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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203) - 미소라 히바리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8/15 [13:54]

1984년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불렀던 배경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당시 조용필의 노래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가장 인기 있는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조용필의 노래를 리메이크하여 발표한 것은 당시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일본 열도에 알린 가장 큰 뉴스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헤아려오면서 이 부분에 가장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한국의 가수가 일본에서 태풍과 같은 인기를 얻게 되었을 때 일본 최고의 가수가 이를 리메이크하여 발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미소라 히바리’가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불렀던 배경에 대하여 단순하게 상업성을 앞세워 기획된 것이 아닌 자랑스러운 한국 가수의 행보를 지원하였을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는 당시 이미 몇 명의 가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발표하였지만 ‘미소라 히바리’가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연이어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면 1976년 새로운 편곡으로 거듭 태어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신선한 리듬과 가사에 담긴 애틋한 감성을 열창하는 가수에 끌려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나 대마초 파동으로 1977년 5월 은퇴한 가수와 함께 규제에 묶여버린 노래였다. 

 

▲ (좌로부터) 이성애 ‘가슴 아프게’(カスマプゲ), ‘노삿푸 미사키’(納沙布岬),‘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 음반/‘도노사마 킹스’(殿さまキングス) / ‘미카와 켄이치’(美川憲一. 1946~) 자료제공 -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국내에서 규제에 묶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 바로 이웃 나라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가수 남진의 히트곡 ‘가슴 아프게’를 만나게 된다. 1967년 발표되었던 남진의 대표곡 중 하나인 ‘가슴 아프게’를 일본의 독특한 음색만큼이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여장남자 가수로 잘 알려진 ‘미카와 켄이치’(美川憲一. 1946~)가 작사가 ‘호시노 테츠로’(星野 哲郎. 1925~2010)의 번역과 ‘고야마 야스히로’(小山恭弘)의 편곡으로 리메이크한 ‘가슴 아프게’(カスマプゲ)를 1976년 1월 일본에서 발표하였다.

 

당시 인기가수 ‘미카와 켄이치’는 1972년 발표한 ‘전갈자리의 여자’(さそり座の女)라는 연속된 히트곡으로 1974년 제25회 ‘NHK 홍백가합전’까지 7년 연속 출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2월 31일 제26회 ‘홍백가합전’에서 탈락하였다, 일본 가수에게 홍백가합전 출전과 탈락은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명예이다, 마치 이러한 자신의 가슴 아픈 심경을 이야기하듯 1976년 1월 25일 ‘가슴 아프게’(カスマプゲ)를 리메이크곡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그의 노래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슴 아프게’(カスマプゲ) 가 다음 해 1977년 일본 가수가 아닌 우리나라 가수 이성애(李成愛. 1952~)에 의해서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성애 가수는 여고 시절 ‘하얀 나비’를 부른 가수 김정호에게 음악을 배워 1971년 ‘사랑의 오두막집’으로 데뷔하였다. 가요와 팝에서부터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특히 남매 듀엣 ‘카펜터스’(Carpenters)의 노래에 뛰어난 감성을 보였던 그가 1977년 일본에 진출한 것이다. 당시 이성애는 남진의 ‘가슴 아프게’(カスマプゲ)와 한명숙의 인기곡 ‘노란 셔츠의 사나이’(黄色いシャツ)를 일본어와 한국어로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노란 셔츠의 사나이’(黄色いシャツ)노래 또한, 이미 일본 가수가 발표한 노래였다. 이는 ‘하마무라 미치코’(浜村美智子, 1938~ )라는 모델 출신 여가수가 결혼으로 은퇴하였다가 연예계에 복귀하면서 1972년 리메이크하였다, 당시 ‘이성애’가 일본에서 발표한 두 노래 중에서 ‘가슴 아프게’(カスマプゲ)가 큰 인기를 가져온 것이다. 이에 일본 가요계에서는 ‘엔카의 바탕을 한국의 가수 이성애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성애’는 당시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8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기획상 을 받았다, 이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던 이성애는 일본 가요 평론가들이 언급한 엔카의 원류라는 극찬을 활용하여 일본 데뷔 다음 해인 1977년 ‘노삿푸 미사키’(納沙布岬)-엔카의 원류를 찾는다. 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바로 이 앨범에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 최초로 일본에 소개되었다. 

