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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한 스님의 '죽음에 대한 성찰'

“한 집에서/남여가/더불어 살아가는/그런 세상을 살아보고 싶다”

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18/11/17 [09:58]

이법철 스님. 나는 1979년 어느 날, 스님을 만났다. 불교 조계종(대한불교 조계종) 출입기자로 취재를 위해 조계종을 드나들 때였다. 당시 스님은 조계종 종보였던 불교신문 편집국장-종단 재무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스님은 종단의 실세 스님이었다. 그 후 이성철 종정스님 등 여러 종정스님의 대변인(사서)으로 일하기도 했다. 스님은 전북 선운사로 동정 출가, 선운사가 고향 절이다.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 했고, 종립 동국대학도 졸업한 인재다. 전남 무위사 주지 등도 거쳤다. 스님은 시인이자 작가. 그때부터 스님과 세속적인 인연을 지속해왔으니 40년을 교유한 셈이다.

 

스님은 조계종 승려로서 무소유를 실천해왔다. 1948년생이니 세속 나이로 70세다. 노령에 도달했다. 강원도 원주 근방에 작은 은거 장소를 두었다고 말하긴 했는데, 한 번도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진 안았다. 그런 스님은 당뇨 수치가 높다고 했다. 이빨이 아프다고 했다. 당수치가 높아 병원에서 이빨도 빼주지 않는다고 하소연 했다. 수도하며 살던 평생을 걸어다녀서인지 무릎이 아프다고도 했다. 언제부턴가 발에 힘이 빠진다고 했다.

 

▲ 이법철 스님.  ©브레이크뉴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늙으면 아프게 돼 있다. 늙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소멸과정이다. 그런데 스님은 16일 오후에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인 페이스북에 글 한편을 올렸다. “나는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글이었다.

 

이 글을 자세히 읽어봤다. “나 혼자 세상을 살다가 떠난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돈 만드는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라는 말로 수행승이 '무소유'를 실천하다 저 세상으로 떠나는 수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재벌 부인의 일본 유학을 시켜주겠다는 속임 말에 들떠있었다. 인생이 의지대로 풀리지 않았지만 그녀를 원망하진 않았다.

 

평생 수행한 수행승의 일생을 살았지만 내생(來生)이 있을까?라는, 종교적 화두를 내보였다. 스님은 이 글의 말미, 숙명대로 인생을 살다가 죽음의 세계로 다가서는 목전에서 남녀들이여, 재수-행운이 있기를...“이라고 기원했다.

 

이 글에 대한 댓글반응이 줄을 이었다. “글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내생에서는 행복하실거예요” “마음이 찡하네요” “주변 정리 잘하고 마음 편하게 밭아 들였음하네요” “글을 읽으니 만감이 서립니다. 그리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마음으로 안아드립니다” “좀더 힘좀 내주세요” “스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이런저런 내용의 댓글이 이어졌다.

 

스님은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이제 죽을 준비의 주변정리를 하면서, 지나온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일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인간은 종교를 믿어도 죽고 안 믿어도 결국은 죽고 만다. 부처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마호메트도 죽고, 공자님도 죽고 마는 것이다. 인류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찬양될 뿐이다.”

 

나의 사주팔자는 부모에게 송곳 꽂을 땅도 물려받을 복이 없고, 처자도 없이 살다 죽는 기막힌 팔자였다. 근거는 내가 태어난 일주와 시주가 무신일(戊申日)에 을묘시(乙卯時)이다. 을묘시는 무신일에 귀문이요, 공망살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숙명대로 나의 인생을 살다가 조상이 걸어 보인 죽음의 세계로 다가서는 것이다.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스님은 직접 쓴 글 제목에서 나는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했지만, 아마 글 제목이 시사하듯이 당장 사망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전제에 이 글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이가 남긴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 지금부터 마음 비우고 준비하세요라는 댓글이,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시인이다. 언젠가 스님과 함께 인사동 밤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스님의 더듬거리는 말을 시어로 옮겨 썼다. “스님과 내세라는 시다.

