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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78) 반일 종족주의와 비운의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8/17 [21:43]

▲ 1926년 7월 30일 동경 아사히 신문 가네코 후미코 옥중 사망 기사 (출처google)        © 이일영 칼럼니스트

 

반일 종족주의라는 낙성대경제연구소와 이승만학당이라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이념을 지향하는 단체에 소속된 극우 학자들이 집필한 책이 주요 온라인 서점의 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뉴스가 요란하다.

 

책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를 지낸 이영훈 교수와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동국대 김낙년 교수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이승만 학당 교사로 있는 김용삼과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이승만 학당 교사로 있는 주익종과 그리고 교토대학에서 박사학위 이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정안기와 같은 5명의 공저이다.

 

책은 1부(종족주의의 기억) 2부(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3부(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로 나뉘어 쓰였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치욕적인 일제강점기의 경제 수탈 공출과 노동력 착취 징용의 강제 동원과 위안부 피해와 강제 동원에 대하여 이를 모두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지를 폈다.

 

그중 대표적인 저자로 소개되는 이영훈 교수는 책의 프롤로그 (거짓말의 나라)와 에필로그 (반일 종족주의의 업보)를 썼다. 이어 본문 1부에 (황당무계-아리랑) 이라는 본문을 썼다. 이는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12권 158쪽 애 나오는 오늘날 러시아 영토로 일본이 지시마열도(千島列島)로 표기하는 쿠릴 열도 남단 4개 섬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징용자의 학살에 대한 소설가의 표현이 허구라는 것이다. 이어 소설가 조정래가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혀 이와 같은 잔혹한 허구의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어 이영훈 교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우리나라 영토사와 민족문제의 사회사에 많은 실체를 정립한 신용하 교수가 이와 같은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이라는 토지조사 사업의 폭력성을 주장하면서 허구적인 수탈의 역사 인식이 생겨나 국사 교과서의 40% 수탈설이 게재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당시 일제의 토지 측량사들이 맹수의 보호를 위하여 피스톨을 소지한 사실을 이와 같은 폭력적인 수탈로 포장했다는 주장이다.

 

이어 책 2부(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에서 발표한 (백두산 신화의 내막)과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과 같은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면 정녕 이 나라 학자가 맞는지 착잡하다.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다양성을 감안하여 인내를 가지고 읽어가면서도 착잡한 느낌이 끝없이 차오른다.

 

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에서 이영훈 교수가 발표한 (우리 안의 위안부)와 (공창제의 성립과 문화)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읽어가면서 우리 젊은 청소년들의 곧은 모습이 떠올랐다.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그릇된 역사의 성찰을 외치며 일본의 자유경제질서를 벗어난 경제침략에 분노하는 젊은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위안을 얻어 죽어버린 지성의 허상을 지운다.

 

이와 같은 책을 살피며 실로 서글프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항일운동가 박열(朴烈1902~1974)과 비운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 옥중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본명이 박준식(朴準植)인 박열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3·1운동에 가담하여 격문을 배포한 행동으로 경성고등보통 학교에서 퇴학당하면서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가쿠엔 학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무정부주의 운동 그룹에 가담하여 필명 박열(朴烈)로 활동하면서 1921년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당시 일본의 주요한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와 교유하였다.

 

이와 같은 박열은 1922년 7월니이카다(新潟)현 탄광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이 살해된 사건에 흑도회 명의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항의투쟁을 벌였다. 이어 시나노가와信濃川) 발전소 공사 등지에서 한국인 노동자 수십 명의 살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시나노가와 도망 노동자 살해사건(信濃川逃亡労働者殺害事件)이다. 당시 묻혀버린 사건이 요미우리신문의 7 월 29일 자 기사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면서 8월 당국의 강력한 조사를 촉구하는 운동을 벌인 인물이 박열(朴烈) 이었다.

 

▲ 비운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의 묘 사진 출처 - https://sunyoudo.blog.me/60030065963     © 이일영 칼럼니스트


 

여기서 살펴지는 이야기가 비운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에 대한 이야기다. 가네코 후미코는 무정부주의 운동 그룹에서 박열(朴烈)을 만났다. 이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와 같은 가네코 후미코는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집을 버린 아버지에 이어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어머니 곁에서 자라며 초등학교에 입학마저 못하였다.

