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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23) - 역사를 대표한 노예 상인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8/09 [15:46]

지난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며 국제사회를 위협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강국 미국에 1607년 영국의 식민도시가 처음 세워진 이후 169년이 지난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241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곳곳에서 갈등과 반목의 칼날을 세운 역사가 지속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과거의 숨결을 품고 현실을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사실에서 세계 최대의 강국 미국이 식민지에서 출발하였던 북미 식민지 정책에 대한 역사를 헤아려 보기로 합니다.

 

영국은 스페인의 후원으로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1500년 포르투갈의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1468~1520)이 연이어 브라질을 발견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건설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엘리자 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1533~1603)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식민지 탐험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1583년 항해가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ert. 1539~1995)가 캐나다에 도착하였습니다.

 

또한, 1584년 탐험가 ‘월터 롤리’(Walter Raleigh. 1554~1618)가 연속적인 탐험으로 감자와 담배를 영국으로 가져오는 등 희망의 파란불이 켜졌으나 실질적인 식민지 구축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1607년 ‘제임스 6세 왕’(JamesⅥ. 1556~1625) 시대에 당시 영국 정부의 인가를 받은 무역투자회사인 런던 버지니아 컴퍼니(London Virginia Company)가 미국 버지니아에 최초의 정착촌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1609년 북대서양에 있는 버뮤다 섬에 식민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 (좌) 콜럼버스 (중) Jamestown (우) London Virginia Company출처: https://en.wikipedia.org/ http://www.ajhw.co.uk  © 브레이크뉴스



이와 함께 1620년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에 세워진 영국의 식민도시는 영국에서 탄압받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도피하여 세운 도시로 영국 정부가 주관한 식민지 정책이 아닌 자연적으로 생겨난 영국의 자치도시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1630년경 뉴햄프셔와 메릴랜드 그리고 1663년 캐롤라이나로 식민 도시가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은 1664년 네덜란드 식민지이었던 뉴 암스테르담을 정복하여 현재의 이름인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 플로리다를 접수하는 등 13개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1763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캐나다 퀘벡을 지배하게 되어 북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지배하는 성공적인 정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북아메리카에서는 뒤늦게 발판을 놓은 영국의 식민지 확장 정책에 따라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원주민 인디언과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척한 식민지 영토를 고수하려는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의 끝없는 전쟁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쟁탈의 일대 격전이 마무리된 후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통한 강력한 조세 정책과 무리한 규제 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식민도시를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 운동이 전개되면서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미국은 네덜란드와 스페인 등의 은밀한 지원을 받으며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격렬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프랑스 입장에서 북아메리카가 영국제국의 식민지로 완전한 정착이 이루어지게 되면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 자명하게 변동을 가져오는 사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7년 전쟁을 통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에 패하면서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이에 프랑스 ‘루이 16세 왕’(Louis XVI. 1754~1793)으로서는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여 영국의 힘을 막아내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의 마이소르 왕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프랑스는 1766년부터 1769년까지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제1차 전쟁이 끝난 후 절치부심하던 마이소르 왕국을 긴밀하게 지원하여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의 1780년 제2차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미국의 독립전쟁 중에 동시에 재개된 전쟁으로 영국이 미국과 벌인 독립전쟁과 인도의 제2차 마이소르 왕국의 전쟁은 사실상의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의 독립전쟁은 이러한 프랑스의 의중과 크게 다를 수 없는 입장을 가진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전쟁 중기에 개입하게 됩니다. 1779년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스페인은 영국과 대적하였으며 네덜란드는 배후에서 미국 측과 무기거래를 통하여 묵시적으로 미국을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 (좌) 1783년 파리조약(Treaty of Paris) 광경 영국 ‘조지 3세 왕’(George III). 존 애덤스(John Adams).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출처: http://revolution.mrdonn.org/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에 영국은 1780년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여 미국과 인도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삼중의 전쟁을 동시에 벌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삼중의 전쟁 중에서도 영국은 1784년 5월 탄탄한 해군력을 가진 네덜란드를 침몰시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많은 나라가 연합한 미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하면서 1783년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파리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1783년 9월 3일 파리 베르사이유 궁에서는 대영제국의 ‘조지 3세 왕’(George III. 1738~1820)을 비롯한 실무진과 당시 미국의 13개 식민도시를 대표하는 대표단이 역사적인 파리조약(Treaty of Paris)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독립된 주권을 영국이 인정하는 역사적인 조약이었습니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1783년 11월 25일 마지막 영국군이 뉴욕을 떠나면서 1607년 식민지를 구축한 지 176년 만에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역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평화조약의 배경에는 뛰어난 협상력으로 격동의 물결을 잠재운 외교의 귀재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피뢰침의 발명가로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대표를 맡았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입니다. 영국에서 청교도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온 조상의 후손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학교를 졸업하고 인쇄업에 뛰어들어 미국에서 처음으로 신문 발행이 시작되었던 시기에 1721년 형과 함께 ‘뉴 잉글랜드 쿠란트’(New England Courant)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이후 출판업으로 변경하여 다양한 서적을 출판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여러 분야의 인물과 교유하였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1749년 세계 최초로 낙뢰를 방지하는 피뢰침을 발명한 배경도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히 경제학의 가장 주요한 통계의 바탕으로 사용되는 인구 총조사에 대한 초석을 놓은 인물입니다.

