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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이 1963년에 만든 ‘신단정도회(神檀正道會)’

<한국종교 산책>한국 신종교와 신단정도회

최중현 박사 | 기사입력 2017/04/28 [09:04]

육이오 동란이 일어나 서울의 시민생활이 혼란에 빠지자 정득은은 측근 제자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녔는데, 영적 계시는 늘 그들이 피할 곳을 가르쳐 주었으며, 접촉되는 인근주민들에게 비행기의 폭격시각 및 폭격지점 등에 대한 예언을 하여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주민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는 일도 있었다.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수복되자 정득은은 서울시내로 들어와서 용산구 원효로 2가에 「에덴 유치원」이란 것을 만들고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는 일에 나섰고, 굶주리고 있던 인근 동민들에게 쌀을 배급하거나 죽을 쑤어 나누어주는 등의 구호사업을 하다가, 일시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계시리에 있는 장로교회를 맡아 지도하다가 교회내분으로 이단으로 몰려 그만 둔 일이 있었고, 서울 흑석동에서 고 이용도 목사의 친척이 운영하던 교회를 맡아 지도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평택 등지로 내려가 있게 된 것은 아마도 1951년의 1․4후퇴 뒤 얼마 동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이 기간 동안에 정득은의 곁에 늘 함께 하고 있던 이는 방호동이었다.


방호동은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서울교회(상도동 소재)에서 정득은을 만나 따르게 된 이래로 한결같이 꾸준히 그녀를 모셔왔는데 육이오 발발 뒤 언제인가부터는 ‘하와’ 입장인 정득은 앞에 ‘아담’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한다.  방호동이 자신의 “거룩한 피”를 딴 사람들에게 일체 전수(傳授)해주지 않았던 까닭도 그의 이러한 특별한 사명(즉 “아담”으로서의 사명)에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새로운 피의 원천인 정득은으로부터 직접 피를 받아 그녀의 영적인 아들의 입장에 섰다가 영적인 신분의 한 단계 상승을 이루어 그녀와 같은 수준 즉 영적인 “남편”의 자리에 선 방호동의 입장에는 김한 및 이수완의 입장과는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방호동은 뒷날 서기 1957년에 김경래 기자와의 면담이 있던 때에도 여전히 미혼상태였다는 점으로 보아, 김한 및 이수완의 입장과는 다른 방호동의 특별한 입장이 유념되고 있었다고 사료된다.


이 부분은 ‘새 주님’으로 일컬어졌던 평북 철산군 김성도 여인의 경우와 비교해볼 만도 하다.  김성도는 타계하는 날까지 자신이 ‘주님’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에, 정득은이 제자들 중의 하나인 방호동을 자기의 아담으로 삼고 자신은 그 앞에 하와의 입장에 선 것은 김성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행보였다고도 보여지는 것이다.


어쨌든 서울 흑석동에서의 교회담임을 그만 두고 한강을 건너서 시내로 들어와 용산구 모처에서 지내던 중에 정득은은 김연(金演)이라는 이를 만나서 제자로 삼게 되고 그의 협조 아래 1953년 2월 서울 용산구 신계동에 기도원을 설립하여 그 이름을 ‘대성심(大聖心) 기도원’이라 부르게 된다.  󰡔生의 原理󰡕에 인용된 이 기도원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大聖心祈禱院의 目的
聖經은 敎理이니라
(가) 心身의 修練으로써 血肉的 慾心을 超越하고 心中에 예수님을 모시고 피와 살이 全幅으로 基督化하기 위하여 修道함을 목적함
(나) 聖經을 土臺삼아
(다) 예수께서 律法이나 先知者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完全케 하러 왔노라 하사 完全케 하시기 위하여 받으신 苦難을 힘입어 先知者의 豫言하신 말씀을 한 말씀도 어김없이 履行하심을 본받아
(라) 우리는 基督의 敎訓을 守行하기 위하여 그의 豫言 「너희는 나보다 큰 일을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心身의 修練을 쌓아 主의 거룩하심 같이 우리도 거룩하여 大聖心의 뜻을 成就하려는 데 있음 <아멘>”


