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ㅡ빛을 그리는 사람들

19세기 낭만주의자들 선두주자로 외젠 들라크루아 꼽아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7/11 [09:18]

파리에서부터 아르장테이유, 샤투, 부지발, 퐁텐블로, 바르비종 그리고 노르망디 해안.  인상파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소들. 인상파 화가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좀 더 정확히 말해 1863년을 기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는 산업혁명의 시대. 그해의 살롱전. 살롱전이라고 불렀던 공식적인 미술 전람회가 열리면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와 들라크루아의 낭만파는 한바탕 싸움을 벌이곤 했다. 서로 자신들의 그림이 더 낫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정도로 심한 경쟁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이 정도면 르네 마그리트가 혐오했던 미술가들의 행렬이 상상될 법도 하다.

 

앵그르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한다. 그는 데생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 앵그르는 훌륭한 화가란 무엇보다도 데생을 잘해야 된다고 믿었다. 색을 칠하는 건 다음 문제다. 그는 신고전주의의 대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화실에서 공부했다. 앵그르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샘]. 이 작품은 1856년 작품으로 [터키탕], [오달리스크]처럼 여인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육체의 선이 잘 살아나 있으며 정밀하면서도 이상화된 여인상을 보여 주고 있다. 옷을 벗은 여인의 모습은 그림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들은 신화와 역사에서 이상화된 소재로서 고정된 자세로 움직임 없이 서 있어 마치 정물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 이서영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19세기에 신고전주의와 함께 대세를 이루었던 또 하나의 화풍은 낭만주의자들의 작품이다. 그 선두주자로 외젠 들라크루아를 꼽는다. 우리에게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의 낭만주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역동적인 모습이 압권이다. 그의 그림에는 격정과 열기가 느껴지고 색채가 당당하게 전면에 나선다. 그는 주로 과거나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으로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보다 예술가의 감정이나 정서의 발현을 중시하였으므로 강렬한 감정이 느껴진다. 후기 낭만주의는 풍경이 매개가 되더라도 개인의 마음속에 숨겨진 공포나 열정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상상에 기초한 상징적 화면을 구성하더라도 신고전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였다.

 

인상주의를 거론하기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한 사람의 화가라면 쿠르베를 빼놓을 수 없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림의 소재는 제한적이었다. 쿠르베는 역사나 신화에서 구했던 소재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이 사실은 당대에는 획기적이고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기성 화단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쿠르베는 자신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좌절 없이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그에게는 대단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1854년의 [안녕하세요, 쿠르베씨!]라는 작품은 화구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막 마차에서 내린 여행자 차림의 화가인 쿠르베 자신을 화면에 등장시킨다. 그는 미술 애호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와 인사를 나눈다. 신화나 역사나 귀족이 아닌 이렇게 일상적인, 그래서 그림의 소재로서는 걸맞지 않는 대상을 그린 쿠르베의 작품은 당대에는 숱한 비난의 대상이기도 했다. 1855년 쿠르베는 만국 박람회에 출품을 거부당한다. 그는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리얼리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화가의 아틀리에]라는 작품은 '나의 예술적 생애의 7년에 걸친 시기를 정의하는 현실의 우의화'라는 긴 부제를 달고 전시되었다. 무대처럼 펼쳐지는 공간의 정면에 화가인 쿠르베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 마을 오르낭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오른편에는 누드 모델이, 발 밑에는 동물들이 앉아 았다. 오른쪽 화면에는 프루동, 보들레르 같은 정신적 지주들과 브뤼야스 부부가, 화면의 왼쪽으로는 일군의 남녀들이 등장한다. 그의 화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며 읽힌다. 과거에서 미래로 옮겨가는 화면 설정이라고 한다. 벌거벗은 누드 모델은 '진실'을 상징한다.


그는 말하곤 했다. '미술은 삶에 진실해야 한다.'


가로 361센티미터, 너비 598센티미터의 대작이다.


