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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를 놓친다면 어느 때에 나라를 세운단 말이오!

<역사소설 대륙풍운(大陸風雲)-79>유연이 신중하게 한실의 기치를 세우다

이순복 소설가 | 기사입력 2018/04/21 [01:01]

 

▲ 이순복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유림천에서 일어나 좌국성에서 대군을 길러 웅지를 품고 중원 땅에 발을 붙인 유연의 웅비는 눈에 띠게 보였다. 그래서 그의 좌우의 근신들이 한나라로 국호를 내세우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유연은 겸손하고 진중하게 처신하며 더욱 더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자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군사 장빈이 다시 설파하기를

바야흐로 진의 조정은 혜제가 혼군이라 친왕이 득세하여 난맥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괴변이 일고 요사스럽고 이상야릇한 일이 빈번히 나타나며 천촉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여러 왕들은 서로 권세다툼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때에 한나라의 국호를 선포하시지 않는다면 인심을 모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오. 옛적 주 문공은 천하의 3/2를 가지면서도 은나라에 칭신하였소. 그래서 지금까지 그 덕을 칭송하거니와 내가 비록 한의 후예라 하나 오로지 호지(胡地)를 가졌을 뿐인데 어찌 조급히 서두르겠소.”

 

유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연안이 벌떡 일어나 한마디 더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때가 다르며 왕업도 같지 않습니다. 통촉하소서.”

호연안은 다부지게 유연에게 한실의 기치를 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촉한에서 활약했던 위연의 장자이다. 위연은 일찍이 장사에서 한현이 황충을 죽이려하자 분연히 들고 일어나 명장 황충을 구해낸 촉한의 명장이다 그는 크고 작은 싸움을 전승함으로써 촉한을 건국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5호대장에는 들지 못했으며 제갈공명의 사후에는 반역행위를 했다하여 죽였다. 그럼 위연이 죽은 후 정사에서는 그를 어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억울하게 죽은 대장 위연

 

삼국지를 연구한 사람이면 모두 다 위연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위연을 촉에 있어서 유일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은 일호도 변함이 없었고, 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터무니없는 말장난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자오곡의 계책은 북벌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위연이 공명 사후에 거병한 것은 양의와 불화 때문이었지 위연의 반역행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위연의 장자 호연안이 유연에게 출사하여 떳떳하게 선 것은 위의 논거를 웅변으로 대신한다 하여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럼 다시 유연과 대화하던 무대로 돌아가서 보.

이때 밖에서 수문장이 들어와 좌현왕 유연에게 고하기를

서평왕 유의가 관산 관하 두 분과 권솔을 데리고 와서 안내를 청하옵니다.”

그렇소이까. 어서 속히 이 자리로 정중히 인도하시오.”

 

유연이 그와 같이 말하자 모인 사람이 모두 다 기뻐하며 일어섰다. 특히 관방과 관근은 아우들이 왔다하자 어느새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유의는 소열황제 유비의 셋째 아들 양왕 유리의 아들로서 유연과 4촌이며 관산과 관하는 관방과 관근의 동생이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유연은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반가이 맞아드렸다. 유연은 안으로 들어와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아 그간의 역정(歷程)을 물으니 유의가 대답하기를

소문에 들으니 관씨형제가 상규에서 난을 피하여 자동의 이풍 댁에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거기에서 형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연은 유의의 손을 잡고 크게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유의도 반갑고 기쁜 마음에서 솟구치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말을 계속하기를

지금 이특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자동에 웅거해 있고 조흠이 진조에 반기를 들어 성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부 소열황제께서 이룩하신 성지를 버리고 유리낙백(流離落魄)의 세월을 보낸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형님께서 이와 같이 촉한의 명맥을 이으신 것을 보니 감개무량하옵니다.”

유의가 눈물 맺힌 이야기를 마치자 장빈을 위시한 좌중의 사람들이 유연에게 국호를 선포하고 대위에 오를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유연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굳게 사양했다.

 

이날 해가 저물 무렵 우현왕 유선이 찾아왔다. 유총이 인질에서 풀려났다는 소문을 듣고 인사차 찾아온 것이다. 인사를 마치자 유선은 여러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이제는 한의 국호를 만천하에 선포할 때가 찾아왔는데 어찌하여 여러분은 잠잠하시오. 땅이 있고 사람이 있으니 마땅히 나라와 임금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더욱이 진조는 사마씨의 골육상쟁으로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우니 지금이 적기적시라 생각하오. 이런 때를 놓친다면 어느 때에 나라를 세운단 말이오.”

