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역과 도시의 간략사⑧

-시베리아 여행

박정례 기자 | 기사입력 2019/04/14 [12:21]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     © 박정례 기자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리 탐사단은 오전에 첫 코스로 우스리스크에서 이상설 유허비를 거쳐 라즈돌노예 역에 들렸다. 다음으로 한인문화센터를 찾고 이어 최재형 선생 생가 방문을 마쳤다. 중요한 일 끝에 기대하는 것은 맛있는 식사일 터, 고려인 식당을 찾았다.

 

연해주에서의 마지막 식사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번 여행에는 3대 목표가 있다. 첫째 고려인 유적지 탐사다. 다음은 흔히 연해주라 부르는 프리모르스키 주()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의 루키스 섬 안에 있는 러시아 극동연방대학에서의 세미나 개최, 그런 후 바이칼호수 들르기다. 예정대로 한반도의 평화체재와 신북방경제 세미나를 마친 후의 일정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이어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차질 없이 오르는 것이 눈앞에 닥친 과제였다고나 할까. 35명의 인원이 열차 한 칸을 몽땅 예약한 상태다. 만약에 이 인원 전부가 열차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난감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먼저 들려야 할 곳은 민생고 해결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전용버스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조선인 식당이었다. 그냥 편하게 북한식당이라고 부르자. 원래는 다른 식당을 예약했다가 교포식당에서 밥 한 끼 먹어보자는 뜻에서 찾아간 곳이다. 러시아에서 해결한 21끼니의 식사에서 느낀 점은 뒤에 가서 좀 더 소개할 예정이다. 그렇더라도 북한식당에서 잘 먹은 한 끼에 대한 추억은 미리 강조해둔 달들 지나친 일은 아닐 것 같다. 밥이라서 좋았고, 나물과 채소재료가 익숙한 것들이라 괜찮았다. 모두 대체로 만족한 모습에 환한 얼굴로 일어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이라는 것이 재욕, 색욕, 식욕, 명예욕,수면욕이라고 한다. 이중의 으뜸은 식욕이 아닐까? 나머지는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식욕을 채우고 난 뒤에라야 추구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배를 채웠으니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60만이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런데 오늘 날의 도시 사정은 교통체증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인구증가도 있으려니와 늘어난 방문객들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가이드의 재촉 소리가 왠지 자주 듣던 소리처럼 들려왔다.

 

▲ 대륙으로가는길 회원들 기념촬영(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 박정례 기자

 

중국에서 빼앗은 땅

 

딴은 그렇다. 100여년 기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처럼 혼잡한 곳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동쪽 최 변방 국경지대에 있는 블라디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역할이 점점 증대된 케이스다. 빼앗은 영토였기에 자기네 땅으로 굳히기 위한 필요 조치를 때맞춰 진행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부터 러시아는 헤이룽 강(흑룡강, 아무르강)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과 청나라가 2차 아편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서 하바롭스크를 건설하고 이어 아무르 강의 이북 지역을 차지한 케이스다. 더해서 1860년에는 영국과 청나라를 중재한다는 구실로 끼어들어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다. 연해주는 이때 러시아 땅이 되었다.

 

그들은 재빨리 95개나 되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우스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건설도 이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볼세비키들이 계획에 따라 도시 발전과 군사 항()으로서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9년 스탈린 시대에 와서는 고려인들에게 악명 높기로 유명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책을 자행하고 말이다.

 

스탈린의 일국가 일민족주의, 고려인 강제이주도 일 국가 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실시한 정책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고려인들은 첫 해에 7, 이듬에 4천이 희생되어 주검이 산을 이루다시피 한다. 황인종들을 소개시키려면 그들과 연고가 더 많은 중국 쪽으로 월경(越境)하도록 했어야지 말과는 전혀 딴 판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것은 왜인가. 노동력은 필요하고 인권은 무시하고. 사람을 짐짝 부리듯이 부려놓고, 불모지를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다. 내심 넓으나 넓은 연해주 땅의 연고권을 주장할까봐 일찌감치 영토반환의 싹수를 잘라버리려는 가혹한 탄압 아니었던가 싶다. 지들과 피부빛깔이 다른 사람들은 오로지 착취와 탄압의 대상일 뿐, 달리 무슨 해석이 필요할까 싶다.

 

고려인들에게는 슬픈 역사였다. 억울하고 분한 과거였다. 구소련이 붕괴한 후 고려인들이 살게 된 나라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크라이나, 타자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다. 이들은 대충 잡아 총 50만이다. 13가구로 시작한 연해주 농업 이주가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말이긴 하나 이 또한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에 해당되는 경우일까?

 

▲ 군사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의 모습     © 박정례 기자

 

TSR 간략 사()

 

러시아의 철도 역사는 당시 수도인 상트페테르브르와 황제의 별장 구간의 24km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1857년에는 알렉산더 2세 차르가 철도 건설 법령을 반포하는 등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의 철도는 급격히 늘어난다. 지금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본선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첼랴빈스크(Chelyabinsk) 구간도 이 시기 건설되었다. 이때도 유럽에 속한 러시아 땅에 국한 되는 것일 뿐, 시베리아 너머의 지역은 여전히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이러던 것이 점차 정치 경제적 필요성에 더해 부동항 건설이라는 군사적인 필요성까지 대두됐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내놓은 러시아 도로교통부가 위대한 시베리아철도라는 보고서를 보더라도 철도건설 계획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제는 앞서 캐나다 태평양 횡단열차가 완공되는 것을 보게 된다. 중국의 혼란을 틈타 빼앗은 땅을 좀 더 확실하게 먹어치우기 위한 제국주의 본연의 야심이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91년 당시 알렉산드르 3세의 칙령에 따라서 모스크바 시베리아횡단 열차가 착공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驛舍) 완공이 1912년이고 러시아 국내 전 구간을 횡단하는 열차 개통은 착공 25년 만인 1916년 일이다. 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가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는다. 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 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건설됐고 대학·도서관·극장 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TSR, 올 들어 개통 102년째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주변은 이제 도시의 중심지가 되어 교통체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곳이 됐다. 블라디는 그러니까 세 얼굴의 사나이다. 군사도시, 국경도시, 극동정책의 전초기지로서의 모습이다. 예전엔 아니었지만 오늘 날엔 도심 한복판에 역사가 위치하게 된 때문에 함대배치에는 보안문제가 걸린다. 이를 의식한 러시아 정부는 군사적 기능을 인근 나홋카와 볼쇼이카멘으로 분산시켰다. 앞서 말한 대로 동북아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드는 곳이 됐다. 오랜 기간 동안 외국인 금지구역이었던 곳을 해금조치를 한 것을 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미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는 다면성을 보이고 있다. 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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