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14 [11:10]

여름이다. 뜨거운 태양이 주차장 바닥을 데우고 있다. 내장산 자락 추령 북까페의 여름은 새소리도 사라진 고요한 오후다. 어중간하게 투닥투닥 지어진 건물인 이곳 북카페에서 뜨거운 여름을 어떻게 날 것인지 미리 걱정하시는 지인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해발 400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와 눈이 많듯이 바람 또한 많이 부는 곳이라 선풍기로 여름은 날지언정 에어컨까지는 필요없는 천혜의 자연이다. 도시에서 바라보는 여름과는 다른 의미임을 경험으로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그 염려가 기우라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도 없다. 

 

▲ 이서영     ©브레이크뉴스

 

책을 읽다가 책을 덮는다. 때로는 걸으면서 몸을 산책시키고 때로는 만다라를 그리면서 마음을 쉬어주는 산책을 한다. 필자는 이 만다라 작업을 90일째 날마다 하고 있다. 하루에 한 그림. 만다라를 그리는 시간은 마음을 쉬는 시간이다. 무의식이 움직이는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는 시간이다. 만다라를 그릴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생각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몸산책을 할 때처럼 차분히 나를 내려놓는다. 90일 간의 만다라 작업은 필자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빈 종이를 마주하고 앉는다.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는 일체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펜을 들고 손으로 그린다. 처음에는 동그랗게 그려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당연함이 처음에는 당혹스럽다. 눈으로 늘 적확한 동그라미만 보아온 우리로서는 실제로 손으로 그려보니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러나 사실 정확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인간은 늘 처음부터 완성에 도달할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연습을 통하여, 부단한 반복을 통하여, 빈 도화지에 조금씩 나를 그려나가야 한다. 부단한 반복의 힘으로 한 분야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고 그것이 몸에 밸 뿐만 아니라 마음에 스미고 정신을 장악할 수 있다면, 즉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로소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운용해 나갈 것인가. 그 선택은 온전히 나에게 주어져 있다. 주어진 시간과의 싸움을 통해 결국 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적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면 가로로 정확히(이것도 논리적 모순이다. 자를 대고 그리거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곧바로 '정확히' 2등분을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따라서 늘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의심스럽다면 한 번 시도해 보라) 2등분을 하고 세로로도 중앙을 정점으로 2등분을 한다. 그러면 긴 십자가 모양이 생긴다. 이것을 기준선으로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를 구분한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왼쪽과 오른쪽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90여 개의 그림을 그리면서 속으로 탄성을 질렀던 적이 많다. 이유는?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모양들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비로소 깨닫게 된다. 거대한 규모의 타이타닉호가 겨우 돌출된 빙산의 일각에 의하여 침몰하고 말았다는 사건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는 5%의 빙산이 아니라 95%의 바다 밑 거대한 빙산이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들의 대부분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다라 작업은 바로 내 안의 수많은 무의식,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많은 것들과 조우하는 위대한 순간이다.

 

우리가 '의식'의 세계에서만 산다는 것은 사실은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사는 것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때의 의식의 세계란 정신의 본질적인 영역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부인 경험과 교육으로 만들어진 편견과 선입견의 좁은 세계를 뜻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대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나오는 행동과 생각의 총합인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 통합되어야만 나는 비로소 전인적인 존재에 이르게 된다.

 

융은 이 지점에서 페르소나persona에 대하여 설명한다. 페르소나는 일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편의적, 기능적 콤플렉스의 일종이다. 일정한 사회에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한 한 개인의 특정한 성격을 영어로는 personality라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개성, 인성, 성격, 인물' 등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일종의 가면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전인적 존재로서의 인격에서 떨어져 나온 나의 일부를 형성한다. 융은 [융 전집 6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 밖에서는 천사, 집 안에서는 악마'는 매일매일의 경험으로부터 생기는 성격character, 즉 인격 분리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특정한 사회의 문화적 환경은 특정한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태도가 더 오래 유지될수록, 그리고 더 많이 요구될수록, 그것은 더욱 습관적이 된다.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은 가정과 일이라는 완전히 다른 두 사회 문화 환경에 접근해야만 한다. 이들 완전히 다른 두 환경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태도를 요구하는데, 페르소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순간, 자아의 인식 정도에 따라 성격을 복제한다. 사회에 대한 성격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사회의 기대와 요구에 기울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로부터 받는 혜택과 개인의 야망에 기운다.

