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32) - 원유의 역사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9/13 [09:42]

오늘날 모든 산업의 원동력인 기름(OIL)은 천연으로 얻어진 탄화수소의 혼합물질 상태로 정제되지 않은 석유(石油-Petroleum)를 원유(Crude oil)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유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이란 수사(SUSA)지역의 ‘아르데리카’(Ardericca)마을에서 요새의 장벽을 구축하기 위하여 오늘날 아스팔트로 부르는 천연 역청(瀝靑)인 ‘비튜멘’(bitumen)을 가져왔다고 전하였습니다. 이는 천연으로 얻어지는 원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천연아스팔트와 같은 퇴적 기원 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름(OIL)에 관한 인류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후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의 저자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 BC. 90~BC. 30)는 지중해의 자킨토스 섬(Zakynthos)과 유프라테스강 지류의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서 산출되는 ‘비튜멘’(bitumen)을 언급하며 오늘날의 주요한 유전지대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은 서기 347년경 240m 지하의 원유를 대나무 파이프를 통하여 추출하여 소금광산에 연결하여 소금을 정제하는 연료로 사용하였던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 (좌) '심괄'(沈括. 1031~1095)과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 (우) ‘게오르그 바우어’ (Georgius Agrcola. 1494~1555)와 저서 ‘데 레 메탈리카’(De re metallica)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석유(石油)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은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심괄'(沈括. 1031~1095)입니다. 그는 1086년부터 집필하여 1093년 출판한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석유(石油)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인류사에서 가장 논리적인 광물학을 정리한 독일의 광물학자 ‘게오르그 바우어’ (Georgius Agrcola. 1494~1555)에 의하여 석유(Petroleum)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1546년부터 그가 발표하였던 논문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556년에 출판된 저서 ‘데 레 메탈리카’(De re metallica)에서 처음으로 석유(Petroleum)라는 용어가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저서는 광산의 형성과 채굴에 대한 기술적 내용에서부터 금속의 추출과정은 물론 유리 제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독일의 시성 괴테는 이를 일러 ‘인류에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예찬하였으며 역사는 그를 광물학의 아버지로 평가하였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유에 대한 언급은 영국의 탐험가이며 시인이었던 월터 롤리(Walter Raleigh. 1552~1618)의 1595년 발표된 저서에서 베네수엘라 지역 유전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영국에 감자와 담배를 전한 인물입니다. 
     
이와 같은 원유를 증류 정제하여 등유를 추출한 인물이  페르시아의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라지’(Muhammad ibn Zakarīya Rāzi. 854~925)입니다. 그는 이슬람 의학의 창시자로 인류의 의성 ‘히포크라테스’(BC .460~BC. 377)의 4대 체액이론을 바탕으로 전염성 질병을 일반 질병과 구별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천연두와 홍역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남긴 그의 업적을 딛고 영국의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1796년 면역이론의 천연두바이러스 ‘종두법’을 발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 프랑스 세균학자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가 병원성 미생물이 전염성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규명하여 면역성  백신(vaccine)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 의학의 창시자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라지’가 인류 최초로 과학적으로 원유를 정제하여 알코올과 등유에서부터 여러 화학 물질을 추출한 비밀은 고대 그리스에 의사이며 약리학자인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Pedanius Dioscorides)가 수은을 추출하는데 사용하였던 증류기 '알렘빅(Alembic)'에서 출발하였음을 살피게 됩니다. 그가 발표한 저서 비밀의 책(Kitab al-Asrar)에 수록된 원유정제법을 보면 원유를 가열하여 화산 지대와 온천 지대의 천연 염화암모늄을 사용하여 증류기 '알렘빅(AlembIc)'을 통한 증류 공정으로 여러 화학물질과 등유 등을 추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시대에 의사이었던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가 수은 추출용으로 사용한 증류기 '알렘빅(Alembic)'이 원유 정제로 그리고 훗날 위스키 증류 용구로 사용된 내용에서 역사와 기록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절감하게 한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전의 개발과 원유 정제는 9세기경 카스피해에 내접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지역에서 최초로 유전이 개발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정제 술이 과학적으로 등장한 것은 1745년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황후시대이었습니다, 러시아 북서부 우랄산맥 서쪽 욱타(ukhta)에 최초의 정제공장에 세워져 등유를 정제하여 러시아 교회와 수도원에 공급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적인 기록들을 헤아려 가다 보면 주요한 유전지대를 언급한 아랍의 역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수디’(Al-Masudi. 896~956)를 만나게 됩니다. 아랍의 ‘헤로도토스’로 평가받는 그는 페르시아의 많은 도시와 카스피해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에서부터 인도대륙을 여행하였습니다. 또한, 인도양과 홍해 그리고 지중해를 항해하였으며 아프리카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는 여행 중에 많은 고대 서적과 자료를 발굴하였습니다. 947년 그가 집필하여 평생을 보완하여 펴낸 역사의 백과사전 ‘황금과 보석광산의 초원’(The Meadows of Gold and Mines of Gems)은 아담과 이브의 창조 신화에서부터 이슬람의 역사는 물론 인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신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 바다를 건너 신라라는 나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아랍인들이 정착하여 생활하였던 신라는 비옥한 농토와 맑은 물을 가진 나라로 금과 광석이 많은 나라로 기록하였습니다.