 

1755년 그가 발표한 ‘인구의 증가에 관한 관찰’(Observations on the Increase of Mankind)은 1730년과 1740년경에 가장 빠른 성장률을 가져온 미국 인구에 대한 사례를 정리하여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공급의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이는 영국의 대표적인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벤저민 프랭클린’이 미국의 독립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에 평화조약 체결을 통하여 전쟁을 종식하고 미국의 독립을 가져오려는 목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벌인 외교적 노력은 외교사에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평화조약을 체결한 대표단을 상세하게 헤아려보면 짚고 가야 할 중요한 내용이 살펴집니다. 대영제국의 실무진으로 참석한 정치가이며 과학자인 ‘데이비드 하틀리’(David Hartley. 1732~1813)은 연상 심리학을 정립한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하틀리’(David Hartley. 1705~1757)의 아들입니다. ‘데이비드 하틀리’는 전쟁 반대자로 특히 "노예 매매는 신의 법과 인간의 권리에 위배 된다"는 결의안을 관철해 영국에서 최초로 노예 매매제도를 폐지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데이비드 하틀리’와 함께 영국 대표단으로 참석한 ‘리처드 오스왈드’(Richard Oswald. 1704~1784)는 전형적인 상인이었습니다. 영국 군대에 말의 목초를 공급하여 사업 기반을 세운 이후 전쟁터에 빵을 공급하여 사업을 확장하였습니다. 이후 담배 무역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그는 영국과 주요 무역거점에 대표적인 노예 상인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 대표단으로 참석한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는 청교도의 후손으로 변호사 출신의 정치가이며 미국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1780년 미국 정치의 바탕이 되었던 매사추세츠 헌법을 탄생시킨 인물로 미국 독립 이후 초대 부통령과 제2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는 노예 반대론자로 매사추세츠 헌법을 기초하면서 노예제도의 폐지에 대한 내용을 담아 이를 바탕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측 대표 ‘헨리 로렌스’(Henry Laurens. 1724~1792)는 프랑스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조상의 후예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노예상인으로 부를 축적하여 정치지도자가 되어 평화조약 대표단으로 참석한 인물입니다. ‘헨리 로렌스’는 북아메리카 노예시장을 대표하는 상인으로 여기서 주목할 내용은 평화조약의 영국 대표로 참석한 ‘리처드 오스왈드’와 아프리카 노예들을 전 세계에 공급하였던 노예 거래의 파트너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사실입니다. 당시 노예거래는 유럽의 ‘리처드 오스왈드’와 아메리카의 ‘헨리 로렌스’가 모든 주도권을 양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말없이 흘러갔지만, 대표적인 노예폐지론자와 노예상인의 우두머리가 영국과 미국의 역사적인 대표로 참석한 사실은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 (좌) 노예 폐지론자 영국의 ‘데이비드 하틀리’(David Hartley)와 미국의 ‘존 애덤스’(John Adams) (중) 노예상인 영국의 리처드 오tm왈드’(Richard Oswald)와 미국의 ‘헨리 로렌스’(Henry Laurens)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미국의 독립으로 북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을 잃었던 영국과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 식민지 인도는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 중요한 거점으로 오랜 전설을 간직한 동방의 나라 인도에 피할 수 없는 전운의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24) 14살 ‘말콤’ 소년 파병대 이야기입니다.*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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