 

여기서 이성애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가 실린 앨범의 표제곡 ‘노삿푸 미사키’(納沙布岬)란 일본의 최동단 홋카이도(北海道)에 소재한 지명이다. 러시아의 사할린과 근접한 곳으로 일본의 북방영토문제와 같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가진 곳이다, 이러한 ‘노삿푸 미사키’(納沙布岬)는 작곡가 황문평의 곡으로 당시 한국에서 신동운 작가의 사할린 교포의 한이 서린 이야기로 작사하여 이성애의 ‘바람에 부치는 편지’로 1977년 6월 25일 발표되었다. 바로 이 곡을 일본의 감성에 맞게 개사하여 ‘노삿푸 미사키’(納沙布岬)로 발표하였다.

 

원래 이 곡은 1966년에 방송된 TBC 라디오 연속극 ‘가장무도회’의 주제가로 심영식이 작사한 노래를 최희준이 불렀다. 이후 연속극이 끝난 다음 해 1967년 가수 남진이 다시 취입하여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노래 ‘가장무도회’ 이다, 이와 같은 곡이 전혀 새로운 가사로 바뀐 이성애의 노래로 한국과 일본에 발표되었다. 
 

당시 이성애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일본 가라오케에 한국 가요가 등장하게 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가 일본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1979년 말 한국에서 10․26 사태 이후 가수 조용필의 해금 조치가 풀리던 무렵 일본에 ‘도노사마 킹스’(殿さまキングス)라는 가요 밴드그룹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작사가 ‘미요시 레지’(三佳令二. 1928~2009)의 번역으로 ‘눈물의 부둣가’(泪の波止場) 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도노사마 킹스’(殿さまキングス)라는 밴드그룹은 코믹밴드 출신에서 가요그룹으로 전향하여 큰 인기를 얻었던 그룹이다.  

 

이후 활동을 재개한 가수 조용필이 1980년 3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여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이성애를 통하여 먼저 알려진 조용필의 노래가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가져왔다, 이에 일본 활동을 시작한 조용필은 1982년 CBS 소니사에서 발표한 앨범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미워, 미워, 미워’가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83년 5월 일본 NHK홀 공연을 시작으로 고베와 후쿠오카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열었다. 이어 다음 해 1984년 1월 22일 NHK홀 공연을 시작으로 나고야와 오사카 그리고 후쿠오카와 요코하마 공연에서 큰 성황을 이루었다. 바로 이때 1984년 3월 21일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1937~1989)가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발표하였다, 이는 당시 조용필이라는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부은 뉴스이었다, 이후 많은 일본 가수들이 봇물 터지듯‘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발표하면서 김연자, 계은숙과 같은 한국 가수의 일본 진출이 이어졌다.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리메이크한 주요한 가수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 ‘우치다 아카리’(内田あかり. 1947~)/ ‘우치야마다히로시’(内山田洋. 1936~)/ ‘모리신이치’(森進一. 1947~)/ ‘미후네 가즈코’(三船和子. 1947~)/ ‘다이시로우’(増位山太志郎. 1948~)/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 1948~)/ ‘기타하라 미레이’(北原ミレイ. 1948~)/ 듀오 그룹 ‘사쿠라와 이치로’(さくらと一郎. 1948)/ '야시로  아키'(八代亜紀. 1950~)/ ‘아츠미 지로’(渥美二郎. 1952~)/ ‘텐도 요시미’(天童よしみ. 1954~)/ ‘후지 게이코’(藤圭子. 1951~)/ 대만 가수 ‘덩리쥔’(鄧麗君. 1953~1995)/ '모리 마사코'(森昌子. 1958)/ ’무라카미 사치코‘(村上幸子. 1958)/ ’히노 미카‘(日野美歌. 1962)/ ‘시마츠 아야’(島津亜矢. 1971~)/ ‘미즈모리 가오리(水森かおり. 1973~)/ ‘오카다 시노부’(岡田しのぶ. 1976~)/ ‘모리야마 아이코’(森山愛子. 1985~)/ ‘스즈키 안나’(鈴木杏奈. 2003~)/ ‘마츠우라 마유미’(松浦真弓)/‘미즈노코지’(水野浩二)/ ‘가야마 시노부’(香山しのぶ)/ 아프리카계 흑인 엔카 가수 '제로(Jero. 1981)/등이다.(출생 연도순)