 


그렇다면 집 밖의 나와 집 안의 다른 나 중 어느 '나'가 진짜 '나'일까? 이렇듯 다양한 환경과 교육에 의하여 우리는 다양한 인격으로서의 나, 가면을 쓰는 나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특정한 모습의 나를 발현시키고 다른 모습의 나는 조금씩 은폐해야만 한다. 이렇게 형성된 나는 통합적인 전체적 존재로서의 Self에서 부분적 존재인 ego의 존재로 변질되어가는 것이다.

 

처음에 만다라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반야심경]을 해석한 14대 달라이 라마를 통해서였다. 책 표지에 그림이 있었다. 가로 세 줄, 세로 세 줄이었다. 이 줄이 교묘하게 서로를 얽고 있었다. 무심코 그림을 따라 그렸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을 그리고 나서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림은 한 줄이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세 줄이 서로를 감고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보였는데 교묘하게 새 개의 줄이 한 몸인 듯 서로를 만나면서 품고 있다는 사실.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필자는 인간의 '관계' 또한 이렇게 얽히고 섥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같은 그림을 다시 한 번 그렸다. 펜을 손에 쥐자 손이 저절로 그림을 따라 움직였다. 마치 백지는 백지가 아니라 이미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으며 그것을 지금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 신선한 체험이었다. 처음에 사용한 펜은 주황색이었는데 선을 긋고 나니 다른 색깔펜을 주워 자연스럽게 색을 칠하고 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채색되어 있었고 하얗게 남아 있는 여백과는 다른 질감을 발산했다. 두 번째 그림도 채색을 했다. 색과 색이 서로 마주보거나 등을 돌리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만다라 그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만다라는 사실 특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만다라mandala는 원을 뜻한다. 만다라는 신이 거주하는 신성한 장소이고 우주의 힘이 응집되는 장소다. 둥글게 두루 갖춤을 의미한다. 사상적으로는 어떤 것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요소나 부분이 단 하나라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구비된 상태를 뜻한다고 다음백과에는 명시되어 있다. 만다라는 깨달음 수행을 위한 한 방편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다양한 개체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한다.

 

'만다라'라는 낱말 자체는 '원circle'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에 따라 번역했다. 만다라는 힌두교에서 사용되지만 불교에서 만다라 꽃은 연꽃을 가리키며 불상 앞에 놓인 제단을 만다라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인 '만다라Mandala'는 본질을 뜻하는 만달(Mandal)과 소유를 뜻하는 라(la)가 결합되어 '본질의 것', '본질을 소유한 것', 혹은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다라의 의례적인 도안은 힌두교와 불교 이외의 인디언 문화에서도 발견되는데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칼 융은 환자들에게 심리치유의 한 방편으로서 만다라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만다라를 자ㆍ발ㆍ적ㆍ으ㆍ로 그리는 작업은 '개성화(혹은 개체화 혹은 개별화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영어로는 individualization. 필자는 '개성화'라는 용어를 일관되게 사용하겠다)' 과정의 한 단계라고 파악했다.

이것은 융 심리학의 중심적 개념 중 하나다. 그는 이 단계를 통해 의식적인 자아가 지금까지의 무의식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융은 ego와 Self, 이렇게 두 개의 '나'를 상정한다. 태어나서 교육과 환경에 의하여 형성된 '나'를 ego라고 부르고 보다 더 큰 '나'를 Self라고 정의한다.

 

