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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96)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7/17 [14:03]

여성 미술전 전시를 준비하느라 그동안 분주하였던 양평군립미술관 학예실장이 월요일 휴관이라서 오랜만에 갤러리에 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시 홍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나라 여성 미술사의 흐름을 조명한 오랜 준비 기간을 가진 전시에 대하여 주요한 언론의 보도가 없음을 함께 안타까워하였다, 수도권에 위치한 미술관의 접근성 문제로 기자들이 직접 전시를 보지 못하면 그 실체의 중요성을 체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어느 분야이든 언론 보도의 중요성은 실로 크다. 더욱 미술 전시는 전문성이 있어야하는 요소가 많아 전시의 구성에서부터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해설을 곁들인 보도의 역할이 막중하다. 필자는 지난 3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많은 전시를 기획하면서 다양한 매체의 기자들과 오랜 인연을 가져왔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이제는 말 할 수 있는 가슴에 담아온 언론 보도와 연관된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헤아리려면 지난 1998년 1월 하순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몇 개월 전이었던 1997년 11월 21일 우리나라는 IMF라는 역사상 초유의 외환위기 사태가 덮쳐왔으며 그해 겨울은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다. 서울역 앞과 여러 곳의 지하도에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와 연쇄적인 부도 사태를 맞아 파산한 이들이 노숙하는 인파로 넘쳐나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육이오 전쟁을 겪어온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뜻밖의 경제 위기에 국민들은 예측할 수 없는 극심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는 당시 인사동 조계사 쪽 초입에 가장 큰 전시 공간을 가졌던 공평아트센터 전관을 대관하여 1월 21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화 126인 부채 그림전’을 열었다, 전시는 이미 3년 전에 기획된 전시였다, 이와 같은 전시를 기획하게 된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안국역에 위치한 일본 문화원에서 열린 일본작가 들의 부채 그림전시인 선면회화전(扇面繪畫展)을 관람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도록에 우리나라 합죽선과 같은 접고 펴는 부채를 일본이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살펴왔던 기록과 전혀 다른 이야기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세계의 수많은 나라에 부채 그림전을 순회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양국의 도서관에서 접고 펴는 부채인 접선(摺扇)에 대한 자료를 오랫동안 헤아렸다, 이에 일본이 접고 펴는 쥘부채 접선(摺扇)을 최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주장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세계에서 최초로 종이를 발라 접고 펴는 부채를 사용한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 (좌)일본 부채 화지로 만든 헤이안시대의 부채 (이쓰쿠시마 신사 소장)/ (중)중국 부채 인물화접선(人物畵摺扇) 19세기 지본채색 31.6×45.5㎝/ (우)한국 부채 합죽선 / 자료제공-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당시 필자는 접고 펴는 부채인 우리나라 합죽선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내용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먼저 부채의 조형성이었다, 오늘날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의 접고 펴는 부채의 조형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전통적으로 보면 중국과 일본의 부채는 대략 150도 또는 160도의 조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죽선 부채는 180도의 정확한 반원형 조형을 품고 있어 중국과 일본의 부채와는 그 조형성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살펴진 중요한 사실은 서양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가 그린 부채 그림이 바로 우리의 독창적인 조형성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피사로’(Camille Pissaro. 1830~1903)와 ‘드가’(Edgar De Gas. 1834~1917) 그리고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화가들이 그린 부채 그림은 모두가 일본이나 중국의 부채 조형이 아닌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180도의 반원형 도형에 그려진 것임을 살피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헤아리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파리에서 열린 만국 산업박람회에 선보인 우리의 합죽선이 일본의 것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을 추정하였다. 

 

▲ (좌) ‘피사로’(Camille Pissaro) 1879년 작품/ (중)‘ 드가’(Edgar De Gas) 1879년 작품/ (우)‘ 고갱’(Paul Gauguin) 1892년 작품/ 자료제공-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이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의 문화를 오랫동안 연구한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1889~1961)가 ‘조선이 영원히 전해야 할 물건은 합죽선 부채이며, 일본에는 이런 부채가 없다’는 기록을 남긴 내용과 연관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중국 북송 시대의 화가이며 화론가이었던 ‘곽약허’(郭若虛)가 1076년에 저술한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 ‘고려에서 중국에 오는 사신들은 접고 펴는 접 부채를 사용하였다.’ ‘부채에는 산수와 화조 등을 그려 매우 아름답고 신기한 부채로 이는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는 기록에서부터 여러 문헌의 기록을 중시하여 우리의 것으로 빛나는 부채 그림 전시회를 기획하였다. 이와 같은 자료와 기획안을 들고 필자는 당대의 지성 이어령 박사님을 찾아뵈었다, 박사님은 일면식도 없는 저를 만나 중요한 문학상 심사장을 가야 하는 일정까지 미루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어주고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주셨다.

 

과연 내 생각과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 많은 갈등과 번민을 가졌던 나에게 분명한 확신을 안겨준 박사님의 격려를 안고 부채 그림전시를 준비하면서 기존에 많이 열렸던 부채 그림전시가 이미 만들어진 부채에 그림을 그렸던 까닭으로 회화적인 완성도가 떨어진 사실을 파악하였다, 이에 매 주말이면 전주로 내려가 합죽선 장인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이는 이미 만들어진 부채에 그림을 그리면 부챗살의 풀 기운에 먹물과 물감이 먹혀들지 않는 점과 부채를 펴고 붓질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합죽선 부채종이를 접는 장인등과 협력하여 먼저 접힌 종이에 그림을 그린 다음 합죽선에 바르는 작업을 택하였다.   
 
