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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26) - 감출 수 없는 민낯의 역사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8/17 [13:09]

1795년 무렵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은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을 오가는 유일한 항구로 전략적인 중요 거점이었습니다. 케이프타운 연안의 ‘테이블 만’(Table Bay)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남서부에 있는 ‘폴스 만’(False Bay) 사이에는 군사 요충지인 ‘로벤섬’(Robben Island)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곳을 거점으로 오랫동안 무역을 해왔으며 특히 악명 높은 노예매매 무역의 중요 거점이었습니다. 당시 1795년 1월 프랑스 혁명정부의 지원을 받은 세력에 의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이 전복되면서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바타비아공화국(Batavian Republic)이 세워졌습니다. 이에 네덜란드가 소유하고 있는 케이프타운을 프랑스가 점유하게 되면 인도로 가는 영국의 항로가 막히게 되는 매우 중대한 거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클라크’장군은 네덜란드군을 정복하고 케이프타운 외곽의 ‘와인버그’(Wynberg)지역에 영국 식민지 정착촌을 건설하였습니다. 이어 영국군 병력이 주둔할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케이프타운 총재로 임명되어 오는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1737~1806)와 주요 병력을 실은 수송선이 본국에서 도착하면 인수절차를 마치고 그 배를 타고 부임지 인도로 출발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 (좌) Cape Town (중) Robben Island (우) George Macartney와 식물학자 George Leonard Staunton, 乾隆皇帝. 1711~1799)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케이프타운 총재로 부임하여 오는 ‘조지 매카트니’는 1781년부터 1785년까지 인도 마드라스(첸나이) 주지사로 근무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조지 매카트니’가 중국에 최초로 외교사절단으로 방문하여 황제를 알현한 인물이기에 잠시 이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그는 1784년 제2차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전쟁을 벌였으며 이후 마드라스(첸나이) 경찰청을 설립하는 등 행정개혁에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공적으로 인도 총독에 오르는 제안을 물리치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인도에 근무하면서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가 동양의 거대한 대륙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차와 실크 그리고 도자기 등을 수입하면서 많은 무역적자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또한, 중국은 1757년 모든 해상무역에 대한 창구로 광저우 항구만을 개방하여 독점적인 규제조치 광저우 무역제도(Canton System)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영국 동인도 회사 입장에서는 대규모의 무역 젹자를 개선하기 위하여 중국에 대대적으로 팔수 있는 상품으로 약품으로 분류된 아편을 선정하여 양귀비재배를 장려하였던 인물이 바로 ‘조지 매카트니’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산된 준비 속에 규제조치를 풀기 위한 방안으로 무역대사관 설치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협상을 위하여 1787년 ‘찰스 앨런 카스카트’(Charles Cathcart. 1755~1788)대령이 무역 대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출발하였으나 1788년 6월 항해 도중 병사하여 무산되었습니다. 이에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으로 돌아가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 3세 왕’(George III. 1738~1820)의 측근들을 설득하여 중국대사관 설치를 위한 100명으로 구성된 중국방문단을 승인받았습니다. 이에 1792년 9월 3척의 배에 다수의 선교사와 그리고 화가 ‘윌리엄 알렉산더’(William Alexander, 1767~1816)와 ‘토머스 하키’(Thomas Hickey. 1741~1824)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을 태우고 중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조지 매카트니’의 이름에서 비롯된 ‘매카트니 선교 대사관’(Macartneymission Embassy)이라는 선교 사업을 명분으로 중국에 도착한 ‘조지 매카트니’는 영국을 출발한 지 1년 만인 1793년 9월 북경에서 건륭황제(乾隆皇帝. 1711~1799)를 알현하였습니다. 중국에 도착한 최초의 영국 외교사절인 ‘조지 매카트니’특권 대사는 당시 망원경과 시계와 같은 많은 신식문물을 진상하며 극도로 제한된 무역의 돌파구를 열어보려 노력하였으나 성과는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영국왕실이 보내온 선물을 외교문서에 공물로 규정하였을 만큼 강력한 위상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영국 외교사절이 중국 땅을 밟게 되면서 향후 더욱 다양한 압박이 지속하여 결국 중국에 휘몰아친 아편전쟁의 발단이 ‘조지 매카트니’ 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또한, 엄밀하게 헤아려보면 ‘조지 매카트니’의 중국방문이 굳게 닫혀 있는 거대한 대륙 중국의 실체적인 면면들을 염탐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사실에서 보면 그 성과는 성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조지 매카트니’가 케이프타운의 총재로 부임하게 되는 사실은 인도와 본국의 중간 지점인 전략거점에서 그가 맡아야 할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영국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거쳐 인도 마디라스(첸나이)항으로 최종 기착할 대형 수송선 ‘해왕성 호’(Neptune)가 해군함대의 보호를 받으며 대서양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수송선에는 케이프타운에 주둔할 병사와 인도 마드라스(첸나이) 동인도회사에 근무할 병사들이 뒤섞여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미지의 땅에 서게 될 환상과 두려움을 깨물며 파병 경험이 있는 선임병사의 무용담에 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시끄러운 선실을 벗어난 곳에 몇 일째 밀담을 나누는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송선 해왕성 호 책임 선원 ‘도널드 트레일’(Donald Trail. ?~1814)와 영국인 '알렉산더 테넌트'(Alexander Tennant. 1772~1814)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테넌트'는 인도에서 목사로 선교활동 중이던 큰형 ‘윌리엄 테넌트’(William Tennant, 1758-1813)를 찾아가는 수송선에서 선원 책임자 ‘도널드 트레일’과 친분을 맺었던 것입니다. 케이프타운이 오랜 역사를 가진 네덜란드의 노예무역 거점으로 오랫동안 죄수와 노예 수송을 맡아온 ‘도널드 트레일’ 대위가 노예무역 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에 이끌려 고심하다가 인도로 가던 길을 멈추고 케이프타운에 내렸던 것입니다.