 

이와 같은 가수들과 함께 다양한 리메이크 사례들을 살펴보면 1978년 세계적인 ‘폴 모리아 악단’(Paul Mauriat)이 연주한 곡과 함께 일본의 기타리스트 ‘기무라 요시오’(木村好夫. 1934~1996)가 경음악 버전으로 발표한 리메이크곡이 있다, 또한, 가장 독특한 리메이크는 2008년 최초의 소리라는 뜻을 가진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라는 가상 디바에 의하여 발표된 내용이다. 이는 2000년 야마하(YAMAHA)에서 발표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 ‘보컬로이드’(VOCALOID)를 바탕으로 ‘크립톤 퓨처 미디어’(クリプトン・フューチャー・メディア)사가 개발한 리듬 게임 시리즈인 가상 아이돌 ‘하츠네 미쿠’가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리메이크하였다.

 

또한 리메이크 가수 중 가장 어린 나이인 현재 15세 소녀인 ‘스즈키 안나’(鈴木杏奈. 2003~)는 도쿄 TV 계열 방송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노래방 베틀’(カラオケ・バトル)에서 18세 이하 참가자들이 겨루는 ‘U-18 대회’에서 사천왕(四天王)을 차지한 소녀다. 이 프로그램은 정밀한 노래방 기계의 평가점수로 실력을 겨루는 일본의 인기 프로그램이다, 이와 함께 지난 2016년 기타와 바이올린 그리고 보컬로 구성된 일본의 젊은 아티스트 밴드 ‘Goodies’가 바이올린 편곡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한국어판 디지털 음원으로 발표하였다. 이렇듯 한국의 가왕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인의 끝없는 관심과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리메이크하여온 오랜 세월 속에서 가장 큰 인기를 가져왔던 가수는 ‘아츠미 지로’(渥美二郎. 1952~)이다. 그는 1983년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발표하여 80여 만장의 음반 판매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이와 같은 가수 ‘아츠미 지로’에 대하여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있다.

 

▲ (좌로부터) ‘최배달’(崔倍達. 1923~1994)/ ‘아츠미 지로’(渥美二郎. 1952~)/ ‘다이시로우’(増位山太志郎. 1948~)/ ‘스즈키 안나’(鈴木杏奈. 2003~)/ 자료제공 -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아츠미 지로’(渥美二郎. 1952~)는 1952년 동경 북부의 아다치구(足立区)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노래책을 팔았던 ‘엔카시’(演歌師) 라는 직업으로 음악 활동을 하다가 가수로 데뷔하였다. 그는 ‘최영의’(崔永宜) 또는 ‘최배달’(崔倍達. 1923~1994)로 잘 알려진 한국이 낳은 전설적인 무도인과 깊은 인연을 가진 가수이다. 이와 같은 ‘최배달’이 지어준 ‘아즈미겐’(渥美健) 이라는 예명으로 1975년 제작된 영화 ‘실전 가라테 극진권’(けんか空手 極真拳)의 주제가 ‘가라테’(空手道) 를 불렀다. 이 영화는 한국이 낳은 전설적인 무도인 ‘최배달’(崔倍達. 1923~1994)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일본의 주간 소년에 연재된 최고의 인기 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후 1976년 ‘귀여운 너’(可愛いおまえ)로 데뷔하여 1978년 발표한 ‘꿈을 쫓는 술’(夢追い酒)로 일약 유명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극진 가라테’(極眞 空手) 를 창시하여 1954년 일본 현풍관 도장에서 유도 고단자 100명과 대결하여 이를 모두 물리친 신화에서부터 미국 FBI와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무술을 지도한 한국이 낳은 전설의 무도인 ‘최배달’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 다시 상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이와 같은 최배달과 부모와 같은 깊은 인연을 가진 ‘아츠미 지로’(渥美二郎. 1952~)가 1983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발표한 배경에 대하여 헤아렸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가수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 필자는 많은 정황만을 가슴에 품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이러한 이야기와 함께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1937~1989)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리메이크하여 발표한 배경을 살펴보면 많은 이야기가 헤아려진다, 이는 사랑하는 동생 ‘가토 데츠야’(加藤 哲也. 1941~1983)가 본인이 기획한 노래 ‘마지막 협객의 노래’(残侠子守唄) 가 누나의 강력한 거부로 녹음되지 못하다가 병상에 눕고 나서 녹음되어 처음 TV 방송에 전해진 사실을 확인하고 다음 날 1983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삼킨 채 1983년 11월 1일 ‘마지막 협객의 노래’(残侠子守唄) 음반이 발매되었다. 이후 다음 해 1984년 3월 21일 ‘마지막 협객의 노래’(残侠子守唄) ‘84 유선 히트’(残侠子守唄~'84 有線ヒット)라는 앨범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가 실렸다.

