겠습니다. 초대해 주신 법현 스님과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스님한테 절에서 성탄절 행사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처음에 듣고 참 놀라웠습니다. 교회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님 오신 것을 축하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역시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더 아량이 많고 성숙한 종교가 아닌가 싶어 큰 부러움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법현 스님에게서 열린선원이 올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미 13 년 전부터 매년 이맘 때 크리스마스 파티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크게 놀랐습니다. 역시 불교구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선원에서 강연(설교)하는 손원영 목사.     ©브레이크뉴스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혹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부근에 있는 작은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다가 작년 초 해직된 손원영(목사)입니다. 지난 2016년 1월 중순 경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개운사라는 절에 한 중년의 개신교 남자 신자가 밤늦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불상은 우상이라면서 모두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비구니스님인 주지스님에게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면서 위협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스님은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한 기독교 신자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또 불자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운사 스님과 또 불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제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진정성이 떨어지니까, 훼손된 불당을 회복하기 위한 모금을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제 모금활동을 지켜본 저희 대학당국에서는 저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였고, 저는 여러 번 재판을 받은 뒤 결국 작년 2017년 2월 파면처분이 내려졌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저의 파면사건을 안타까워하며 응원해 줘서 민사소송 1심에서 승소하였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은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재판에서 꼭 이겨서 저희 행동이 틀린 행동이 아니라 옳은 일이었다는 것이 법적으로 증명되고, 또 다시는 개신교인들에 의해 불교사찰이 훼손되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해직되고 나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까 마음이 많이 허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저는 그래도 목사로서 무엇을 할까 하다가 ‘가나안교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안나가’의 거꾸로 의미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이런저런 일로 문제가 많으니까 교회에 안나가는 신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컬어 ‘가나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본래 가나안은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과 같은 ‘낙토’를 의미합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국토입니다. 말하자면 이상향이죠. 그런데 그 가나안이 이제 안나가란 의미까지 갖게 되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암튼, 저는 가나안신자들에게 비록 교회에는 더 이상 안 나가지만 가끔이라도 만나서 하나님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계속 걸어 가자라는 취지로 가나안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뒤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것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재미있게도 경복궁 근처에 있는 ‘마지’라는 한 사찰음식점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 식당에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이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는 가나안 신자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미워하는데, 오히려 불교인이 저희를 환대하니 말이죠. 정말로 한국불교는 정말로 대단한 종교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그 제안에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마지라는 이름을 붙여 ‘마지가나안교회’를 그곳에서 처음으로 2017년 6월 셋째주일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불교와 인연 때문에 학교에서 해직되고 가나안교회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곳에서는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이웃종교들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하는 가나안교회’를 하면 좋겠다구요. 그래서 매월 셋째주 일요일 오후에 ‘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그 인연으로 저희 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와 열린선원이 이렇게 함께 만나게 된 것입니다. 모쪼록 오늘 우리의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아져서 한국사회에 종교 갈등이 줄어들고, 또 종교가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 땅이 더욱 아름다운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제게 크리스마스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오늘 무슨 말씀을 전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평소 제가 생각하던 것을 좀 나누기로 하고, 설교제목을 “예수보살과 육바라밀”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대부분이 불교신자이니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목사는 본래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니 예수 이야기만 한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도 선교를 해야 하니까요?(하하) 그리고 제가 불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에 혹 잘못이 있다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는 ‘보살사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을 때까지 모두가 다 고통에서 해방되어 부처가 될 때까지 나 스스로는 부처가 되는 길을 포기하며 중생의 해탈을 돕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입니다. 말하자면 보살은 위로는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자입니다. 한마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존재입니다. 그가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보살’입니다. 예수 보살! 따라서 오늘 불자와 기독교자 함께 공동으로 예수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는 예수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훌륭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참 인간의 궁극적인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자가 되었든 아니면 기독자가 되었던 예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가 보살인지 그 이유를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육바라밀의 수행을 어떻게 철저하게 실천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자하듯이, 육바라밀은 보살도의 대표적인 수행법입니다. 물론 후에 육바라밀을 더욱 발전시켜 화엄경에서는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 등의 52위의 보살 수행계위를 말하지만, 어쨌든 육바라밀이 그 핵심을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여기 오신 기독교인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간단히 더 첨언한다면, 바라밀은 ‘피안’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끝내고 해탈의 세계 저 너머로 건너가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바라밀은 과학적인 용어로 한다면, ‘임계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을 적당히 해서는 안 되고 임계점에 이르러야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넘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임계점을 넘어가야 합니다. 또 물이 수증기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라밀입니다. 그러니까 보시를 예로 든다면, 이웃을 돕는 것을 적당히 하면 안 되고 임계점을 넘어 끝까지 도와야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만 하면 안 되고 보시바라밀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정말로 위대한 육마라밀 수행을 철저히 완수하여 모든 보살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선 육바라밀의 첫 번째 수행덕목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통 보시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전적으로 돕는 ‘재시’(財施)나, 오늘 설교하는 저나 혹은 학교의 교사들처럼 진리를 가르치는 ‘법시’(法施), 그리고 요즈음 의사나 상담사 혹은 사회복지사들처럼 공포를 제거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선에 대해 가르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 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6:3-4) 그런데 여러분, 최고의 자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상대가 갚을 수 없도록 하는 선행입니다. 말하자면 남이 모르게 하거나 또 알더라도 너무나 커서 아예 갚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선행이 최고의 선행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선행 중에 최고의 선행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많은 분들에게 예수께서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게 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은 알지만, 여기계신 불자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도 다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예수의 십자가는 설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예수께서 죽은 것임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되갚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인류의 죄를 모두 다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위대한 보시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요즈음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누가 저 대신 재판을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큰 죄가 아닌 것에도 마음 졸이고 걱정하는데, 하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저희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짊어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우리를 친구삼아 주시고 또 그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보시를 한 것입니다. 아니 보시바라밀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시를 하더라도 예수처럼 그렇게 합시다.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둘째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지키고 항상 자기반성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모두 613개의 계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계율을 크게 두 개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눅10:27-28) 예수의 삶은 이 두 계명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지계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예수 자신도 십자가를 지기 두려웠지만, 그는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기로 순종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계율에 철저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통해 그런 삶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에게 못을 박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눅23:34) 그리고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시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계율을 십자가에서 다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지계바라밀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위대한 보살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합시다. 