 

▲ (좌) ‘페다니우스 디오스코리데스’(Pedanius Dioscorides)와 증류기 '알렘빅(Alembic)'(우)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라지’와 그의 저서 Photographed at Musee de Cluny 출처: https://en.wikipedia.org / http://www.travelingtoitaly.com/ http://www.thelivingmoon.com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사실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그가 중국을 왕래하던 무역 선원 ‘아부 자이드 알 시라피’(Abu Zayd al-Sirafi)를 만나 중국에 대한 많은 서적을 구입하여 연구하였으며 실체적인 경험을 가진 그를 통하여 중국의 문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접하였던 사실과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무역 선원 ‘아부 자이드 알 시라피’는 여러 차례의 중국 항해를 통하여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도에서 소말리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 이르는 많은 이야기를 담은 책 ‘고대 인도와 중국의 회계’(Accounts of China and India)를 저술하였습니다. 이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무역 선원 ‘아부 자이드 알 시라피’가 언급한 우리나라 신라에 대한 기록의 근원은 아랍의 상인이며 작가이었던 ‘술라이만 알 타지르’(Sulaiman al-Tajir)가 851년에 펴낸 ‘고대 인도와 중국의 소식’에 기록 되었던 신라에 대한 내용이 바탕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담긴  ‘알 마수디’(Al-Masudi. 896~956)의 ‘황금과 보석광산의 초원’은 오스트리아의 동양학자 ‘알로이스 스프렌거’(Aloys Sprenger. 1813~1893)가 1849년 ‘마수디의 황금 초원’(Masudî's meadows of gold)이라는 요약본으로 영문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프랑스의 ‘아시아 학회’(Société Asiatique)가 1861년부터 1871년까지 총 9권으로 프랑스어와 아랍어로 완역 출판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출판 작업에 참여하였던 이가 프랑스 역사학자이며 동양학자인 ‘샤를 바르비에르 드 메이넬드’(Charles Barbier de Meynard. 1826~1908)와 프랑스 출신의 동양학자이며 아랍 언어학자인 ‘아벨 파베트 드 쿠르테이유’(Abel Pavet de Courteille. 1821~1889)입니다.

 

이러한 원유와 연관된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면서 석유(石油)라는 명칭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심괄'(沈括. 1031~1095)에 대한 연구가 서양세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영국의 과학역사학자이며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한 중국학자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1929년 노벨 의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저명한 생화학자 ‘홉킨스’(Frederick Gowland Hopkins. 1861~1947)박사의 제자로 대학을 졸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영국대사관 고문으로 중국에 갔습니다. 이후 중국의 과학사를 연구하면서 인류사에 빛나는 중국과학의 역사를 제치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배경에 대한 자신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비교 철학적인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출판하였습니다. 그의 저서에 보면 중국의 과학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날씨와 천문을 관측하던 고려 시대에‘ 서운관’(書雲觀)에서 조선 시대에 ‘관상감’(觀象監)으로 바뀐 천문학의 연구와 혼천의와 물시계와 같은 과학기구에서부터  별자리의 그림 지도 제작에 대한 뛰어난 우리의 과학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석유는 기계문명이 과학화되기 시작하면서 그 수요가 늘기 이전까지는 램프를 켜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1745년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황후시대에 우랄산맥의 욱타(ukhta)에 최초의 정제공장이 세워진 이후 캐나다의 의사이며 지질학자이었던 ‘에이브라함 피니우 게스너’(Abraham Pineo Gesner)에 의하여 1846년 석탄을 가열하여 맑은 기름을 추출 해내는 등유(kerosene) 정제법이 최초로 개발되었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영국의 화학자 ‘제임스 영’(James Young. 1811~1883)은 더비셔 주(Derbyshire)의 알프레튼(Alfreton) 석탄광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의 정제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1848년 친구인 화학자 ‘에드워드 멜드럼’(Edward Meldrum. 1821~1875)과 협력하여 원유 정제회사를 설립하였지만, 탄광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아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탄광의 석탄층에 열을 가하면 기름이 다시 생산될 수 있는 사실에 착안하여 많은 실험을 거듭하면서 저속의 증류법에서 생겨나는 파라핀 오일과 여러 화학물질의 추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1852년 영국과 미국에 특허로 출원하여 유사한 원리로 가장 빠르고 더욱 좋은 성능의 정제법을 성공시킨 캐나다의 ‘에이브라함 피니우 게스너’는 최초의 특허권을 빼았기면서 등유(kerosene)라는 상표를 등록하여 북미 석유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 (좌) 알 마수디(Al-Masudi)와 저서 ‘황금과 보석광산의 초원 (우) ‘아부 자이드 알 시라피’(Abu Zayd al-Sirafi)와 저서 ‘고대 인도와 중국의 회계’ 출처: https://en.wikipedia.org /     © 브레이크뉴스