 

어둠이 깔린 인사동 길을/스님과 함께 걸었다./스님이 말했다.//온통 세상이 음양이다./남자로 태어나서/여성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후회한다.//내세에 사람으로 태어난다면/혼자 도 닦는/중노릇 안할 거다.//평범한 세상 사람들처럼/이성을 만나 사랑하며/한 세상 살고 싶다./ /집에서/남여가/더불어 살아가는/그런 세상을 살아보고 싶다.//스님 눈가에/눈물이/파란색 잉크처럼 번져 있었다.<문일석 시 '스님과 내세' 전문>"

 

▲ 필자(오른쪽)와 이법철 스님.    ©브레이크뉴스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가슴에 젖는 밤이었다. 낙엽들이 지고, 초겨울로 접어드는 날. 이법철 스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라는 화두(話頭) 하나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글은 한 스님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데, 만약 스님이 열반한다면 완전 무소유를 실천하진 않았다고 평할 수 있다. 20181116. 이 날, 이 글 한편이라도 확실하게 남겼으니까. 그 전문을 소개한다.

 

나는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법철 스님이법철(대불총, 지도법사)11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나는 작금에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내가 그동안 입어왔던 해묵고 색바랜 낡은 내복과 승복을 골라 대형 쓰레기봉투에 넣어 쓰레기 수거장에 버리고, 나의 첫 번째 재산이며 읽고 또 읽은 헌책을 골라 필요한 단체에 보내고, 또 쓰레기 소각장에 처분하고 있다. 언제고빈손의 몸만 세상을 떠나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의 주변 정리를 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을 준비하는 원인은, 나의 지병에 대해 한국의 명망 있는 대학병원의 여기저기에서 친절한 전문교수로부터 조언을 받아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승려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이고, 법계(法階)는 종사(宗師)급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비구, 비구니 모두 결혼하지 않은 독신(獨身)을 원칙으로 한다. 나는 조계종 승려의 원칙대로 결혼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에게 처자(妻子)가 있을 리 없다. 나는 혼자서 세상을 살다가 떠날 뿐이다.

 

나는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점령지역인 전북 고창군 고수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의 향리에서는 인민군의 백을 믿고 설치는 토착 빨갱이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평소 미운 털 박힌 이웃들을 인민재판이라는 명분으로 죽창과 몽둥이 등으로 마구 죽이는 시절이 있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은 경찰과 국군을 학수고대 하면서 하무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나는 이제 솔직한 고백을 해야겠다. 내가 처자가 없는 것은 조계종의 원칙을 준수한 결과만은 아니었다. 나는 돈 만드는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이다. 지구상에 돈에 무능력한 승려인 나에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 여성은 과연 존재할까? 중생에게 대자대비를 베푼다는 관음보살이 아니고서야 과연 살아있는 여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세연이 다한 것을 나는 글로 쓰면서, 잊을 수 없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추억담이 있어 고백한다.

 

1976, 당시 나는 26세로서 합천 해인사 교무국장직과 경남 함안군의 군북면 소재의 원효암(元曉庵)주지를 겸임하고 있었다. 당시 원효암은 너무도 가난하여 공양주도 고용할 수 없는 절이었다. 나는 사제에게 원효암을 맡기고, 해인사 교무직을 보고 있었다. 당시 해인사는 주지에 도광(導光)큰스님, 총무에 일미스님, 교무에 나, 재무에 진천제(陳闡提)스님이 있었다. 당시 해인사 방장은 성철(性徹)큰스님이었다.

 

당시 해인사로 오르는 매표소 쪽에는 다리가 없이 시냇가에 큰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이용하고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사람들은 징검다리 위를 흐르는 시냇물을 피해 다리의 바지를 걷고 건너야 했다. 나는 그곳에 시멘트 다리를 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주지스님의 직인이 찍힌 권선문(勸善文)을 들고 평소 아는 당시 상공부 장관 부인을 만나러 서울 행을 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전화로 서울에온 사정을 말하니 상공부장관 부인의 말이 어머니가 전날에 사망하여 초상집이라는 것이었다. 초상집에 권선문을 어떻게 들이밀겠는가. 빈손으로 해인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아는 스님이 위로하며, “아들 백일잔치를 하는 집이 있는 데, 함께 가서 밥이라고 얻어먹고 가라는 권유했다.

 

백일잔치가 있는 집에 가보니 승려들이 56명이 먼저 와 있었다. 나도 잔치 상에 끼여 열심히 밥을 먹으려니 50대 초반의 뚱뚱하며 화사한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인사를 했다. 화사한 여인은 내곁에 다가와 음식을 더 갖다 주며 많이 먹으라다정히 권했다. 그녀는 내게 어디 계신 스님이냐?“ 고 물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해인사에서 왔습니다인사를 하고, 나는 밥을 먹고 바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인사에 돌아온 다음날 낮에 서울에서 찾아온 소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가보니 어제 백일잔치에서 본 화사한 옷을 입은 그녀가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가용 승용차로 새벽부터 운전기사를 재촉하며 해인사에 도착한 것이다.

