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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팔자 운명(運命)을 고치는 개운(開運)

숙명(宿命)과 천명(天命), 운명(運命)과 소명(召命) 그리고 개운(開運)과 입명(立命)

노병한 사주풍수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9/14 [07:55]

 

▲ 노병한 자연사상칼럼니스트     © 노병한 사주풍수칼럼니스트

[노병한의 운세코칭] 운명(運命)론이란? 운명의 사전적인 의미를 한번 보자. 인간의 의도하는 바나 사람들과 관련된 일체의 일들의 진행과 결과를 포함하는 우주전체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관계가 없이, 그 어떤 움직이기 어려운 궁극적인 결정에 의해서 규제되고 조종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사람이 인지하고 지각할 수 없는 상태의 초월한 힘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운명이란?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힘든 절대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이자 초()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관찰함이 바를 것이다.

 

그러나 초()논리적인 힘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운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의식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남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을 때이다. 불가항적인 일에 대처하기 위한 합리적인 처리 요구에 따라 도출되는 것이 운명의식으로 굳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운명은 인간적인 극한 심리현상으로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운명이 신격화되어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추상화되어 종교적인 차원의 신학(神學)과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이성적인 차원의 철학(哲學)의 주요한 <의제=테마>가 되어왔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초()논리적인 힘이나 운명법칙을 예측하고 예견하기 위해 동서양에서는 <신탁·점성술··역학·사주명리·상법(관상&풍수)> 등의 다양한 주술적인 이론과 방법들이 구축되어왔다고 할 수가 있다.

 

운명의 힘은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앞에 다가와 나타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는 공통된 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운명관으로 정립되게 되는 동기를 이루는 것들이다.

 

()론을 구성하는 것들에는 <숙명(宿命천명(天命운명(運命소명(召命)> 등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우주 삼라만상을 형성하는 자연의 <섭리=이치>는 아주 명쾌하다. 바로 명()이라는 것이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뿌리(((열매()>라는 근묘화실(根苗花實)의 성장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순환하는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동물도 역시 <출생(늙음(질병(죽음()>이라고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진행해가는 생명체임이 확실하다. 이러한 생명체를 줄여서 우리는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새롭게 시작해 출발함은 생명체의 생성이고 출생이며 나아가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명()이 다함은 숨이 끊어지고 이승의 문턱에 진입하는 죽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은 생명체의 씨앗이고 종자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에는 크게 <숙명(宿命천명(天命운명(運命소명(召命)>이 있다. 그래서 우주의 만물과 인간의 세상사에는 <숙명·천명·운명·소명>이라는 4가지가 언제나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숙명·천명·운명·소명>따로 떨어져 따로 움직이며 작동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사슬로 함께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업보(業報)가 현생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또 현생의 업보가 내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영향을 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는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명()을 가진 생명체에게 교만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직 봄(天時)에 이르지 않았는데 씨앗을 뿌린다고 싹이 트일 이가 없음이 자연의 법칙이자 자연의 순리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늘 보듯이 때를 못 맞추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자연의 순리인 섭리, 매사 <=천시(天時)>를 알고,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도()의 출발점이자 경계선이라 할 것이다.

 

()은 천자(天子)의 명령처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옛 사람들은 인간사에서 부딪치는 부귀와 귀천, 길흉과 화복의 모두가 명()의 범주에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게 과연 명()의 전부라고 단정해 정의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이 물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늘날 현대인들은 아무도 이를 명()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든지 도전하여 극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 이를 <()이나 운수(運數)>라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생사(生死)라는 문제가 걸린 <죽고 사는 문제>라면 어떨까?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까지도 생사(生死)의 문제만은 아직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아직도 현대의술로도 못 고치는 불치의 질병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도 나와 있지 않음이 현실이 아닌가 말이다.

 

동양사회에서 명의(名醫)로 명성이 높았던 편작(扁鵲)도 자신의 죽음의 앞에는 두 손을 들라고 했듯이 아마도 생과 사는 영원히 조물주의 몫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생사(生死)야 말로 진정한 명()을 표현하는 명제가 아닐까?

 

목숨을 뜻하는 용어에는 <(생명(生命수명(壽命단명(短命연명(延命운명(殞命)>이라는 말들이 있다. 여기서 운명(殞命)이란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생사를 주재하고 주관함은 오직 하늘이라고 여겨 천명(天命)이라고 위안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또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여겨 사람이 죽고 삶은 모두다 하늘의 뜻이라며 장수(長壽)와 요절(夭折)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이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죽음=운명(殞命)>을 보면 비로소 삶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인생의 밑그림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죽는가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전생(前生)을 인정하는 서양사회나 윤회(輪廻)를 받아들이는 동양사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새로운 <영혼의 삶>의 시작일 것이니 말이다.

 

누구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숙명(宿命)과 천명(天命)>을 가지고 있어 금()수저와 흙()수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누구나 후천적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운명(運命)과 소명(召命)>은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고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개운(開運)과 입명(立命)>을 위한 자신에게 맞는 안성맞춤의 노력과 실천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nbh1010@naver.com

 

/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자연사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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