 

▲ (좌) 해왕성(Nettuno) 호‘ (중) ‘마퀴스 콘웰리스 호’(Marquis Cornwallis)(우) ‘존 줄리어스 앵거스틴’(John Julius AngersteIn)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잠시 당시 영국의 범죄자 죄수들의 처우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은 1600년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이후 많은 노동자가 필요한 상황을 맞게 되면서 1615년경부터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죄수 중 처형대상이 아닌 죄수들을 식민지에 노예노동자로 보내어 죄수 생활을 하게 하였습니다. 대다수 죄수를 북미 아메리카 노예노동자로 보내졌다가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반대 법안이 마련되면서 중지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새롭게 건설한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식민지에 1787년경부터 정착민으로 보내져 식민지 개척 사업에 노동 인력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도널드 트레일’은 바로 1790년 영국에서 호주 시드니만 식민지로 출발한 2척의 영국 함정과 4척의 죄수와 노예 수송선으로 구성된 제2함대의 죄수 운송선 중 하나인 영국의 가장 거대한 노예 회사 ‘캠던 칼버트 킹 회사’(Camden, Calvert and King)의 노예 수송선의 수송책임자이었습니다. 당시 ‘도널드 트레일’이 책임자로 있었던 선박에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이 사건은 노예와 죄수들의 너무나 열악한 운송 여건과 학대가 알려지면서 세기의 사건으로 비화하였으나 당시 노예 회사와 연결된 고급관리들의 비호로 흐지부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도널드 트레일’ 대위는 군복을 벗고 그 분야에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노예 회사 ‘캠던 칼버트 킹 회사’와 계약을 맺어 죄수와 노예 수송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의 가장 거대한 노예회사 ‘캠던 칼버트 킹 회사’(Camden, Calvert and King)는 1760년부터 미국에 죄수 수송 및 노예거래를 시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죄수 수송사업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던 것입니다. 당시 해상 보험업자 ‘언더라이터’(Underwriter) 들이 모여 공동으로 보험 중계를 하던 ‘로이즈’(Lloyd’s)사의 회원이 노예매매 회사 ‘캠던 칼버트 킹 회사’에 투자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로이즈사’의 창업자이며 당시 언더라이터 이었던 ‘존 줄리어스 앵거스틴’(JohnJulius AngersteIn. 1732~1823)은 노예매매에 투자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런던 제일의 미술품 투자가로 그가 세상을 떠난 1823년 영국정부에서 오스트리아에서 받은 전쟁보상금으로 그의 소장품 중 38점을 매입하면서 영국 최초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이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 (좌) 아프리카 노예 (우)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 와 (Uncle Tom's Cabin) https://en.wikipedia.org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당시 제일 거대한 ‘캠던 칼버트 킹 회사’와 계약하여 죄수와 노예 수송을 전담하던 ‘도널드 트레일’(Donald Trail. ?~1814)이 젊은 청년 '알렉산더 테넌트'(Alexander Tennant.1772~1814)와 의기투합하여 케이프타운을 거점으로 새로운 노예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재정적인 후원을 맡았던 인물이 ‘도널드 트레일’의 선배로 오랫동안 수송선 선장으로 일하였던 '마이클 호간'(Michael Hogan. 1766~1833)입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해군으로 제대한 이후 인도에서 중국 광저우를 오가는 무역선 선원으로 일하면서 상인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후 인도와 유럽을 오가는 무역선 선장으로 일하면서 투자자를 만나 선박을 구입한 이후 1786년 인도총독으로 부임한 콘월리스 장군(Corn wal]lis) 체제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죄수 수송 및 노예수송선 선장으로 일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북아메리카 양곡사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면서 4척의 선박을 가진 상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791년 죄수 수송선 해왕성(Nettuno) 호를 사들여 1794년 ‘마퀴스 콘웰리스 호’(Marquis Cornwallis)로 명칭을 바꾼 후 영국 죄수 수송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도널드 트레일(Donald Trail)과 알렉산더 테넌트 (Alexander Tennant)를 만나 케이프타운에서 불법 노예 거래를 통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매매는 1807년 영국의회에서 노예매매금지법이 통과되면서 금지되었지만, 이후에도 노예수송선의 선적을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로 등록하여 법망을 피하면서 불법 노예 매매를 계속하여 막대한 수익을 챙겼던 것입니다. 