 

교무실에서 나는 작설차를 대접하는 데, 그녀가 내게 말했다. “산속에서 여생을 살기 보다는 젊으니까, 대학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 때 나는 일본의 불교대학에 유학하여 10년간 공부를 하고 돌아왔으면 하는 데, 유학자금이 없습니다.“ 고 희망을 말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이 유학자금을 지원 하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녀는 나에게 즉시 상경하라는 독촉이었다. 나는 며칠간 장고(長考)를 했다. 그녀는 하루에 몇 번 상경하여 일본유학을 하라는 불같은 독촉이었다.

 

나는 마침내 아무도 몰래 어느날 새벽을 기해 걸망을 등에 메고 해인사 교무직과 원효암 주지를 버리고, 상경하고 말았다.

 

서울에 도착하니 화사한 옷을 입은 여인의 이름은 최순제(가명)이었고, 당시 한국 애 몇 안되는 재벌회장 부인의 하나였다. 어느 날, 그녀는 45명의 스님들에 승복을 보시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사찰도 지어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이제 불교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돈이 얼마나 들던 무제한으로 법철 스님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나는 말이 앞서는 그녀를 근심스럽게 보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지원을 믿고 종로 일본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43일 만에 그녀는 나로부터 사라졌다. 그녀가 지어준 사찰의 주지가 재벌회장에게 회장 사모님이 나에게 수백억대의 돈을 주었다는 허위날조의 무고를 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서 학인해본 결과 시한부 인생을 사는 중병에 든 환자였다. 

 

나는 일본어 학원을 다녀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고, 조계종단에 나쁜 구설수기 쓰나미처럼 퍼졌다. 내가 재벌회장부인으로부터 수백억을 받았다는 소문이었다. 10만원의 지원도 받지 못한 나에게는 기가 막힌 무고의 악 소문이었다. 나는 해인사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얼마 후 그녀는 지병으로 병원에서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왜 나에게 무제한 지원의 말을 마구하고 죽었을까?

 

나는 나이가 들면서 강호(세상)에는 입으로 만금(萬金)을 주는 언어는 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너무도 세상을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

 

나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나를 무고한 승려, 그리고 일본유학을 무제한 지원하겠다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모두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푸짐한 언어에 현혹되어 해인사 교무직과 원효암 주지를 팽개치고 서울로 떠난 내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나는 깨닫고 보니 모두 우치한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부처님게 참회할 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왕생극락을 기원해온다.

 

나는 이제 죽을 준비의 주변정리를 하면서, 지나온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일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인간은 종교를 믿어도 죽고 안 믿어도 결국은 죽고 만다. 부처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마호메트도 죽고, 공자님도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인류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찬양될 뿐이다. 나의 마지막 일은 모든 종교가 자유가 있는 자유대한을 수호하고, 서민경제와 서민복지향상을 기도하며, 서민들을 위해 주장하는 글을 써 오는 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나를 극우라고 비판했다.

 

끝으로, 나는 대학병원에서 진단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절감하면서 주변정리를 해오면서, 세상에 전해오는 악 소문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거듭 1976년도에 재벌회장부인에게서 수백억의 유학비를 받은 바가 없고, 거듭 나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살다가 이제 인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내생이 정말 있을까?" 나는 의문 속에 자문하면서 진짜 나에게 내생이 주어진다면, 고달픈 비구승 생활은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인연 있는 착한 여자를 만나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을 뿐이다. 나는 고달픈 내 운명이 붉은 완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고 반공투사로 살아온 내가 나의 사주를 분석하니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었다. 나의 사주팔자는 부모에게 송곳 꽂을 땅도 물려받을 복이 없고, 처자도 없이 살다 죽는 기막힌 팔자였다. 근거는 내가 태어난 일주와 시주가 무신일(戊申日)에 을묘시(乙卯時)이다. 을묘시는 무신일에 귀문이요, 공망살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숙명대로 나의 인생을 살다가 조상이 걸어 보인 죽음의 세계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살아온 추억은 고달픈 인생뿐이었다. 이 글을 애써 읽어주는 남녀들이여, 붉은 완장이 없는 자유대한에 건강과 행운만 있기를 나는 간절히 기원한다. bubchul@hotmail.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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