 

당시 1850년 영국의 지질학자 ‘에드워드 윌리엄 비니’(Edward William Binney. 1812~1882)는 영국의 대표적인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1817~1911)가 발견한 석탄광산을 바탕으로 정제에 성공한 화학자 ‘제임스 영’과 ‘에드워드 멜드럼’과 협력하여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는 셰일 및 역청탄에서 추출한 오일을 나프타 및 윤활유로 정제하는 세계 최초의 정유 공장이 열리게 된 역사입니다. 이러한 등유 정제 술이 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사실들을 살펴보면 시대의 변화가 요구하는 흐름을 실감하게 합니다. 이는 미국 석유산업의 아버지로 알려진 ‘사무엘 마틴키어’(Samuel Martin Kier. 1813~1874)가 1851년에 정제에 성공한 등유 ‘카본 오일’(Carbon Oil)의 정제과정에서 더욱 실감 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석탄운송사업과 소금공장을 운영하면서 쌓아놓은 석탄에서 생겨난 오일덩어리를 운하에 버리면서 어느 날 그곳에 불타는 광경을 보면서 미국의 화학자와 협력하여 양질의 정제법에 성공하여 미국 최초의 정유공장을 설립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등유 정제의 세계적인 바람은 동유럽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폴란드의 약사 ‘이그나치 루카시에비치’(Ignacy Łukasiewicz. 1822~1882)는 1853년 등유 정제에 성공하여 1853년 세계 최초로 등유 램프 가로등을 세웠으며 1854년 현대식 정유공장을 설립하였습니다.

 

이처럼 등유 정제에 대한 세계적인 바람이 일던 시기에 이란 남서부의 수사(susa) 언덕에 영국에 이어 프랑스 ‘들라포아’ 부부에 의한 유적발굴이 시작된 이후 프랑스 지질학자이며 고고학자인 ‘자크 모르강’(Jacques Jean Marie de Morgan. 1857~1924)이 1897년 새로운 유물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지질학자로서 이란의 여러 지역을 탐사하면서 서부지역의 ‘케르만샤주’(Kermanshah)의 ‘카스르 이 시린’(Qasr-i-Shirin) 지역에서 유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란 수사(SUSA)지역의 ‘아르데리카’(Ardericca)마을에서 천연 역청(瀝靑)인 ‘비튜멘’(bitumen)을 가져왔다고 기록한 내용과 맞닿은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언급한 이라크 시리아 지역의 ‘비튜멘’(bitumen)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자크 모르강’이 작성한 유전보고서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의 개발을 추진하였던 사람이 ‘윌리엄 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1849~1917)이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의 금광사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페르시아(이란) 주재 영국 대사이었던 친구 ‘헨리 드루먼드 울프’의 제안으로 유전탐사와 개발을 결심하고 광업권 취득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1900년 4월 14일 파리에서 개막되었던 파리만국박람회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1855년 파리 샹젤리제에서 열린 첫 만국박람회 이후 5번째 박람회에 43개국이 참가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인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하였고 디젤기관의 발명자 독일의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 1858~1913)이 출품한 땅콩기름으로 운행하는 기관차가 등장하였습니다. 화려한 개막식이 열린 후 역사적인 세 사람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 국’(이란)의 총감독을 맡았던 ‘앙투안느 기타기’(Antoine Kitabgi)와 이란주재 영국 전권대사 ‘헨리 드루먼드 울프’(Henry Drummond Wolff. 1830~1908)와 그리고 울프 대사의 친구 광산업자 ‘윌리엄 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 1849~1917)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박람회에 참석한 페르시아(이란)의 왕 ‘무자파르 알-딘 샤’(Mozzafar al-Din Shah. 1853~1907)와의 최종 회담을 앞두고 마지막 협상을 조율하였던 것입니다, 이틀 후 페르시아(이란)의 왕 ‘무자파르 알-딘 샤’와의 회담에서 유전개발에 대한 허가를 확인한 이후 1901년 연간 수익의 16%를 페르시아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60년간의 이란지역의 원유개발권을 확보합니다.

