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고 고산에 들어섰다. 고산은 조선시대 고산현(군)을 말한다. ➀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➁동학농민혁명군으로 버티기 위해 ➂정적에 밀려 떠돌다 ➃나라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화산면 승치리 되재성당 ▵대둔산 동학농민혁명군 항쟁전적비 ▵고산 읍내리 서익 유적비 긴 이야기를 여기선 줄인다. 마지막 부분 ‘나라를 뒤집기 위해 모인 무리’ 이 이야기는 자료가 부족해 세세한 설명이 어려운데, 서기1551년(명종 6) 약 470년 전 전라도 정언각(鄭彦慤) 관찰사가 고산현 한둔산(漢芚山) 웅거 도적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본도 고산현 한둔산에 ‘유신난적(維新亂賊)’들이 불량배를 불러 모아 무리를 이뤘는데, 그 수가 60~70인입니다.
그들은 당상관 의장(儀章)을 갖추고 날뛰며 도적질을 하므로, 즉시 도내 열읍 숨을 만한 모든 산림을 비밀리에 수색하여 잡게 하였습니다. 여러 도의 도적들이 통행할만한 곳에도 모두 경비를 설치하고, 특별히 조치하여 ‘체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 주동 인물은 임송(林松)ㆍ손석동(孫石同)ㆍ김언동(金彦同)ㆍ김헌동(金獻同)이니 각자 집안 족보를 펼쳐보기 바란다. ‘유신난적’이 무언가. 원문에 “유유신난적여얼(有惟新亂賊餘孽)이라 했으니, ‘얼’로 보아 이들은 잔당이다. ‘유신’은 ‘새로움을 꾀함’이니 당시 부적절한 체제를 무너뜨리자는 개혁 세대들임이 확실하다.
조정은 소윤(小尹) 윤원형이 판을 쳤다. 불만 많은 선비들이 조정의 꼬락서니를 보다보다 못해 일어났으며, 숨고 견디기 좋은 골로 고산을 택했음이 확실하다. 대둔산은 워낙 크고 넓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대둔산은 전주‧공주에서 멀고 안심사(安心寺)‧대둔사(大芚寺)가 있어 활동하는데 요긴한 지역이었다. 대둔사에서 쌀 씻은 뜨물이 인내(현 양촌)까지 흘렀다함은 중들만의 식사준비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금당리 대둔사 터는 발굴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운주면민은 역사에 밝은 면장을 맞아 탄연(炭峴), 배재를 문화광장에 내 세워야한다. 혁명군에게는 곶감과 대추가 최고 양식이었다. 곶감(대추) 축제에는 이 이야기를 띄워야 한다. 지금은 총칼 들고 대둔산에 몸 피할 군중들이 없게 선인께서 외치던 ‘유신’이 이루어진 편이다.
이 지역민은 ‘왜 내가 고산 사나’를 확실히 알고 만세를 불러야 한다. 당시 세상에서 윤원형‧ 이기를 2흉(凶), 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정언각은 3간(奸)이라 불렀다. 정언각(1498~1556) 모함으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고, 이런 세상에서 고산은 최대 인권지역이었다. 8월 19일자 완주군 인사이동 명단을 보니 역사에 밝은 인재가 거의 다 승진했다. 금산은 진 싸움을 연구하는데 완주는 이현 이긴 싸움이 멀리 보인다.
*필자 : 이 승 철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