전시 준비 기간이 3년 동안이나 길었던 원인은 바로 15마디 이상의 대나무로 이루어지는 고급 합죽선은 그와 같은 자연적인 마디를 지닌 대나무의 확보가 어려워 매년 제작 수량이 많지 않았다, 이에 3년 동안 전시를 위한 부채 제작을 해왔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합죽선 장인의 부채를 확보한 이후 한국화 작가 126명에게 부채종이를 전달하여 그림이 그려졌다, 이렇게 그려진 부채 그림을 다시 전주로 가져가 완성된 합죽선 부채로 만들었다,

 

당시 1997년 10월 말까지 126명의 한국화 작가들이 그려낸 부채 그림을 합죽선 장인이 부채에 다시 붙이는 작업을 하던 시기인 1997년 11월 21일 바로 IMF 외환 위기 사태가 선언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초유의 사태를 맞아 당시 모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이에 모든 경비는 예상하였던 비용의 3배 또는 4배를 웃돌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말렸다, 이 어려운 시기에 왜 전시를 강행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약속된 전시를 미루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역사를 보면 한겨울에도 합죽선 부채를 들고 다녔던 선비사회의 깊은 의미가 바로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을 낳았다, 이는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가올 여름을 대비하는 지혜를 이른 말이다. 이와 같은 선인들의 지혜와 정신을 소중하게 매만져보는 한겨울 부채 그림전을 통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온 국민을 거리로 내모는 국가 경제 파탄과 같은 불행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하는 기원을 담았다.

 

결국 집을 팔았다, 다섯 살 아들과 세 살짜리 딸을 데리고 안양 월세방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안고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을 맞는 1998년 1월 21일 한국화가 126인 부채그림전이 열렸다, 전시는 큰 반응을 가져왔으며 많은 관람객이 몰려왔다, 당시 주요 일간지와 매체에서는 전시에 대한 많은 기사를 보도하였다,
 

▲ (좌) 한국화 126인 부채그림전 도록 (중) 전시실에서 이어령 박사님과 필자 (우)한국화 126인전 차영규 작품/ 자료제공-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전시가 오픈되고 하늘의 별 따기라는 국내 최대 일간지인 조선일보에 전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한국화가 126명이 전통 정신에 바탕을 두고 현대적 미감으로 그려낸 부채그림전 전시 기사는 어느 대학 미대 서양화과 교수의 미국 갤러리 초대전을 알리는 큼직한 기사와 너무나 대조되는 단신으로 실린 것이다. 기사를 번갈아 보면서 이건 아니지 않은가, 라는 비장한 마음이 생겨났다,

 

기사가 실린 신문의 면을 하얀 켄트지에 정성스럽게 붙여서 도록과 함께 챙겨 들고 다음 날 아침 10시 정각에 조선일보 편집국을 찾았다, 당시 편집 국장실은 별도 공간이 아닌 편집국 안쪽에 작은 응접 의자와 책상이 오픈되어 있었다, 편집국장님에게로 가니 응접 의자에 먼저 온 손님과 대화 중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국장님에게 직행하여 인사를 하자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도록을 꺼내 탁자에 놓아드리며 ‘국장님 한국화 126인 부채그림전 도록을 보셨습니까?’ 물었다, 국장님은 도록을 살펴보더니 ‘아! 보내주신 도록 보았습니다.’ 이에 필자는 기사가 게재된 신문을 탁자에 놓아두고 ‘국장님! 손님이 계시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정의 옹호와 문화건설을 사시로 받들어온 조선일보가,’ ‘또한 이와 같은 활동으로 문화훈장을 받은 회장님이 계신 조선일보가,’ ‘나라의 전통정신을 그려낸 한국화가 126명의 작품전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일보의 편집 방향 입니까?’ 하고 작지 않은 목소리로 결연하게 물었다,

 

이에 국장님은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일어서며 ‘지금 당장 문화부장에게 가시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외침을 따라 밖으로 조용히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편집국 모든 기자는 서 있었으며, 미술 담당 기자가 다가와 ‘관장님! 제가 한 번이라도 관장님 전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나는 조용히 말했다, ‘기자님! 죄송합니다.’ ‘이것은 기자님의 문제가 아닌 조선일보의 문제입니다.’

 

이후 조선일보에는 20년 동안 나의 기획전시에 대한 많은 보도자료를 보냈지만,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물론 신문이 특정한 기사를 반드시 보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른 인식과 형평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 바른 언론의 자세이다.

 

일개 초라한 갤러리 관장이 거대한 조선일보에 직설한 것은 민족지를 주창하는 신문에 대하여 우리의 것에 대한 바른 인식과 형평에 대한 항의였다, 이러한 항의가 20년 동안 족쇄로 작용하였다면 그것은 민족지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 할 것이다.

 

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당시 편집국장님을 갤러리에서 뵈었다, 국장님과 절친한 고교 동창 화가의 전시에 오신 것이다, 전시 기간 동안 이틀 걸려 오셨던 국장님과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지난 이야기의 흔적을 매만지며 쓸쓸하게 웃었다,      

 

이후 국내는 물론 해외 여러 나라에 많은 부채 그림전을 기획하여 열어오면서 개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으로 오랫동안 부채(빚)에 시달렸다, 그러나 소중한 우리의 것을 품고 신명과 열정으로 달려온 젊음을 삼킨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성 이어령 박사님이 전시회 도록 서문에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그림 한국화가 평가되는 서글픈 현실을 본다,

 

▲ 한국화 126인 부채그림전 도록 이어령 -서문 中     © 브레이크뉴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투병 중인 박사님의 인터뷰를 보았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슴으로 훔치며 박사님의 격려에 누가 되지 않으려 고독한 신명과 열정을 쏟아온 날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획을 매만지고 있다,  다음 칼럼은 (197) 대중음악의 역사(3) .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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