 

이후 1903년 회사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유전탐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쉽게 찾았던 유전이었지만 그러나 당시 새로운 시추기법에 따른 막대한 장비 제작비용과 유전탐사 비용의 증대로 극심한 자금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에 자금 확보를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던 ‘윌리엄 녹스 다아시’와 함께 긴박하게 움직였던 세력이 바로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날로 급변하는 기술의 변화로 기름 수요가 점차 높아지면서 이란의 전 지역 석유개발권을 가진 ‘윌리엄 녹스 다아시’의 경영권이 프랑스이거나 러시아제국으로 넘어가게 되면 국가적으로 입어야 하는 손실과 향후 그 영향력이 국가적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영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투자자를 찾아 이를 중재하여 맺어준 회사가 ‘부르마 석유회사’(Burmah Oil Company)이었습니다, 이 회사는 1886년 ‘데이비드 시메 카길’(David Sime Cargill.1826~1904)이 인도와 아시아에서 유전개발을 목표로 설립한 ‘랑군 오일회사’(Rangoon Oil Company)를 ‘캠벨 커프맨 핀레이’(Campbell Kirkman Finlay. 1946~1906)가 인수하여 이름을 바꾼 회사입니다, ‘캠벨 커프맨 핀레이’는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핀레이’(James Finlay. 1727~1792)가 인도에 건너가 선교사로 활동 중에 1750년 섬유회사로 사업을 시작하여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차 재배 농장으로 성공한 기업입니다. 
     

▲ (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포스터 (중) ‘윌리엄 녹스 다아시’(William Knox D'Arcy) (우)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 시추 현장과 오일 운송차량/ 출처: https://en.wikipedia.org /     © 브레이크뉴스

 

당시 핀레이 홍차 사업과 운송사업 등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던 ‘부르마 석유회사’가 많은 영향력을 가진 영국 해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렵게 추진된 자금지원으로 시추작업을 계속하였으나 연이어 시추에 실패한 ‘윌리엄 녹스 다아시’는 자신의 지분을 ‘부르마 석유회사’에 거의 양도하며 시추작업을 이어갔지만 원유시추에 실패한 ‘윌리엄 녹스 다아시’와 ‘부르마 석유회사’는 마침내 이란 유전개발의 포기를 결정하고 1908년 5월 이란 현장에 파산을 통고하는 전보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5월 26일 원유가 쏟아져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에 1908년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가 설립되어 1909년 ‘부르마 석유회사’는 이를 자회사로 편입하여 주식을 공개 상장하였습니다. 이후 1911년 대영 해군 제독에 오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당시 석탄으로 운행하던 영국함대를 석유로 대체하는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국 정부에 석유회사에 투자를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20년 동안의 비밀을 유지하는 조건계약으로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AOC)의 주식 대부분을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1925년 이란에서 조지아(그루지야)출신의 육군 장교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 1878~1944)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카자르 왕조가 막을 내리고 이란의 팔레비 왕조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1935년 ‘영국 페르시아 석유회사’(APOC)는 영국 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로 이름이 바뀌었고 1954년 다시 '영국국영석유회사'(BP-British Petroleum Company)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중동 주요 산유국의 원유 카르텔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영국의 주요한 기업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역사라는 소중한 불빛을 주시하며 걸어간 선구적인 인물들의 눈빛이 낳은 결과라는 사실을 깊게 인식하여야할 것입니다. 다음 칼럼은 (313) 메디치가와 피아노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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