그는 또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직 사실적인 그림만을 그리자. 화가의 가장 훌륭한 모델은 농민과 노동자다."


마지막으로 한 작품 더 소개하자면, [세느 강변의 처녀들]이 있다. 이 작품은 1857년 작품이다. 살롱전에 출품하고서 여자들의 표정이나 동작이 음란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곧이어 등장할 1863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의 등장을 미리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느 강변의 처녀들이 귀족이었다면 문제 될 리 없었을 것이고 이들이 정물화처럼 안정된 자세로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면 또한 어떤 문제도 없이 신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흡족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실주의자인 쿠르베의 그림은 다가올 인상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저러한 상황 속에서 1863년이 도래한다. 이해의 살롱전 심사위원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 5,000여점의 작품이 밀려들었는데 그 중 3,000여 점이 낙선한 것이다.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살롱전에서 떨어진 사람들의 작품을 보고는 그들의 작품들만 모아서 낙선자 전람회라는 걸 개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낙선전에서 우리는 마네, 피사로, 용킨트, 팡텡-라투르, 세잔을 비롯 여러 화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인상파가 되면서 근대 미술의 선구자가 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전람회에 온 대중들은 이들의 그림을 보고 비웃었다고 한다. 사실 비웃었다기 보다는 경멸과 비난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대중들의 시선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풍이 표준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으니 그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1863년 낙선전에서 특히 대중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었다고 한다. 벌거벗은 여자가 두 남자와 함께 있는 그림인데 그것도 관람객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관객들은 이 그림을 보고 추하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은 최초로 '밝은 빛'을 사용한 그림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회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열어준 것이다. 마네는 밝은 색을 사용했다. 그는 시원시원한 붓질을 통해 빛을 옮겨 그렸다. 육체를 어떻게 정확히 베껴낼까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는 옛것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마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그리고 싶었던 것. 그것도 빛을 활용하여.

 

사실 마네의 이 그림은 1520년 경,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판화로 그린 [파리스의 심판]의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했다고 한다. 라이몬디의 판화를 보면 화면의 오른쪽에 마네의 그림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세 사람이 있다. 라이몬디의 그림은 모두 벌거벗고 있었지만 신화 속 인물들이었다. 문제될 게 없었던 것. 그러나 마네는 이 신화 속 인물들을 파리의 숲속으로 끌어온다. 비속한 인물들인 것이다. 그것도 옷을 입은 두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 혼자 발가벗고 있다. 관객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림 속 모델들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화면의 오른쪽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은 마네의 동생 외젠, 가운데 인물은 마네의 아내 수잔 렌호프의 오빠 페르디난드 렌호프. 벌거벗은 여자는 마네가 가장 좋아했던 모델, 빅토린 뫼랑. 마네는 이 그림을 그리기 1년 전에 뫼랑을 만났고 원래 빨간색 머리를 그림에서는 갈색으로 바꾸었다.

 

그즈음 많은 젊은 화가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두 마네와 함께 하자!"


그만큼 마네의 그림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화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마네는 늘 자신은 인상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상파들은 팔레트를 밝게 하고 현재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도 빛!


외광! 외광이라는 개념은 아주 조금씩, 천천히 생겨났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고향 마을과 자연과 사람들을 그리던 쿠르베의 열망은 자연스럽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제 바르비종 숲. 이 숲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을 '빛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도 온전히 실외에서만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겸허하게 바라보고 변화하는 기후와 날씨를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부댕은 이렇게 말했다.


"현장에서 직접 그린 모든 것에는 아틀리에에서 그린 것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힘과 위력, 필치의 생생함이 깃들어 있다."


그는 주로 뱃사람들과 시골 풍경을 그렸는데 바깥에서 그리는 것이야말로 풍경을 정확히 그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15, 6세이던 모네는 르아부르라는 도시에서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며 용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댕의 영향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모네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부댕을 이해하지 못했다.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리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기 전까지는.