 

대서양 거친 바다를 항해하던 배에서 만난 인연을 기회로 불법 노예 매매를 통한 거대한 재산가가 되었던 '알렉산더 테넌트'(Alexander Tennant.1772~1814)의 삶과 극명하게 비교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친형 ‘챨스 테넌트’(Charles Tennant. 1768~1838)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직조 기술을 습득하여 면직 직조공장을 운영하면서 재래 방식의 표백제 개발에 치중하였습니다. 그는 화학자 ‘찰스 매켄토시’(Charles Macintosh. 1766~1843)와 함께 일하면서 기존의 염소와 칼륨의 반응에서 얻어진 표백제를 저렴한 석회로 대체하여 정수용 표백제 ‘차아염소산칼슘’(Calcium hypochlorite)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스코틀랜드 클라이드 강에 인접한 항구도시 글래스고(Glasgow)에 자리하였던 그의 공장은 연간 3만여 톤의 석탄을 소비하는 세계 제일의 화학 공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1825년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이 처음으로 철도를 건설하자 글래스고(Glasgow)에 철도건설을 추진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선구적인 주춧돌을 놓았던 것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 세계사 교수로 아프리카 노예사의 권위자인 ‘패트릭 매닝’(Patrick Manning. 1946~)박사를 비롯한 많은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에서부터 19세기까지 2,000만여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아메리카에 거래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중 노예수송선에서 사망한 노예가 150만여 명에 이르며 무자비한 노예 포획과정에서 400여만 명이 사망하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문명의 바람이 일지 않은 이유 하나만으로 아프리카 신성한 사람들을 노예로 부린 슬픈 역사를 안고 오늘의 강대국 미국이 존재합니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식민지 정책으로 약소국의 경제권을 침탈하여 국익을 채우고 부의 축적을 위하여 인간을 사고파는 노예매매의 만행까지도 사업으로 장려한 그릇된 역사를 안고 유럽의 강국 영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역사를 미국의 여류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는 1852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온 세계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릇된 역사를 교과서로 삼아 우리의 강토를 찬탈하고 수많은 젊은이를 강제로 끌고 가 성노예로 착취하고 징용하였던 일본은 모든 나라가 그릇된 역사의 아픔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일말의 양심도 뭉개버린 채 날조된 역사를 후손에 가르치는 만행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름이 해를 가리듯 잠시 민낯을 가릴 수 있겠지만 날조된 역사를 배운 후손들이 가져야 할 부끄러움과 수모의 크기를 키우는 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영원한 민낯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칼럼은 (127) 돌아온 ‘맬컴 보이’ 이야기입니다.*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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