제갈수지는 유선에게 중의를 모았으나 주공께서 응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선은 유연을 향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나라를 세우자고 끈질기게 설명했다. 유선이 그리 성의를 보여 열변을 토하자 유의까지 힘을 더해 적극적으로 유연이 대위에 나갈 것을 권하자 마침내 유연도 말을 아끼며 묵인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하여 길일을 잡아 단을 모으고 위의를 갖추어 유연이 왕위에 올랐다. 때는 갑자년으로 진혜제 영흥 원년이며 AD304년 이었다.

 

유연은 국호를 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원희라 하고 후주 유선을 추존하여 효회황제로 그 부인 호연씨를 황비로 봉했다. 호연씨의 본성은 위씨로 호연안의 누이였다. 그러니 이들 호연씨는 위연의 자손이다. 위연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이야기 할 것은 양의 위연 유봉 마속 이엄이 촉한에 중죄를 지어 결말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삼국지를 읽은 독자라면 다 알 것이다. 헌데 유연이 강지로 들어와 새 나라를 건설할 때는 이들의 자손들이 크게 활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정사와 역사소설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을 수 있으니 이점 알아 둘 일이다.

한황제로 즉위한 유연은 즉시 관제를 정하여 문무관원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한실의 건국에 있어 기록할 사항이 많으나 대부분 약하고 크게 중요한 사람으로 필요한 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열거하면 다음 이야기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승급으로 유선 제갈선우 유의 유루 유환 유응 유굉, 대사마에 유백근 관방, 대장군으로 유영 왕미 관근 장실 황신 호연안 양용 왕계 호연유 조염 장경 요전 이고 장군으로는 조개 황명 왕여 관하 공장 도표 기안 조위 지웅 조응 교희 도호 조번 이찬 번영 마영 호연호 호문정, 호군도위에는 양흥보 관산이 명을 받았고 이밖에 장빈을 군사로 하고 최유와 유광원을 어사대부로 하는 한편 유총을 대장군에 상서를 맡게 하고 진왕에 봉했다. 또 태자 유화는 중서의 일을 맡게 하고 전만년을 추시하여 농서공이라 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외에도 그 동안 공이 있는 여러 장수들을 모두 유격장군으로 하고 유표를 좌국성왕에 봉하니 이로서 백관이 정돈되었다. 이에 문무관원이 모두 일어나 천세를 부르며 유연 황제를 배알했다. 문무관원의 조하를 받고 유연은 엄숙히 말하기를

짐이 중의를 좇아 한조를 이룩한 이상 솔제군의(率齊群議)하고 응천순시(應天順時)할 따름이니 경들은 짐을 버리지 말기 바라오. 짐의 생각으로는 정양에서 경양에 이르는 옛 우리 영토를 찾고자 하는 바이니 경들의 뜻은 어떠한지?”

 

황제의 옥음이 낭랑하게 울리자 먼저 군사 장빈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경양은 우리가 점령한 후 방치하여 폐허가 되었고 또 진주는 강호를 막기 위해 대군이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그 보다는 정양으로 나가되 진양과 평양을 취하여 장차 중원을 도모함이 옳을 것이옵니다.”

장빈의 헌책에 대하여 우승상 제갈선우와 사도 유의를 비롯한 중신들이 군사 장빈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여서 유연은 2자 유총을 평진대원수에 임명하고 장빈을 군사로 하여 유영과 왕미를 선봉에 관방과 호연유를 절충장군에 조염과 호연안을 좌군장군에 황신과 장실을 중군장군에 장경과 관근을 우군장군에 임명하고 요전과 양용을 구응사로하고 조개와 호연호 번영을 군량사로 양흥보를 호군으로 정하여 15만 군을 출전시켰다.

한나라 15만 대군이 보무당당하게 정양으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정양의 수장 위선은 지레 겁을 먹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유총은 정양을 무혈점령하자 즉시 좌국성으로 첩보를 띄우고 탄력성 있는 군대를 전진하라 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대국을 세우는 일이다. 계속 전진하라!”

