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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타 조계종 대종사 “북한 명산명찰 순례길 열겠다”

<단독 인터뷰>95차례 북한 방문한 법타 대한불교조계종민족공동체 추진본부장

이계홍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9/21 [09:10]

▲ 대한불교 조계종 10교구본사 은해사 회주인 법타 스님.     © 브레이크뉴스

 

남북정상회담 성공을 누구보다 반기는 이가 있다. 1989년 이후 95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법타 스님(72)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10교구본사 은해사 회주인 법타 스님은 현재 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장이자 평화통일불교협회 이사장이다. 그의 직함에서 보듯 불교계에서는 그를 빼고 남북 교류와 협력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신분. 법타 스님은 1998년 굶주린 북한 사람들을 위해 사리원에 첫 국수공장을 차리고 3년후 평양에 더큰 국수공장을 차려 하루 7,700명분의 국수를 제공했다.

 

1998년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던 시기다.

 

“매월 60톤의 밀가루를 인천-남포 해상 항로를 운행하던 화물선을 통해 북에 보내 국수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6.25때 폭격으로 소실된 북한 지역의 각 사찰 복원에 나섰다. 자연 통일운동에도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법타 스님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승복 한 벌 뿐인데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방북했다고 구속하더군요. 당시 신고하면 방북 불허가 뻔하고, 북녘 사람들이 굶주린 것이 빤히 보이는데 안갈 수도 없고... 신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어갔다 돌아왔더니 이적 행위를 했다고 국가보안법을 걸어 잡아 가두었습니다. 1989년 노태우 정권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교도소 2층에 소설가 황석영씨가 갇혀 있었는데, 서로 통방하며 격려한 적이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오자 더욱 활발하게 남북화해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제 일신의 안위보다 북한 동포들의 모습들이 더 절박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을 계기로 남북 통행의 문을 걸어 잠그고, 박근혜 정권 역시 반북 대결주의로 나가면서 2007년 이래 나의 대북 사업이 중단되었지요. 배고픈 사람에게 국수 한그릇 먹이지 못하게 하는 정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감이 남달랐을 것이다.

 

“남북 문제는 民族苦를 해결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민족고를 이제야 해결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우리는 너무 멀리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지나온 이야기를 이어갔다.

 

“불교란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고, 눈물 흘리는 자에게 눈물을 닦아주는 종교입니다. 거기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있고, 정쟁이 있습니까. 이런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니 참 잔혹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중 2013년 종교계 북한 방문단 일원으로 북한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풍편으로 내가 치린 사리원, 평양 두 국수공장이 불규칙하나마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도했습니다. 2007년 철수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운영해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다 하고 눈물로 헤어졌는데 운영되고 있다니 천만다행이다 여겼습니다. 벌써 6년 세월이 흘렀군요.”

 

그는 무엇보다 두 정상이 금년내 동, 서해선 철도 연결과 도로 연결 합의를 기뻐했다.

 

“길이 열리면 사람이 통행하고, 닫힌 것들이 열립니다. 그러면 상호 가졌던 편견과 오해들이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남북한 국민들간에 쌓인 불신과 오해들이 풀리는 계기가 올 것입니다. 현지 주민과 만나면 악마화했던 시선이 얼마나 허구이고, 황당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스님은 길이 활짝 열리면 쇠락해지긴 했지만 보현사, 성불사, 영통사, 신계사 등 북한 사찰 순례 행사를 추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북한의 명찰은 백두산 묘향산 칠보산 금강산 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 관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이를 '성지순례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감회를 이어갔다.

 

“북한은 88서울 올림픽에 맞서 89년 세계청년축전(평양축전)을 개최했습니다. 미국 선수단을 비롯해 15,000명의 세계 청년들이 참가했습니다. 한국에선 임수경 학생이 밀입북했지요. 나도 이때 방북했는데, 그 이후 평양 60여 차례, 사리원 개성 등지를 40차례 가까이 갔습니다. 아마 95차례 정도 될 것입니다. 그중 금강산은 33차례 방문했습니다. 불교에는 ‘우주 33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33이라는 숫자는 우주의 기원을 받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그만큼 지극정성으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뜻이겠지요. 거기에 108번뇌를 말하는 108번 북한을 방문하면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부지런히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처음 시작해 20차례 정도 방문하자 일반 국민에게도 개방돼 누구나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헤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로 회귀하더니 저의 방문길도 끊겼습니다. 100 차례 방문 문턱에서 방북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합의문을 보고 느끼신 점이 무엇입니까.

