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서현의 낯설게 하기] 노래에 관하여

서현 | 기사입력 2002/05/22 [20:56]
- 최인석과 함께 전두환을 노래한다 -


노래할 수 있었다면, 글을 쓰진 않았을 것 같다. 가령 내가 어두운 밤 쓸쓸한 청계천 8가에서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비참하지만 위대한 삶을 노래할 수 있었다면(천지인, '청계천 8가'), 나는 굳이 이것을 글로 옮겨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노래할 수 없어 나는 글을 쓴다. 노래하는 이들을 나는 시기하며, 시기하는 나는 초라하다.

{image2_left}최인석의 '노래에 관하여'는 이런 내 오랜 시기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소설을 읽고, 새로이 나는 묻는다. 노래하는 자는 과연 노래하고 싶어 노래하는가. 아닌 것 같다. 삶이 삶일 수 있었다면, 그들 역시 노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노래다운 노래를 부를 수 없어 내가 글을 쓰듯, 삶다운 삶을 살 수 없어 그들은 노래한다. 삶이 삶일 수 없어 노래하는 그들은 초라하기 보다 차라리 애처롭다.

소설 '노래에 관하여'에서, 애처로운 그들의 삶은 봉 체조와 올챙이 포복, 개머리판과 곤봉과 이단옆차기의 폭력, 그리고 잃어버린 바늘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다. 그들은 바늘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올챙이포복을 하고, 뭔가 다른 이유로 봉 체조를 하며,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맞는다. 이단옆차기를 맞고 쓰러지고, 쓰러졌다 일어나면 곤봉으로 어깨가 후려쳐지고, 다시 쓰러졌다 일어나면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찍힌다. 쓰러지고, 쓰러지고, 쓰러지다 끝내 못 일어나면 군홧발로 얼굴을 걷어차인다. 삼청교육대다. 사람이 아닌 사람들의 삶이 아닌 삶이 있는 곳. 어두운 밤 검은 하늘에 병사들의 '충성'이 울려퍼지는 곳. 그곳에서 누군가는 그 '충성'을 받고, 익명의 그들은 그저 노래한다. 아하, 누가 푸른 하늘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은하수도……(김민기, '아하, 누가 그렇게').

아마도 그들을 노래하게 만든 이는 전두환인 것 같다. 그는 1980년 8월 더러운 세상을 깨끗케 하기 위해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그는 삼청교육대의 창조자이며, 삼청교육대의 신이다. 그는 밤마다 검은 하늘로 화해 삼청교육대를 내려다보며 그곳에 울려퍼지는 모든 '충성'들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 신의 뜻을 거룩하게 실천한다. 빨리 빨리 기어, 이 개새끼들아. 안 기는 놈은 해골을 씹어 버리겠어. 그들은 긴다. 기다 일어나,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호 밖에 수류탄, 호 안에 수류탄을 하고, 다시 엎드려 배로 땅을 밀고 간다. 성실히 뱀처럼, 지렁이처럼, 송충이처럼 얼음 깔린 연병장을 기어가며 그들은 다시 노래한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내 님은 어디에, 어디에 있을까(김영동, '어디로 갈거나').

소설 바깥의 얘기지만, 그들은 검은 신의 검은 입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그들의 님이 어디에 있을지 걱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에겐 다만 뱃가죽이 허물어지도록 땅바닥을 기고 기어 검은 신의 검은 입으로 들어가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며, 역사가 그들에게 부여한 임무이고, 검은 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섭리이다. 그들은 반항할 수 없다. 그리고 물론 포악하고, 탐욕스럽고, 오랫동안 굶주린 검은 신 또한 그들을 사면하지 않는다. 신은 곧, 드르륵, 드르륵,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그들을 삼켜버릴 예정이다.

{image1_right}그렇게 전두환은 왕이 됐다. 1980년 9월, 그는 "국가 속에 내가 있고 나와 함께 국가가 있다"며 대통령직을 '수락'했다. 이미 검은 신의 공포를 경험한 이들은 누구도 감히 그의 '수락'을 저지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암흑의 시작이었다. 또 다시, 더러운 자들이 깨끗한 자를 손가락질하고, 죄 있는 자들이 죄 없는 자를 벌하며,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야 할 자를 죽여대는 세상 아닌 세상이 시작됐다. 세상이 세상이 아닌 만큼,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으며, 삶은 삶이 아니었다. 세상엔 다시 많은 노래들이, 많은 글들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지금 그 모든 노래와 글 앞에 겸손하다.

하여 나는 내 못난 음성을 가다듬는다. 5월이 가기 전에 나는 노래하고 싶다. 그대, 우리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말자. 우리들의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으니, 그대, 우리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말자. 내 아버지와 내 아들과, 내 어머니와 내 딸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정태춘/박은옥, '5.18').


- '노래에 관하여'는 최인석 작품집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창작과 비평사, 1997)에 실려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