 

대장군 유총의 명이 떨어지자 한의 대군이 포자를 향하여 단숨에 쳐들어갔다. 포자의 수장 미표는 한의 대병이 몰려오자 예하 군졸을 모두 다 긁어모았다. 그러나 1만군이 체 되지 못하자 적은 군사로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미표는 군사를 이끌고 애구를 지키면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군사를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한군이 오기를 기다렸던 미표 이지만 한의 선봉 왕미와 단 1합에 몸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미표가 맥없이 그리 죽자 군사들은 풍비박산이 되어 저마다 살길을 찾아 달아나버렸다. 그리하여 포자성도 무혈입성이나 다름없이 손쉽게 함락되었다. 포자성으로 들어간 유총과 장빈은 먼저 방을 내어 걸어 백성을 무휼하니 모든 사람이 나와 한나라의 덕을 칭송하고 천세를 불렀다.

포자성은 왕도로도 손색이 없는 좋은 성.’

 

포자성은 왕년에 여포의 양아버지였던 정건양이 축성한 것으로 둘레의 못이 깊고 성곽이 견고한 데다 성안에는 궁궐과 같은 저택이 있고 전량도 풍부하였다. 유총은 장빈과 상의하여 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민심을 모으기 위해 한왕을 이곳으로 옮겨와 있게 하자고 숙의했다. 장빈도 그 의견에 찬성하여 선봉 왕미를 좌국성으로 보내 한왕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유연은 왕미의 보고를 받자 제갈수지 승상과 상의하여 사도 유의와 어사대부 유광원을 좌국성에 남아 지키고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어사대부 최유와 진위장군 호문성을 정양에 남게 하고 제갈승상과 여러 관원을 데리고 포자성으로 옮겨왔다. 비로소 유연이 꿈속에서도 잊지 못한 중원 땅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한황제 유연이 국호를 세우고 처음 밟은 중원 땅인 포자성.’

유총 대장군은 탄력을 받은 대군을 쉼 없이 계속하여 진군시키라!”

 

포자성으로 나온 유연은 크게 만족하며 유총에게 진군령을 내렸다. 유총은 휴식 없이 곧 바로 군사를 개휴현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개휴 현령 가혼은 지략이 깊고 진법에 밝은 장수다. 그는 탐마가 적군이 침입해 온다는 보고를 가져오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군사를 지휘하여 방어대책을 세웠다. 그는 가진 병력이 적으므로 성을 나가 현경계의 요소요소에 군사를 포진하고 방비책을 세웠다. 그리고 가흔 자신이 1만군을 거느리고 현의 경계지로 나가자 적군이 산과 골짜기로 몰려오고 있었다. 가흔은 계획한 방책을 쓸 여유가 없어 임기응변으로 급히 군사를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진두로 말을 몰고 나섰다.

 

한군의 선봉 유영이 바라보니 적장이 진 앞에 겁도 없이 나왔다. 유영은 급히 말을 몰아 가흔 가까이 다가가서 꾸짖어 말하기를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내 앞길을 막는단 말이냐. 썩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우리 진조는 일찍이 땅과 국호를 주어 너희를 후히 대접했거늘 어째서 이렇게 배은망덕 하는가.”

가흔의 말에 유영은 벽력같이 호통 치며 말하기를

네 이놈, 이 땅은 본래 한실의 것이거늘 은혜는 웬 뚱딴지같은 말이냐. 빨리 항복하여 네 잔명을 보존하고 군사들의 무고한 생명을 지키게 하라. 네 눈에는 대병과 용장이 보이지 않느냐.”

 

말을 마친 유영은 창을 비껴 쥐고 말을 몰아 나가 가흔을 맞았다. 가흔도 물러서지 않고 강차를 휘두르며 유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가흔은 유영의 적수가 아니었다. 싸운 지 5합을 견디지 못하고 유영의 창에 찔려 낙마하고 말았다. 가흔이 낙마하자마자 한장 교희는 번개같이 달려가 그의 수급을 베어 안장에 달았다. 유영은 가흔의 군사를 여지없이 짓밟으며 단번에 개휴성 아래로 진출했다. 남아서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교희가 창에 꿰어 든 것이 가흔이란 것을 알고 급히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해 버렸다<계속>wwqq1020@naver.com

 

*필자/이순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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