융에게 개성화 과정은 무의식이 의식화됨으로써 '자기실현'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작은 나인 ego로서의 내가 아니라 보다 더 큰 Self로서의 나에 이르러야만 온전한 자기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개성화 과정이란 일반적으로 "개인들이 한 개인으로서 성장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말하자면 한 개인이 최고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한 단계에서 시작하여 의식의 발달을 거쳐 의식적, 심리적으로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의식영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정체성을 가진, 타자와 변별되는 존재로서의 나를 형성하지만 이것이 편견과 선입견에 의하여 한계에 봉착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의식 영역이 확장된 상태. 이 상태의 '나'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는 이러한 의식화와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추진력이 ego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전체인 Self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은 내적 전체인 Self가 지금 이 상황에서 ego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를 통하여 성취하고 싶은 것이 무언인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면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테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융이 전체적인 존재인 Self에 이르기 위한 치유의 과정으로 선택한 만다라는 실제로 그려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체험적 치유의 단계임을 필자는 만다라를 그리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만다라를 그리면서 내 안에서 바깥으로 표현되어지는 형상들과 색깔들은 나의 일부가 의식화되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밝고 안정적이며 질서가 잡힌 그림이, 어느 날은 어둡고 탁한 색감들이 드러난다. 색이나 그림은 필자가 예상하거나 의도적으로 그리려고 계획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는 색깔펜을 들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형상을 펼친다. 무의식적으로 색깔들이 무작위적으로 선택되어지고 빈 공간은 완성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러한 체험들 속에서 무의식과 조우하게 되고 마음은 조금씩 편안하고 안정을 찾게 된다. 무의식과 조우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나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림의 구체적인 형상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형상들은 때로 제3의 눈일 때도 있고 때로 내 안의 어둠과 미움과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때로는 희망과 소망일 수도 있고 때로는 좌절된 마음이 투사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안의 밝음과 어둠들이 그림을 통해서 형상화되는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진행됨으로써 그것들과 마주할 때 사실은 내가 만나고 행하고 느낀 우주의 만물이 형상이며 색깔로 드러남으로써 나는 정신적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융은 우리가 바깥 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정신적 상태 속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경험함으로써 그들을 또다른 나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나의 상징으로써 작용한다. 그들은 내 안의 밝음이거나 어둠이다.

 

상징은 외부 세계에 있는 내적인 무엇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상징을 통해 우리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내적인 비밀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 자신을 보는 것처럼 세상의 외부적인 형상들은 내 안에 숨겨진 비밀의 실재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무수한 상징들이며 세상 속 모든 것은 엄청난 은유로써 기능하게 된다. 그렇게 상징은 두 가지 차원이 결합되는 순간일 수 있다. 만다라가 거대한 상징이고 하나의 엄청난 은유라면 우리는 이 작업을 통해 위와 아래, 지상과 천상, 물질과 영혼, 찰나와 영원, 미움과 화해, 선과 악, 눈물과 웃음, 전쟁과 평화ㆍㆍㆍ등 우리가 늘 반대편에 있다고 상정하는 모든 것들과 항상 만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이들은 상충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상생하는 존재들이다. 내 안에 어둠이 있다면 밝음 또한 존재하는 것이고 밝음이 있다면 어둠 또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징은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의미를 전달한다. 상징은 의미 그 이상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도 없지만 바로 상징을 통해 우리는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나를 만나고 눈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상징은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 안에서 길어올리는 깊은 우물일 수밖에 없다. [칼 융과 차크라]의 아놀드 비틀링어는 내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 나는, 똑같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또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고 한다. 거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은,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들 자신을 거울 속에서 보게 된다. 상징은 이처럼 뚜렷한 이미지로서 그 속에 숨겨진 실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만다라는 고도의 상징이다. 이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있을 수 없다. 잘 그리고 못 그린다는 기준은 매우 기능적인 차원이다. 만다라는 고도의 상징이므로 이는 내 안의 무의식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려진 물 한 모금과 같다. 만다라 작업은 나 자신의 내면의 문을 열고 내 안의 또 하나의 실재와 마주하는 과정이다. 만다라 작업은 정적인 작업이 결코 아니다.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역동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만다라는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는 상징이므로 이 작업을 통해 내 영혼의 현이 울린다. 그 울림은 조금씩 소리를 키우고 어느 순간 나는 그 울림과 함께 교감하게 된다.

 

상징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우리의 사고와 예감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내 안의 일련의 것들과 교감한다. 우리는 관념들 속에 숨어 있는 힘을 느낀다. 

 

그렇다면 필자가 그리는 만다라에서 사용하는 색깔, 무의식적으로 손에 잡히는 그 색깔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비틀링어의 안내를 따라가 보자.

