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비익연리-첫사랑 이야기

‘연리지’는 원래《후한서(後漢書)》<채옹전(蔡邕傳)>에 나와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뜻하는 말

김덕권 시인 | 기사입력 2019/07/15 [11:03]

▲ 김덕권 시인     ©브레이크뉴스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사자성어를 아시는지요? 당대(唐代)의 시인이며 정치가인 백거이(白居易 樂天 : 772~846)의 <장한가(長恨歌)>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백거이는 이태백(李伯), 두보(杜甫), 한유(韓愈)와 나란히 꼽히는 당시(唐詩)의 거장이지요.

 

‘장한가’는 사랑하던 양귀비(楊貴妃)를 잃은 당 현종이 연인(戀人)을 그리는 모습에서 모티브를 잡은 연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늘에 있을 땐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 있을 땐 연리지(連理枝)가 되자’는 말에서 ‘비익연리'(比翼連理)’란 조어(造語)가 나왔다고 합니다.

 

‘연리지’는 원래《후한서(後漢書)》<채옹전(蔡邕傳)>에 나오는 말로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비익조(比翼鳥)’는 암수가 각기 좌우 날개 하나씩만 갖고 있어 한 쌍이 몸을 나란히 합칠 때만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입니다. 참으로 숨 막히는 사랑 아닌가요?

 

<장한가(長恨歌)>/ 백거이(樂天)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네/ 둘이서만 아는 서약 들어 있었지/ 칠월칠석 장생전에서/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이던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슬픈 사랑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덕산재(德山齋)> 거실에 100년도 넘은 ‘연리지 소사나무’가 있습니다. 저는 거실에서 쉴 때마다 가끔 이 연리지를 보며 아득한 옛 사랑의 추억에 몸을 싣습니다. 그런 사랑 중에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이 있습니다.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 1915~2001) 현대구룹 명예회장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지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있는 천사’라고 묘사했습니다. 고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요. 심지어 고 정 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습니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 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습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정 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 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합니다. 정 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서울에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女專)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 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직접 와 주세요. 자금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거에요.” 그런데도 정 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경리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습니다.

 

정 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습니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후 정 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좋아했던 정 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난 것입니다.  정 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 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통천 이장 집 딸이었습니다.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지요.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을 볼 때마다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정 회장의 나이 열일곱 살 때,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 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습니다. 정 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갑니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습니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지요.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정 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갑니다. 그곳에서 정 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습니다.  정 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합니다. 그 후 정 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도 2001년 3월, 그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아! 비익연리! 지금 이 나이에 ‘비련(悲戀)의 달콤함’이 생길 리야 없겠지만, 우리 모두 저마다 간직한 ‘장한가’ 한번쯤 곱씹는 사치 한번 누려 보면 어떨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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