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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가 ‘參禮’로

이승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22 [17:02]

▲ 삼례역     ©브레이크뉴스

“가신님 망월의 한 밝혀지는 날, 오월의 빛이 밝아 가신님 뜻 성취되고, 동생 한도 풀어지는 날 민주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의 뜻 성취되고 가신님 구천에서 떠돌지 않으며, 불멸의 횃불 되어 민족의 반석 위에 디딤돌로 우리 맘속에 살아 숨 쉴 그날을 위하여 우리 모두 뭉쳐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최재수의 '네 여기 타는 불꽃 되어' 중에서).

 

‘최재수’는 최덕수의 형이고, 최덕수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을 외치고 단국대학교 시계탑 앞에서 1988년 5월 18일 제 몸에 불을 붙였다.

 

3도 화상 살갗 표피층·진피층 피하 조직까지 손상을 입어 회색 검은색이 나타나는 고통 속에서도 계속 광주를 말했다. 결국 5월 26일 눈을 감았고 광주 민주열사 묘역에 묻혔다. 형이 있어 이만큼이라도 세상에 알려주는 사람이 있는데, 삼례 김춘배(金春培)는 어떤가?

 

1945년 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눈부신 태양아래 광명천지 조국 땅바닥에 섰지만 맞는 가족·친척·동료 한 사람이 없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외아들은 어리며 가족들이 함경도냐 간도냐 사는 곳조차 확실치 않다. 입감 후 12년 들어올 때 스물다섯 젊은 나이였으나 이젠 패기도 꺾였다. 38°선이 그어져 북행길이 막혔다. 여름은 더위로 겨울은 추위로 넘겼으나 오갈 데 없는 조국이다.

 

▲ 이승철     ©브레이크뉴스

매 맞은 자리 욱신욱신 쑤시고 부지거처 빈주머니 끼니가 어려운 서울 삶이다. 숨은 헐떡 기침은 콜록콜록 1946년 12월 1일 37세에 눈을 감자 무연고 시신 길거리서 썩힐 수야 없으니 어딘가에 묻어버렸다.

 

김춘배는 1909년 삼례면 서신리 태생 1918년 어른들 응 따라 간도에 갔다. 자라다보니 할 일이라곤 독립운동뿐 이 일을 하다 6년형을 받았고 탈옥에 가중 8년간 서대문형무소 콩밥을 먹었다. 형기를 마치고 집에 가니 울분 앞에 겁이 없다.

 

1934년 10월 2일 밤 함경북도 신창주재소를 털어 총포 8정 탄약 700발. 두만강만 건너면 영웅인데 뒤 쫓는 인원이 2만 명, 결국 19일만에 잡혔다. 김춘배의 총에 맞은 놈 여러 명이었다. 포위 속 수수밭에서 신묘하게 숨었고, 모자-신발-역장복장을 온전하게 갖추고 그 부인을 자기 아내로 위장시켜 나란히 경성행 열차에 올랐다.

 

‘신출귀목’ ‘전광석화’ 축지법(?)을 썼으나 무기징역…해방이 아니었더라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혼이 될 번했다. 외아들 종수도 종세한지 오래라 최재수처럼 글 써줄 사람조차 없다. 예 밝아 삼례 아닌가? 그 손자 손잡아 줄 사람 없나. 심가영 심가희 춤사위이면 수천 명 눈물이 한내 물에 보태지고, 하늘 문이 열려 김춘배가 두둥실 춤을 출 것이다. 삼례는 전부터 사람 모으는 곳 문화예술촌에서 연회(演會) 한마당 펼쳐보면 어떨까.

 

고향에서 버림받으면 이 세상 어디 설자리 없다. ‘참여(參與)하자!‘ ’參禮하자!.’ esc2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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