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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 정규하(아우구스띠노) 신부 생애 소개

pgu77@naver.com

박관우 본지 객원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10/17 [09:07]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필자가 브레이크뉴스 2015년 10월 12일자 “잊혀진 독립운동가 윤예원 신부의 항일운동” 제하의 칼럼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천주교 성직자로서 항일운동을 하였던 尹禮源(토마스) 신부를 소개하였다.

 

본 칼럼에서 풍수원 성당 주임신부로서 항일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 신부로서는 최초로 성당을 건립하는 업적을 세웠던 독립운동가 鄭圭夏(아우구스띠노) 신부의 80평생 생애를 소개한다.

 

정규하는 1863년(고종 1)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에서 정기화(鄭基化)와 한 마르타 사이에 3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정규하 일가는 혹독한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하여 피신생활을 하였으며, 그가 15세가 되는 해에 충북 충주 부근의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늘 궁핍을 면치 못하였고 춘궁기만 되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하였는데 산에 가 나무를 베어 시장에 지고 가 팔거나 암탉을 길러 계란을 파는 나날에도 소년 정규하는 사제성소의 꿈을 키워 가고 있었으니 가히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충주 소탱이에서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주한 이후 1884년(고종 21) 리델 주교 선종으로 제7대 조선대목구장에 오른 블랑 주교로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은 정규하는 인천항에서 동창인 한기근(바오로),최 바오로,문 바오로 등과 함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페낭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정규하는 기후와 풍토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결단을 내려 1891년(고종 28)에 귀국하여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1896년(건양 1) 4월 26일 명동성당에서 金大建(안드레아),崔良業(토마스) 신부에 이어서 세번째로 사제로 서품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하여 이 날 정규하 이외에도 강도영과 강성삼이 함께 수품되었는데 이들은 김대건,최양업에 이어서 한국에서 세 번째로 사제가 된 분들이다.

 

한편 정규하 신부는 사제로 서품된 이후 그 해 6월 10일 첫 부임지로 풍수원 성당 보좌신부로 발령이 났으며, 그로부터 2개월후인 8월 17일 초대 주임신부인 르메르 신부에 이어서 제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해에 발생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弑害事件)과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하여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제에 의하여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전국적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조직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풍수원 성당에 일군(日軍)에 쫓겨서 의병들이 피신하게 되는데 정규하 신부는 이런 의병들에게 침식을 제공하는 편의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중에서 일부가 의병활동에 투신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성당의 사랑방에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정 신부가 민족의식이 강한 성직자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삼위학당에서 여러과목을 배우게 되는데 특히 논산에서 초빙한 신자교사 박 토마스가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당시의 정황으로 비추어 볼 때 외국의 망국사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가 이런 움직임을 간파하고 결국 박 토마스를 체포하여 옥고(獄苦)까지 치룬 것을 통하여 여실히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제들중에서 직접,간접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던 사제를 거론한다면 본 칼럼에 소개하고 있는 정규하 신부이외에 필자가 이미 다른 칼럼을 통하여 소개하였던 윤예원 신부라 할 수 있다.

 

윤예원 신부는 황해도 은율 성당 주임신부로 재임중, 상해임정에서 파견된 임 빌리버의 권유로 상해임정 권고문 500부를 신자들에게 배포하고 더 나아가서 군자금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직접적인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정규하 신부같은 경우 직접적인 항일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의병들의 침식을 제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학당까지 설립하였으니 이는 유인물 배포,군자금 모집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본다.

 

한편 항일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였던 정규하 신부의 또 다른 업적이 있었으니, 한국인 신부로서 최초로 성당을 건립하였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났던 해인 1907년(융희 1)에 성당 신축 착공을 시작하여 경술국치가 발생한 해인 1910년에 마침내 완공하여 그 해에 경성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하여 축성식을 거행하게 되니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정규하 신부의 집념으로 신축된 풍수원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구성되었으며, 120평의 규모를 이루었으며, 당시 국내에서는 7번째로 신축되었는데, 특히 강원도에서 최초로 신축된 성당이었으니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정규하 신부는 이러한 성당 신축이외에 사제양성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김윤근(요셉,1909년),서병익(바오로,1910),김휘중(요셉,1917년),신성우(마르코,1920년),박일규(안드레아,1924년),정원진(루카,1926년) 등 6명이 풍수원 성당 출신 사제들로서 정 신부 재임중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정 신부는 사제양성 못지 않게 교회의 조직 확장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1920년 춘천교구 곰실공소를 춘천성당(현:춘천교구 죽림동 성당)으로, 1923년 홍천 송정공소를 홍천성당으로 이어서 1930년 횡성공소를 횡성성당으로 각각 승격시켰다.

 

이러한 여러가지 업적이외에 정 신부가 탁월한 의술을 겸비하였다는 사실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침술(鍼術)에 조예가 깊어서 당시 여러 지방에서 난치병(難治病)으로 고생하던 환자들이 풍수원 성당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한편 1939년 4월 25일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춘천지목구가 새롭게 설정되면서 경성대목구 소속의 사제이었던 정 신부가 춘천지목구로 전출되었다.

 

이후 1942년 6월 김학용 신부가 풍수원 성당 보좌 신부로 부임하면서 45년이상 주임신부로 재임하였던 정규하 신부가 노환으로 성당운영을 위임한 뒤 요양하던 중, 이듬해인 1943년 10월 23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던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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