 

이와 같은 음반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84년 유선 히트’ 즉 일본 유선방송에서 히트된 노래를 ‘미소라 히바리’가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당시 음반에 실린 10곡의 노래는 1번 트랙에 ‘히바리’ 자신의 노래 ‘마지막 협객의 노래’(残侠子守唄) 가 실렸으며, 2번 곡은 ‘치아키 나오미’(ちあきなおみ.1947~)의 ‘와기리노 와타시’(矢切の渡し)라는 노래가 실렸다. 여기서 ‘와기리노 와타시’(矢切の渡し)란 도쿄와 지바현(千葉県)의 경계를 흐르는 에도가와(江戸川)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말한다. 옛 시절에는 벌판과 같은 지바현에 머무를 수 없어 다시 나룻배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은 노래이다. 이 노래는 원곡 가수 ‘치아키 나오미’가 발표 당시에는 큰 반응이 없었지만 1983년 ‘호소카와 다카시’(細川 たかし. 1950~)가 리메이크하여 큰 인기를 얻었던 곡이다.

 

이어 실린 3번 곡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한국 가사이건 일본 가사이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어 4번 곡은 스모선수 출신의 엔카 가수 ‘고도카제 고우키’(琴風豪規. 1957~)의 1982년 데뷔곡 ‘돌아가는 길’(まわり道) 이 실렸다, 엄밀하게 이 노래는 당시 크게 히트한 노래는 아니다. 이 노래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을 통하여 그리운 사람을 회상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이어 5번 곡은 한국과 깊은 인연을 가진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의 마지막 제자 가수인 ‘오-카와 에이사쿠’(大川栄策. 1948~)의 히트곡 ‘아기 동백 피는 집’(さざんかの宿) 이며 6번 곡은 ‘히바리’ 자신의 노래 ‘인생 표류’(人生吹きだまり)이다.


7번 곡은 ‘모리 신이치’(森進一. 1947~)의 히트곡 ‘겨울 벚꽃’(冬桜)이 실렸으며 8번 곡은 ‘이츠키 히로시’(五木ひろし, 1948~)의 ‘사사메유키’(細雪) 이다. 이어 9번 곡은 ‘토바 이치로’(鳥羽一郎. 1952~)의 바다의 삶을 살아가는 어부 형제의 마음을 담은 ‘형제선’(兄弟船) 이며 마지막 10번 곡은 무디 마츠시마(ムーディー松島. 1945~)가 1968년 발표한 ‘신주쿠 이야기’(新宿情話)가 실려 있다. 이 음반은 당시 히트한 노래이거나 음반의 표제곡을 ‘미소라 히바리’가 리메이크하여 발표한 음반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한국의 가수 조용필이 1983년 일본 공연 이후 1984년 1월 22일 NHK홀 공연을 시작으로 나고야와 오사카 그리고 후쿠오카와 요코하마 공연에서 큰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1984년 3월 21일 일본 최고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발표하면서 많은 일본 가수들의 리메이크곡이 연이어 쏟아져 나오면서 조용필이라는 태풍이 일본 열도를 강타하게 된다. 이는 가수 조용필이 그해 1월 5개 도시 순회공연을 마친 이후 불과 10개월 후인 11월 23일 요코하마 공연에서부터 12월 27일 교토공연까지 일본 열도 15개 도시 순회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던 내용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 (좌) 미소라 히바리 / (중) 조용필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일본 음반)자료제공-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일본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외국 가수가 이와 같은 10개월 간격의 연속적인 대규모 일본 순회공연이 열광적으로 열린 적이 없는 사례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의 가왕 조용필이 일으킨 한류의 바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필자는 이에 대하여 재일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가슴에 품었던 역사에 담긴 깊은 생각을 오래도록 매만지고 싶다. 다음 칼럼은 (204) '중국 경제 브레인을 알면 중국이 보인다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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