이 해의 6월 11일에는 정득은이 계시를 받아 붓을 들고 직접


“大聖母 丁得恩
白雲道師“


라고도 썼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 붓글씨가 󰡔生의 原理󰡕의 제2쪽에 실려 있다.  아마 이 무렵부터 그녀의 제자들은 그녀를 ‘대성모(大聖母)’라고 불렀던 것 같으나, 원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에 포함되어 있던 “聖心” 및 “聖母” 등의 모티프가 왜 하필 이 무렵의 정득은의 계시 속에 이렇게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필자로서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정득은은 여전히 20명 정도의 신자들만을 데리고 ‘계시받기’에 주력하게 된다.  1958년에 들어와서는 10여 년 전에 구술해 방호동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해놓았던 계시문을 엄유섭이라는 인물의 협조를 얻어 “生의 原理”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주목되는 것은 방호동보다도 김연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방호동에 대한 정보는 1957년 김경래를 통해 알려진 뒤로는 그 흔적이 포착되지 않고 있는 반면, 김연은 계속해서 정득은을 모시며 1970년대까지 그녀의 측근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방호동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현재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어쨌든, 1958년 음력 3월 19일에는  그로부터 수년 전에 계시를 통해서 찾아냈었던 이조말기의 지도를 이승만대통령에게 올리기 위해서 정득은 및 3명의 여신도가 함께 들고 사진촬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生의 原理󰡕 제3쪽의 상반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우편 또는 인편을 이용하여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에게 그것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이렇게 자유당 치하를 지낸 정득은은 1960년의 4․19 혁명,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 등의 와중에서도 계속 조용히 은둔자와도 같이 세월을 보내다가 1963년 2월에는 김연과 더불어 ‘신단정도회(神檀正道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는 정득은이 받은 계시와 ‘강기산(姜麒山)’이라는 인물이 받은 계시에 의해서 단군을 받드는 단체였다고 하나, 강기산이란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드러난 바가 없고 단체창립 및 그 운영에 관여하지도 않았던 인물로 보이는 만큼, 결국 신단정도회는 정득은을 영매(靈媒)로 하고 김연이 실제로 이끄는 한 소규모 단체였다고 짐작된다.


1965년 1월에는 神檀正道會 이름의 문건 하나가 배포되었는데, 등사판으로 찍어낸 것으로서 표지까지를 합하여 총 13쪽의 국한문혼용 유인물이었다.  멸실의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여기 그 전문을 인용해 두기로 하자.
“國民精神振興團合․天下一家建設運動趣旨文


神檀正道會


趣旨書
二十世紀 後半期인 이날의 國際情勢는 어찌 이같이 微妙錯雜하고 또 國內形便은 어찌 이같이 暗澹晦冥한가?
이는 天體의 回轉과 地氣昇降의 自然理勢로 春․夏․秋․冬 四節이 循環變化하는 것과 같이 人類社會의 思想과 政治․經濟․文化等 歷史의 變遷도 大自然의 法則으로 循環 變易되는지라 現下 世界는 混沌에서 整備를 찾고 分裂에서 歸一을 찾고 闇黑에서 光明을 찾고 鬪爭에서 平和를 찾으면서 戰爭없는 하나의 無憂泰平한 地上天國인 極樂의 自由世界 建設의 偉大한 新人類史를 創造하고 있는 것이다.


平和는 天地의 本質이요 人類는 萬物의 靈長이며 自由는 人類의 本能인지라 驟雨가 不終日하고 暴風이 不崇朝라는 老子의 말씀 그대로 動亂의 驟雨와 戰禍의 暴風이 現下에 더할바 없을 것이로되 이는 반다시 멀지 아니하여 光風霽月의 새로운 때를 마지할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는 모-든 人類의 眞摯하고도 끊임없는 努力이 前提되지 아니할 수 없으며 이러한 努力의 한 개 斷面을 우리들 白衣民族도 自負하고 있음을 自覺하여야 한다.


그리고 宇宙眞理는 窮陰이 다한 곳에 陽春이 닥쳐 오는 것과 戰爭이 끝나는 곳에 平和가 이루어진다는 歷史의 輪回性을 確信하고 우리들의 그러한 努力이 同族을 爲해서나 人類全體를 爲해서나 必然的인 前提임을 自負하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들은 人類의 發祥地요 地球의 始發点인 이땅에서 敢히 「神檀正道」의 旗幟를 높이 세워 人類의 自由의 基盤과 平和의 契機를 造成코저 蹶起하는 바이다.


現下 國內外情勢를 一瞥하면 三尺童子라도 아는 바와 같이 破滅에 臨한 人間의 精神이 모두다 物質 그것에 奴隸가 되고 있으니 國家의 不祥事, 社會의 不德不意之相은 모-두다 여기서 비저나는 것이다.