 

이후 어머니가 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서 9살 나이에 먼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이는 아버지 여동생 즉 고모가 한국의 오늘날 세종 자치시 부강면(충북 청원군 부용면)에 일본인 남편을 따라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친할머니가 한국에 가게 되어 오갈 곳이 없었던 그는 할머니를 따라 한국에 왔던 것이다. 1912년이었다. 이후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너무나 친근한 한국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마다 일본인 할머니는 고막이 파손되는 학대를 일삼았다. 이후 1919년 후미코는 3.1독립 운동을 지켜보게 되면서 자신의 처지와 조선인의 입장을 견주어보는 깊은 공감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3,1 독립운동이 한반도를 뒤흔든 해에 16세였던 후미코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1920년 동경으로 상경한 그녀는 외삼촌 집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잠시 영어공부를 하기도 하였던 그는 가루비누 장사에서부터 갖은 일을 경험하다가 1921년 11월, 유라쿠초(有楽町)에 소재한 이와사키오뎅집(岩崎おでん屋)에 취직하였다. 바로 이곳이 일본의 주요한 사회주의자들이 운집하는 곳이었다. 당시 후미코는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서적을 읽게 되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 식당에 두고 간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 청년)을 읽다가 한 편의 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바로 박열(朴烈)이 발표한 (개 새끼)라는 다음과 같은 시였다. 나는 개 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 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 새끼로소이다./ (시. 개 새끼 전문)

 

이후 1922 년 3월 운명처럼 시의 주인공 박열을 만났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져 두 달 후인 5월 동거를 시작하였다. 이후 후미코는 박열이 창립한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많은 활동을 하게 되면서 다음 해 1923년 4월 한국인 14명과 일본인 5명이 가담하여 항일 단체 불령사(不逞社)를 발족하였다.

 

이후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關東)의 시즈오카(靜罔) 야마나시(山梨) 지방에서 40여만 명의 사망 피해를 입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지진 다음날 전쟁과 같은 혼란 속에 출범한 제2차 야마모토(山本) 내각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극도로 혼란한 사태 속에 한국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는다는 유언비어와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조작하여 퍼뜨렸다. 이에 일본인들이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관리들과 합세하여 한국인을 무조건 체포 학살하였다. 6천여 명의 무고한 한국인이 학살당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항일단체 불령사(不逞社)는 주요한 목표가 되어 단원 전원이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검찰은 이와 같은 항일단체 불령사(不逞社)가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으로 날조하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음모를 간파한 박열은 불령사 회의에서 폭탄 반입을 거론한 사실을 들어 자신 혼자서 구상한 계획으로 모든 단원은 죄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모든 단원을 석방하면서 동거 중이었던 후미코는 공범으로 엮어 재판을 진행하였다.

 

이에 후미코는 박열이 죽는다면 자신이 살아야 할 의미가 없음을 주장하며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여 옥중에서 부부가 되었다. 마침내 1926년 3월 25일 일본 법원은 일왕 암살의 기도 혐의로 박열과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어 4월 5일 두 사람은 사면에 의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당시 두 사람은 박열은 치바(千葉) 형무소 그리고 후미코는 도시키(栃木) 형무소로 옮겨져 7월 23일 감옥에서 후미코가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은 후미코의 자살로 발표하였으나, 의문의 죽음은 미궁의 역사로 남고 말았다.

 

당시 박열의 형제가 박열의 요청으로 후미코의 유해를 인수받아 문경에 안장하였다. 이후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장되어 함께 안장되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지난 2017년 이준익 감독이 제작한 (박열)이라는 영화로 개봉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후 국가보훈처는 2018년 11월 제79회 순국선열의 날에 가네코 후미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여기서 짚고 가는 내용이 박열과 후미코 부부가 재판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 한복을 요구한 사실이다. 이에 당시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던 조헌영(趙憲泳1900-1988)이 우리의 전통 한복을 차입하여 두 사람은 우리의 옷을 입고 재판을 받았던 사실이다. 이와 같은 조헌영은 광복 후에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 한의학 발전에 헌신한 인물로 통속한의학通俗漢醫學)을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한의학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1988년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조현영이 우리가 승무와 낙화와 같은 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다. 당시 이와 같은 박열과 후미코가 우리는 조선인 부부이니 조선말로 재판을 요청한 이야기는 아직도 역사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다. 이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천황의 사면장을 받아들고 이를 찢어버린 후미코의 많은 이야기는 옥중에서 기록한 이야기를 묶어 출판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으로 남아있다.

 

박열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 감옥에서 22년 2개월의 투옥 끝에 석방되어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을 맡았다. 이어 1947년 2월 15일 동경 청년회관에서 이북 진남포 태생의 장의숙(張義淑)과 결혼하였으며 1949년 귀국하였으나 다음 해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어 1974년 세상을 떠났다.

 

지난 36년간 일제 침탈의 역사 속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이야기가 많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본의 의혹과 문제에 대한 접근은 제쳐두고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국에서의 꼬투리를 찾아 쌍불을 켜드는 지성이 가엾다. 책에서 주장하는 주요한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학문적인 깊이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그릇된 역사인식이 무한하게 밀려드는 까닭이다.

 

일개 갤러리 관장인 필자가 조목조목 반박할 생각도 있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처지라 생업을 내려놓고 거기에 매달릴 가치를 솔직히 느끼지 못한다. 간악한 일본의 음모에 23살의 꽃다운 나이로 숨져간 비운의 일본 여인 후미코가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생활하며 3.1운동의 신성한 현장을 목격하였던 느낌에 귀를 기울여 겸허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기 바란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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