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25) - 인도를 겨냥한 이집트 정복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8/13 [13:34]

1783년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의 식민지를 모두 잃은 영국은 인도 식민지 정책의 전면적인 구상을 강화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프랑스는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로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은 시기에 나폴레옹이라는 전쟁 영웅이 나타나 정복의 바람이 일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예상할 수 없는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면 당시 프랑스 나폴레옹(Napoléon, 1769~1821)이 1796년 결혼식을 마친 이틀 후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달려가 1797년 이탈리아 주요 도시를 정복하고 개선장군이 되어 프랑스에 돌아왔습니다. 이에 영국은 물론 유럽 주요나라가 향후 전개될 상황을 주시하며 극도로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공화정 정부와 상인들은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지 거점이 확대되어 가는 상황을 우려하며 나폴레옹이 이를 해결하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늘 구상하고 있었던 세계 정복을 향한 그림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이집트 정복 이후 영국과 반목을 가지고 있는 인도의 왕국과 동맹하여 영국의 주요 거점을 제거하여 인도를 장악할 것이라는 구상을 정부와 협의하여 이집트 진군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영국은 연일 대책회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좌) 나일 해전 (중) 나폴레옹 (우) 넬슨 제독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준비과정을 마친 나폴레옹은 다음 해 1798년 5월 19일 대규모의 병력과 대포를 실은 함대 선단에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와 기술자로 구성된 탐사단을 태워 이집트로 출정하였습니다. 당시 이와 같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탐지한 영국 정부는 프랑스 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의 전투력을 감안하여 병력의 이동로를 최상의 비밀로 유지하면서 다양한 혼선 책을 시도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19일 프랑스 남부 지중해 해군기지 ‘툴롱’(Toulon)을 출발하여 극도의 보안 속에 연안을 타고 지중해 코르시카 섬과 이탈리아반도 사이의 리구리아 해를 거쳐 이탈리아 점령도시 제노바 항에 중간 기착합니다. 이어 대기 중이던 함대와 합류하면서 주요한 보급품을 싣고 코르시카 섬을 타고 내려와 6월 7일 시칠리아 섬을 지나 6월 9일 몰타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몰타 섬'은 십자군 전쟁 때에 가독교인의 보호를 위하여 창설된 기독교 단체인 '몰타 기사단'(Knights of Malta)이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몰타 섬의 요새 항구 '발레타 항'(Valletta)의 사용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6월 12일 '몰타 섬'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몰타 섬의 천혜의 요새 항구 '발레타 항'(Valletta)에 소수의 점령부대를 남겨두고 6월 19일 몰타를 출발하여 크레타 섬을 기점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의 전설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은 코르시카 섬과 이탈리아 반도 사이의 엘바 섬 근해와 나폴리에서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활동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폴리 왕국의 영국대사로 있던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730~1803)으로부터 프랑스 함대가 몰타 섬 방향의 시칠리아 해를 통과했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6월 22일 몇 일 전 프랑스 함대가 몰타 섬을 출발하여 동쪽으로 떠났다는 정보가 다시 입수되었습니다. 넬슨 제독은 프랑스군의 착륙지로 예상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향해 프랑스 함대의 추격을 시작하였지만, 나폴레옹은 이를 따돌리고 6월 29일 정찰대의 도착에 이어 7월 1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후 수심이 낮은 알렉산드리아를 피하여 ‘아부키르 만’(Aboukir Bay)에 함대를 정박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카이로를 향하여 진군 중에 7월 13일 오스만 제국의 부대와 연합한 '맘루크 왕조'(Mamluk) 사령관 ‘부무라드 베이’(Murad Bey.1750~1801) 부대와 벌인 ‘수브라 키트 전투’(Battle of Shubra Khit)와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Battle of the Pyramids)에서 승리한 이후 7월 24일 카이로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 함대 추격에 실패하였던 영국의 넬슨 제독이 ‘아부키르 만’(Aboukir Bay)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고  8월 1일과 2일 이틀간의 일대 격전을 벌인 ‘나일 강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불태워버립니다. 8월 11일 이러한 참패 소식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동행하였던 각 분야의 학자들을 독려하여 이집트 통치에 대한 전환적인 정책들을 준비합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진군을 계속하여 시나이 반도를 거쳐 주요 거점을 정복하면서 1799년 3월에 2개월에 걸친 총 공격을 가하였지만 이스라엘 북부의 요새 도시 '아크레'(Acre)의 점령에 실패한 이후 모든 군대를 이집트로 철수합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집트 통치를 후임자로 지정한 ‘장 밥티스트 클레베’(Jean Baptiste Kléber. 