모네의 두 번째 스승은 바르톨트 용킨트. 바다 풍경을 즐겨 그린 화가. 그는 주변의 변화나 빛을 직접 포착하여 아주 섬세한 수채화를 잘 그렸다. 부댕보다 훨씬 꼼꼼하고 예민했던 용킨트에게서 나오는 필치의 엄밀함과 힘이 모네를 매료시켰다고 한다.


모네는 용킨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화가의 눈을 갖게 된 건 바로 그분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들이 이어지면서 작은 소년은 인상파의 대가가 되어간다. 삶이란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좀더 확장되고 좀더 발전해 간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말하자면 오늘의 나는 온전히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나타나 내게 힘을 주고 길을 안내하고 격려하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조금씩 깨우치고 발전하고 성장한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내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나도 한 발 늦게 걸어오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 버린다.

 

마네와 모네의 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매료되긴 했지만, 같은 대상을 그리더라도 늘 데생, 그러니까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네의 필치는 빠르면서도 간결하다. 움직임이 느껴진다. 종종 덜 '완성된' 듯 보이는 것은 바로 움직임, 즉 생명력을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모네의 필치는 색채를 나란히 배열한다. 가까이서 보면 무얼 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한 발 뒤로 물러 서서 보면 마술처럼 모든 게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알게 된다. 모네의 필치는 서로 조합을 이루게 하는 필치다. 세부 묘사는 굳이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에게 보이는 것에 충실하는 것. 모네는 그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피사로는 후기에는 아주 잘게 찍듯이 붓질을 했다. 쇠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작은 점들이 모여 만들어진 형체가 일렁이는 듯한 느낌. 형체가 저절로 살아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곧 다시 원래 화풍으로 되돌아갔다. 피사로는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위해 평생 노력했던 화가였다. 세잔의 스승이기도 하고 고갱에게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피사로는 선한 품성으로 후배 화가들에게 늘 용기를 북돋워 주던 화가였다. 고민의 흔적이 그의 그림을 보면 느껴진다. 8번의 인상주의 전람회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모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것'을 충실히 재현해 냈다. 이러한 관찰은 세잔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세잔은 30대가 되어 피사로와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 이후 그는 자신만의 화풍에 도달하고 현대 미술의 문을 연 아버지가 된다.

 

모든 사물과 인물은 자기만의 생명과 에너지, 빛과 색깔을 가지고 있다. 화가들은 그것들을 화폭에 옮겨 담아 그 속에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은 영원으로 붙박히게 된다.

 

르누아르는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론에 묶이지 않았다. 그는 따뜻하고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는 야외에 모인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일상 생활 속 여인들과 아이들, 소녀들의 모습을 반짝이는 색채와 풍부한 빛으로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게 그렸다. 그는 "그림은 아름답고 즐거워야 한다. 사람들을 힘들고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곳에도 충분히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초기 인상주의 작품 전시회에 참여하다가 1877년 부터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풍경에서 인물화로 옮아간다. 야외의 빛이 모델의 살색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였다. 그가 그리는 여인들의 피부는 투명하기 이를 데 없고 뺨과 입술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사진술은 19세기 화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화학 처리 기술이 발달해 감광 시간도 짧아졌고 극히 짧은 시간의 노출 사진도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사람들의 세계관도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가들과도 친했던 펠릭스 나다르는 당시 가장 대담한 사진가들 중 한 사람으로 특히 공중 사진이나 파노라마 사진에 재능이 탁월했다.


나다르가 선택한 소재나 구도 등은 인상주의자들을 매료시켰고 이들은 그것을 탐구하면서 자신들의 스타일을 확고히 구축해나갈 수 있었다.


특히 에드가 드가는 카메라를 자신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의 느낌 속에서 기다림과 움직임, 정적인 느낌과 동적인 느낌을 한 공간에 표현하곤 했다. 드가는 대상을 아래에서, 위에서, 옆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중심을 옮겨버렸다.