 

셋째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은 고난을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뭐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을 다 참고 인내하였으니 말입니다. 특히 제 경험을 보니까, 십자가와 같은 육신의 고통 못지않게 힘든 고통은 가까운 친구들의 배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을 견디는 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해직되고 재판을 받는데,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교 측에서 제가 나쁜 놈이라는 증인으로 제 동료교수들과 제 제자들을 회유하여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끼고 사랑했던 후배 교수들과 제자들이 저에게 칼을 든 형국이었습니다. 그것을 참으려니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 팔려서 가장 끔직한 형벌인 십자가형에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3년씩이나 따라 다녔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가 체포되자 스승을 부인하며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원망을 돌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인욕바라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서 그들을 위해 생선을 구워주고 아침밥을 손수 차려 주면서 옛 정을 나눴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살행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억울한 일이 닥칠 때 끝까지 인내하며 참읍시다. 그럴 때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이 열립니다. 

 

넷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은 보살로서의 수행을 힘써 닦으며 꾸준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정말로 정진 바라밀의 모범이십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오해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일구는 일에 결코 쉬지를 않았습니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5)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쉬지 않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들을 치료해 주고, 또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쉽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공부할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외워든 독일어 단어 세 가지가 있습니다. “langsam, stätig, und gründlich”입니다. 즉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철저하게!” 말하자면 이 세 가지가 정진바라밀의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는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정진수행에 있어서 천천히, 꾸준히, 그러나 철저하게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정진바라밀의 모범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정진의 이 세 원칙만 잘 지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훌륭한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켜 올바른 지혜가 나타나게 하는 수단인 선정(禪定)을 닦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한다면 ‘기도’ 혹은 ‘관상’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되고자 한다면,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결코 보살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는 과정이요, 그래서 그 빈 공간에 절대자를 모시는 과정입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불교의 공성(空性)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누구보다 선정바라밀을 잘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는 시간 나는 대로 고요하게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또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을 신학에서는 ‘동일본질’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기도를 통해 깨달은 모범이십니다. 그런 존재를 일컬어 정교회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 곧 ‘테오시스’(theosis/deification/神化)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기독교인의 꿈입니다. 신처럼 우리의 존재가 성화되는 것! 예수께서는 또한 선정에 들기 위한 수련법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 수행을 통해 선정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처럼 선정을 실천합시다. 아니 ‘선정바라밀’을 철저하게 수행합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는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 즉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죠. 대승불교에서는 아마 최고의 깨달음으로 ‘공’(空)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공생애 기간 동안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나라 비밀을 가르치기 위해 유대지도자들과는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고, 또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비유를 써 가면서 아주 쉽게 지혜바라밀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그 나라는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가 아니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17:21)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inside)’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천국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들이 모여 친교하며 사랑을 나누는 그 사이에(among/between) 천국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는 이 자리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그래서 모두 열반의 세계에 이르도록 우리 모두 보살행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육바라밀을 잘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육바라밀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 때 필요한 것이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살되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실 때,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과 또 십자가의 삶을 교훈삼아 우리도 육바라밀을 잘 실천하게 하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날 홀연히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고 모두 열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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