1753~1800)와 ‘자크 프랑수아 므누’(Jacques-Francois Menou. 1750~1810)사령관에게 맡기고 지중해에 포진하였던 영국 함대의 눈치를 살피며 1799년 8월 파리에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패전에 따른 초라한 귀국을 빌미로 재판에 부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은 즉시 측근 장군들을 불러 행동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른바 1799년 11월 9일 거행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총재정부를 뒤엎고 집정정부를 수립하여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 (좌) Siege of Acre (중) Battle of the Pyramids (우) 1798년 이집트 카이로 폭동출처: https://en.wikipedia.org/ http://www.christianityandrace.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프랑스의 이집트 정복은 영국의 전설적인 바다의 명장 '넬슨'에 의하여 ‘아부키르 만’(Aboukir Bay) 해전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된 싸움이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동방정책의 전면적인 변화를 품고 프랑스로 돌아가 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잡은 이후 혼란한 국내 상황을 정비하는 사이에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공격합니다. 1801년 3월 오스만 제국과 연합한 영국군의 공격으로 8월 30일 프랑스는 항복의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활동하였던 프랑스 학자들은 프랑스군과 함께 영국이 제공한 배편으로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이와 같은 나폴레옹의 원대한 꿈을 품은 이집트 정복은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갔지만 3년에 이르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고대 이집트의 찬연한 문명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진 점은 유일하게 업적으로 남았습니다. 그중 ‘로제타석’(Rosetta Stone)이야기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군이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이후 폐허가 되어있던 요충지 ‘카이트 베이 요새’(Qa'it Bay)를 재건축하였습니다. 요새의 재건축을 관리하던 프랑스 육군 기술 장교 ‘삐에르 프랑수아 부샤르’(Pierre François Bouchard. 1771~1822)는 요새의 담에 들어있는 알 수 없는 문자로 빼곡하게 들어찬 ‘로제타석’(Rosetta Stone)을 발견합니다.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한 직감으로 그는 즉시 이러한 사실을 통보하여 학자들이 도착하였으나 문자의 해독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BC. 356~BC. 323)이 세상을 떠난 후 대왕의 친구이며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ios I. BC 367~BC283)가 고대 이집트를 차지하여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왕조의 다섯 번째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 왕' (Ptolemaios V. BC. 210~BC. 181)의 업적을 전국 신전에 세운다는 '멤피스 법령'이 담긴 비석이었습니다. 비석 상단에는 ‘성각문자’(聖刻文字)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로 비석 중앙은 초서체인 ‘데모틱문자’(demoticscript)로 담겨있으며 하단은 성각문자 ‘히에로글리프’를 번역한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로제타석’(Rosetta Stone)이 바탕이 되어 훗날 프랑스가 낳은 언어학의 천재이며 이집트 학자이었던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 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에 의하여 1822년 인류의 비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로제타석’은 당시 현지에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 발견된 요새’는 1466년 이집트에서 활동하였던 무슬림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의 술탄 ‘카이트 베이’(Qa'it Bay, 1416~1496)가 구축하였던 요새로 당시 프랑스군에 의하여 재건축이 이루어지면서 나폴레옹의 뜻에 따라 요새의 이름이 ‘줄리앙 요새'(Jullien Fort)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아끼던 비서 ‘토마스 프로스퍼 줄리앙’(Thomas Prosper Jullien. 1773~1798)대위가 선발대로 와서 이집트 현지 원주민에게 학살당하였던 안타까움을 담은 배경이었습니다. 이러한 ‘로제타석’은 이집트가 영국에 정복되면서 본국으로 옮겨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었던 것입니다.

 

▲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로제타석’(Rosetta Stone)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고대문명의 발상지 이집트 정복을 통하여 인도 대륙의 진출을 구상하였던 나폴레옹의 계획은 바다를 지킨 넬슨 제독의 덫에 걸려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인도 대륙의 진출을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방안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인도 식민지 사수를 위한 혁신적인 인적 개편을 단행하여 영구 통치로 향한 길을 닦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26) 돌아온 ‘맬컴 보이’ 이야기입니다.*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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