 


빨강. 빨강은 '빨강'이라는 색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색', '색채가 풍부한'이라는 의미도 갖는다고 한다. 밝은 빨강은 원심적인, 어두운 빨강은 차분하고 구심적인 색이다. 원심적인 빨강은 외부 지향적이고 어두운 빨강은 내부지향적인 색이다. 외향적 빨강은 남성적이고 내향적 빨강은 여성적이다. 밝은 빨강은 외부 세계의 영향력을 상징하고 강렬한 감정, 즉 미움이나 사랑을 표현한다. 이러한 외부 지향적 빨강은 역설적이게도 또한 죽음을 상징하는데 왜냐하면 외부로 흐르는 피는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부의 피는 삶을 의미하겠다. 하지만 빨강은 양극의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악마가 붉은색으로 상징된다면 이것은 일방성을 상징하지만 연금술에서 빨강은 상반된 것들이 통합되는 최고의 발달 단계를 상징한다고 한다. 결국 빨강은 모든 것을 포함하나 아직 발달되지 않은 색, 달리 말하자면 온갖 가능성을 가진 색이라고 볼 수 있을까? 힘과 에너지를 상징하기도 하는 빨강.

 
주황은 합성의 색이라고 한다. 지구의 붉음과 태양의 노랑을 동시에 지닌 색. 주황은 하늘의 금빛과 지구의 붉은빛 사이에 위치한다. 신화에서도 주황색은 서로 상반된 것들의 긴장감이나 양극성을 표현한다고 한다.

 
노랑도 양면성의 상징. 태양도 이런 양면성의 상징으로 본다. 활력을 상징하는 태양은 기쁨과 즐거움인 황금빛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땅을 말리고 고통을 주고 만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작열하는 태양이 될 수도 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노랑은 힘, 통찰력, 지력, 이성적 사고와 관련이 있고 반면에 잘못, 불신, 배반, 의심, 광기 등과도 연결된다. 연금술에서 노랑색 유황은 '영적인 금'을 상징하고 '근원적인 원동력'이다. 심리학적 해석에 따르면 정신적 변형의 과정을 불러 일으키고 이 변형의 과정을 묘사한다고 한다. 북유럽에서는 '전진'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초록. 성장의 색이다. 성장이란 사물이 존재함을 의미하지만 아직도 발달 중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록은 중간색으로 낮은 곳의 노랑과 높은 곳이 파랑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다. 초록은 상향의 힘이다. 초록은 완전함과 치유를 가져오는 신의 능력을 상징한다. 중간색으로서의 초록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고, 위쪽과 아래쪽,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between에 있다. 초록은 수용과 애정의 색이며 상반된 것들의 균형을 상징하고 평화를 창조한다고 한다.

 
파랑. 신비한 색. 이중적인 색. 진실과 충성을, 반면에 차가움과 기만을 나타내기도 하는 색.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비밀스러운 색. 칸딘스키는 파랑은 '비세속적인 숭고한 색'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남색. 파랑과 보라가 혼합된 색. 남색은 ego(양극성)와 Self(통합성)의 공존에 적합한 색. 남색은 깨어남에서 수면으로, 수면에서 깨어남으로, 꿈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꿈으로의 변환을 상징한다. 무의식에 매우 가까운 상태에서부터 깊은 통찰력이 생겨난다. 명상, 신비주의, 종교, 공감, 우주적 지성과 지혜와의 결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보라. 빨강과 파랑의 결합. 통합과 융합의 색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색.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주체와 객체, 긍정과 부정, 그리고 다른 모든 양극성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통합.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모든 가치들이 하나로 통합된다.


색깔들이 각자 갖는 특성들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색깔들은 저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서로 기대고 있을 때라야 제대로 자신의 색깔을 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다라를 그리면서 나의 무의식이 선택하는 이 색깔 하나하나는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이 색깔들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으므로 비로소 조화로운 색감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이해불가하며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경험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삶이라는 여정을 통과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과정들을 '삶'으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때로 힘들고 지칠 때가 왜 없겠는가? 항상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삶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해도 그것이 천국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무료함을 가장 큰 지옥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삶이 역동적이라는 것은 그리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삶으로부터 무엇을 깨닫고 배울 것인가에 있다. 우리의 삶의 정점은 결국 우리 의식의 성장에 있다. 그러므로 삶이 온갖 신산을 통하여 성장하듯이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결국은 성장을 위한 통증 정도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지구별 여행은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지 않을까? 힘들 때 쉬어 가고 싶다면 징검다리 삼아 만다라의 세계로 들어와 보라. 먼 길 걸어가다가 아픈 다리 쉬어갈 편안한 벤치를 간절히 원할 때 스스로 마법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늘 속 벤치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삶은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데 있다. 온몸으로 체험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고도의 상징이니까.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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