 

“비핵화, 한반도 평화와 전쟁 종식, 철도 도로 사업 전개, 종교 문화 공동사업을 활발히 하겠다는 데 구호로서가 아니라 실천의지가 담긴 합의문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자 합니다. 평화의 종교인 불교가 큰 역할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북한사회에서는 공산주의 종교관도 있었겠지만, 기독교나 천주교는 스파이 활동을 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2000여개의 교회당이 폐쇄됐지요. 불교는 500여개의 사찰이 6.25 전쟁 때 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다시 불사를 일으킬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5000년 역사와 함께 불교는 남북 공히 동질성을 가져왔습니다.”

 

-북한과 협력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197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콜로라도 덴버대학을 거쳐 LA USC에서 학업을 계속했지요. 박사과정을 밟을 때 지도교수와 학위논문 주제를 협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평소 생각대로 ‘세계 성직자 비교 교육 연구’를 쓰겠다고 했지요. 지도교수께서 테마는 좋으나 광범위하니, 학생의 특수한 여건과 상황을 고려한 주제를 선정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남북한 성직자 비교연구’로 좁혀서 논문을 쓰도록 권했어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북한의 종교 실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북한 종교 자료는 거의 백지상태. 그러나 북한 노동신문 등 북한 출판물이 정기적으로 정확하게 대학 도서관에 배달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편 미국에 ‘One Korea Movent’라는 조직이 결성돼 폭넓게 북한과 교류하는 것을 보고 참여했다. 이 기구를 통해 북한 종교 소식과 정보를 얻었다.

 

1987년 조국통일북미주협회가 결성되자 참여했다. 동포지식인들이 주축인 통일운동 조직인데 본국에서는 친북세력으로 몰아 고초를 겪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으로 남북관계가 적대적 관계에서 국내관계로, 그리고 해외거주자에 한해 신고만 하면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1996년 미국 클레이턴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5년엔 북학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처음으로 북한에 들어가 북한의 종교계 성직자를 파악했습니다. 북한의 모든 사찰이 6.25때 미군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 숫자가 500개가 넘습니다. 그중에는 금강산 신계사, 묘향산 보현사, 사리원의 성불사 등 천년고찰들이 있었습니다. 천년 문화재가 완전 소실되거나 파괴된 것입니다. 개성의 영통사, 관음사, 개심사 등은 다행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6.25 이전까지 개성은 남한 땅이었으니까 미군기의 폭격을 피했던 것이지요. 이런 사찰이 약 70개 정도 되었습니다. 재직 스님은 300명 정도였고요.”

 

북한 주민이 미국에 대해 적개심과 증오심을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평양은 완전히 파괴되고, 인명 피해도 집집마다 한두 사람씩 나왔으니 체질적으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했다.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스님들이 승복이 아니라 양복을 입고 근무하고 있는 것이 놀랍더군요. 스님과 일반인이 구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승복을 맞춰드렸지요. 그때 해준 승복을 지금껏 입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법타 스님은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보현사, 성불사, 신계사 복원사업을 폈다. 모두 조계종과 함께 중수 복원한 것이지만, 개성 영통사는 천태종의 지원을 받았다.

 

법타 스님의 불사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다. 베트남 주월 백마부대 백마사를 비롯해 11개 군법당을 창건, 중수했다. 영천 3사관학교, 무등산 공군사이트, 팔공산 공군부대 비로정사, 28사단 석림사 불사도 했다. 그는 월남전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일반 사찰의 경우, 89-91년 로스앤젤레스에 원효학당 개설, 75-85년 6.25때 전소된 광주 무등산의 원효사 중창, 85-86년 콜로라도 덴버시 원효사 개설, 86-82년 로스앤젤레스 수도사 법사를 지냈다. 2004-현재까지 평불협 통일법당을 개설, 운영해오고 있다.

 

 

▲ 법타 스님     © 브레이크뉴스


 

-대북 사업을 하시면서 어려웠던 것은 무엇입니까.

 

“국내 일부 보수세력의 잘못된 인식입니다. 70년 적대의 후유증이긴 하지만 북한이라면 무조건 나쁘고, 악이라는 인식 때문에 대북사업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편견 때문에 굶주림에 직면한 북한 동포 구제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좌절한 적도 많습니다. 보수정권이 냉전 대결적으로 몰아가서 국민들이 세뇌된 탓이긴 하지만, 이러다 보니 재원 염출이 참 어려웠지요. 정보기관의 미행과 도청 등 감시의 눈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는 같은 민족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면 동족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고 되물었다. 배고픔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집권 시절 이런 일들이 거리낌없이 자행되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07년 5.24 조치로 북한으로 밀가루를 보낸 일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을 원천봉쇄해버리니, 참 괴로웠습니다. 나는 ‘밥이 통일’이라는 신념으로 이 운동에 나섰습니다. 남한 스님이 제공하는 따뜻한 국수 한그릇이 북한 주민의 마음을 녹이고, 작은 통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그릇을 내동이쳐버린 정권이니 그 정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비정한 정권은 비정하게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탈북민이 많이 생기는 것은 정치탄압을 받거나 사상적으로 체제를 회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오로지 배가 고파서 탈북한다고 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했다.