원근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버린 것. 그는 인상파적인 화법과 더불어 일상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함으로써 동적인 움직임을 순간에 붙박아 놓는 등 독자적이 자신만의 노선을 확립한다. 그는 극장의 무용수들, 음악가들, 경마장의 모습 등 움직이는 대상들을 순간 포착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역동성에 관심이 많았다.

세잔에 대하여 잠깐만 언급한다면 세잔은 30대에 피사로를 만나 인상주의 화풍을 전수받는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밝은 색감과 풍경의 중요함을 깨우쳐 준다. 그는 모네의 도움도 받았다. 이후 인상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자신만의 화풍을 독자적으로 발견하여 강인하고 단단한 구성에 다다른다. 1900년 초의 입체파와 야수파는 세잔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보았다.

 

시슬레. 그의 예술은 섬세하고 우아했다고 한다. 영국의 컨스터블과 터너의 그림을 접하기도 한 시슬레는 모네를 따라 퐁텐블로 숲에서 풍경화를 그리기도 한다. 그는 쎄느 강과 부지발, 세브르 등에서 작업하였다.

 

인상주의를 이야기할 때 자포니즘에 대해 빠뜨릴 수는 없다. 1854년, 일본이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1862년, 런던 국제 박람회에 참가하면서 일본의 공예품과 미술품들이 유럽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이에 유럽인들 사이에 일본에 대한 흥미가 확산되고 그 결과 자포니즘이라는 예술 운동이 생겨났다고 한다. 자포니즘은 프랑스에서 특히 유행했고 채색 목판화인 풍속화는 화가들에게 매우 신선하고 매력있게 다가왔다. 그해 파리의 리볼리 가에 '중국문'이라는 가게가 생기면서 극동 지방의 문화가 유행했다. 사람들이 기모노를 입기도 하고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물건들이 살롱에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화가들은 일본 판화가인 호쿠사이, 우타마로, 히로시게의 작품들을 주목했다고 한다. 원근법이 사라진 그들의 풍속화는 구도도 시점이 중앙보다 약간 기울어져 있거나 풍경이나 사물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기도 해서 이러한 자유로움과 유럽 미술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들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밝은 색채도 인상주의자들의 시선을 끌었다고 한다. 모네는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라는 작품을, 마네는 [에밀 졸라] 속에, 고흐는 [탕기 영감] 속에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은 일본 풍속화를 자신들의 그림에 그려 넣었다. 특히 고흐는 일본 풍속화를 400여 장이나 모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때로 모사도 부지런히 했다고 전해진다.

 

인상파 화가들은 1874년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제1회 인상주의 작품 전시회를 비롯, 1886년까지 8차례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통적 아카데미 회화의 가르침에 불만을 느낀 부류들로 빛과 색채의 순간적 효과를 묘사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전통적인 주제를 담으려고 하기 보다는 색채와 색조, 질감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풍경을 그리되 야외로 나가 직접 빛과 색채를 잡아내려고 노력하였으며 일상의 인물이나 풍경 등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 야외에서 스케치한 것을 작업실로 가져와 완성하던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실제 사물을 보면서 그것을 순간 포착하고자 노력했다는 점, 밝고 찬란한 색조를 잡아내고 자신들의 눈에 비치는 햇빛, 그림자, 직사광선과 반사광의 복잡하고 생생한 효과를 캔버스에 재생하고자 노력했다는 것, 형상은 분명한 윤곽을 잃어버리지만 또다른 형태로 재창조되고 비물질화 되는 만큼 더욱 생동감 넘치는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는 것, 자신들만의 개성 넘치고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키려고 일로매진했다는 것, 관습을 벗어나 자유로운 기법과 개성적인 주제 표현 및 자연을 성실하게 재현하려고 했다는 것 등 기법상의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하고 기법과 주제를 전통적인 틀에서 해방시킨 선구자들이라는 것.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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