 

“대북 사업을 하는 사람을 친북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너의 조국 북으로 가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보기관의 감시와 도청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러니 조계종단에서도 지친 나머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참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북한을 정치적으로 볼 문제로 보자면 끝이 없다고 했다. 반면에 북한과 더불어 발전하고, 평화를 실천해나간다는 생각을 가다듬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다고 했다.

 

"편향된 사고로 스스로 편을 갈라 증오하고 저주하면 본인의 심성도 고통스럽고 핍진해집니다."

 

-그렇다면 대북사업을 해오신 중에 보람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분단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민족고’를 해결하는 일에 나섰다는 뿌듯함입니다. 통일운동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내가 먼저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의 모순과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는 길은 우리 민족이 헤쳐가야 할 길입니다.”

 

법타 스님은 본적이 경북 울릉군 독도리 산30번지다. 본래 고향은 충북 청원이지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위안부 만행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은 일본을 보고 1998년 10월9일 본적을 독도로 옮겼다. 독도와 대마도와 관련된 책을 낸 것만도 ‘한국령 독도’ ‘겨레의 섬 독도’ ‘독도는 통곡한다’ ‘대마도는 한국땅’ 등 4권이나 된다. 그만큼 민족의식이 강하다.

 

법타 스님의 통일·인권사회운동(NGO)은 갈수록 활발했다. 90년 LA 불교학당 이사장에 취임해 포교활동 및 통일운동을 펼치고, 91년 민족불교교류추진 미주불교협의회 부회장, 92년-현재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창립해 상임부회장을 거쳐 95년 이후 회장과 이사장을 맡고 있다. 95년부터 현재까지 경실련 지도위원, 불교시민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3.1절 남북공동행사 공동대표, 6.15선언 남북공동행사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고(2005), 모교인 동국대 개교 100주년 기념 방북단 대표단으로 방북해 평양 김일성대학과 MOU를 체결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제8회 만해상 실천부문 수상을 비롯해 2006년 정일형 이태영 자유민주상, 2006년 대원상을 수상했다. 글로벌피스페스티벌 재단이 세계 평화실천을 위해 공헌한 자에게 주는 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기여하고 남북 불교통합과 문화재 보호에 기여한 공적으로 세계평화상을 수상했다(2011년).

 

법타 스님은 북한과의 교류를 통한 논문을 수십 편 발표했는데 정부나 사회단체, 불교계 정책 활용에 도움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논문은 ‘평화통일과 북한불교.(2002 정신문화연구원), ’남북한 종교 교류와 통일‘, ’북한의 불교정책 변화와 포교활동‘, ’북한의 종교정책과 북한 불교‘, ’북한 주체사상과 현대불교‘, ’남북한 불교 교류와 전망‘, ’21세기 최근세 북한불교 변화에 대한 연구‘(박사학위 논문) 등이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불교신문사 부사장, 대구 불교방송 창립 초대 사장, 동국대 사회과학대학원 겸임교수, 동국대 총동창회 상임부회장, 동국대 석림독문회장(동국대 출신 스님동문 모임/3연임)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과 대종사로 추대되어 교계활동도 활발하다.

 

법타 스님은 1965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추담 스님을 은사,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67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후 남원 선원사, 무등산 원효사, 동두천 자재암, 경주 기림사, 영천시 팔공산의 은해사 주지(3연임)를 역임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하신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3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평화가 중심이 되고,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이 가시화된 만큼 기왕의 불사 원력과 국수를 제공하는 일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쇠락해진 북한 사찰 복원에 나서겠습니다. 북한 스님을 남한에 초대하는 등 북한 불교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보현사 성불사 영통사 신계사 등 북한 사찰 순례 행사를 추진하겠습니다.”

 

전쟁이 상수인 시대가 아니라 평화가 상수인 시대로 전환한 지금 법타 스님의 대북한 사업을 통한 남북 화해의 시대를 열어갈 임무가 다시 주어진 셈이다. khlee0543@naver.com

 

*인터뷰어/이계홍, 소설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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