物質은 勿論 人類生活에 必要不可缺의 重要한 한 개의 要素임은 否認할 수 없는 事實이나 그러나 이와 同時에 物質 그것만으로는 宇宙萬物의 靈長인 人類로서 到底히 참된 人間生活을 營爲할 수 없는 것도 너무나 平凡한 常識的인 事實에 屬하는 바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特奇한 事實로서 亞細亞의 過去와 現在를 熟知하며 哲學的 原理의 還元作用인 大自然의 法則으로 變易케 된 이날의 새로운 時代를 先覺한 「和蘭國」 에벗․반덜부라긋 辯護士의 最近著書 󰡔亞細亞民族의 蹶起󰡕라는 冊子에 「亞細亞는 分明히 文化의 搖籃地로서 큰 宗敎運動의 根源地이다」라고 하였고 또 印度 貴族出身인 타골詩聖이 最近發刊한 그의 詩集 「初生달」이라는 冊子中    「「KOREA」에 付託함」이라는 題目下에는 󰡔일찌기 亞細亞의 黃金時期에 빛나는 燈불이 하나의 韓國(KOREA) 그 燈불 또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빛이 되리라󰡕 한 詩文으로써 朝鮮國(KOREA)의 過去와 未來를 明示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天君이신 檀君天祖의 建國精神인 「弘益人間」體制의 人道主義 燈불을 다시 켜서 唯物主義中毒과 畸形的資本主義의 舊殼을 깨끗이 脫棄하고 太古經典에 明示한 「原天大道」인 天, 地, 人 三才一體의 倫理道德 「正道」로써 全世界人類의 精神과 行動을 統一케 하여 人類도 天地와 같이 秩序整然한 人間生活의 本然相을 顯揚케 하는 것이 眞正한 世界平和를 이룩하는 바른 길임을 强調한다.


於是에 우리들 「神檀正道會」 會員同志들은 天眞一理의 人間精神을 追求하면서 自由와 平和를 內包한 眞, 善, 美의 價値的窮極을 享有코저 하오니 뜻있는 四海同胞兄弟姉妹들이여 平凡하고도 正大한 이 弘益人間, 道德精神運動에 躊躇없이 參加하사 眞正한 世界平和와 世界一家建設에 獻身努力하시여 全世界 全人類로 하여금 하나님의 天福과 大恩惠를 한글같이 享受하도록 懇冀하여 마지안는 바이다
.一九六五年 一月  日


神檀正道會


五 大 綱 領
一.   우리는 天父, 天師, 天君 三神의 높으신 靈에 日常感謝의 듯을 드린다
二.   우리는 天賦의 良心에 順從하며 物慾과 利己心을 버린다
三.   우리는 萬物의 生長發展愛護와 「弘益人間」體制의 人道主義를 實踐한다
四.   우리는 人類愛의 絶對境을 發揚하며 愛人愛族을 信條로 한다
五.   우리는 倫理道德 「正道」를 實踐하며 物質偏重의 害毒을 除去한다


宣言文
우리 悠久燦爛한 朝鮮나라(大韓民國)는 天師이신 桓雄天王께서 天父이신 桓因의 命을 받들어 天符三印을 가지시고 白頭山靈峰에 「風伯」 「雲師」 「雨師」等 三千의 天神을 引率下降하사 繼天立極하시고 創設하신 人類의 樂園인 聖地이며 우리들 現三千萬民族은 人類의 始祖이신 檀君天祖의 直系民族인 白衣使族인지라 天體의 回轉과 地氣昇降의 自然理勢로 春, 夏, 秋, 冬 四大季節이 循環變化하는 還元作用의 大自然法則으로 變易케 된 二十世紀 後半期인 오늘날 우리들 「神檀正道會」會員一同은 白衣民族이 自負하고 있는 檀君大祖의 建國精神인 「弘益人間」體制의 人道主義와 「原夫大道」인 天地人三才一體의 倫理道德 「正道」의 燈불을 다시 높히 들고 人類의 精神과 行動統一로서 人道上 있을 수 없는 人種差別과 民族的差別 及 貧富貴賤의 階級的差別없이 人權의 平等과 經濟均等의 無憂泰平한 地上天國인 極樂의 自由平等世界로 統一케 하며 人類도 天地와 같이 秩序整然한 人間生活의 本然相을 顯揚케 할 世界平和建設의 使命 完遂에 獻身努力할 것을 滿天下 兄弟姉妹 앞에 삼가 宣言한다


一九六五年  一月   日
  神檀正道會 會員一同


實 踐 方 法   (救民八條)
一. 國家와 民族精神을 單一統合키 爲하여 國祖요 民族의 祖上이며 人類의 祖先이신 天祖檀君을 禮儀的으로 또는 儀式的으로 崇靈信奉함은 勿論 世界人類의 最大功獻祖倧이신 檀君, 釋迦, 孔子, 老子, 예수, 五大聖人를 合同奉安하는 祭壇을 建立하여 超宗派的 超民族的 儀式禮儀로 敬拜케 한다.
(이 行事에 不參者는 非愛國, 非民族일 것이요 五大聖者의 反逆者일 것임)
二. 人類의 覺醒과 白衣民族의 所望과 幸福을 찾고 榮光을 宣揚하기 爲하여 檀君 天祖가 人類의 始祖임을 周知케 하기 爲하야 檀君歷史 九千一百六十一年 考證事蹟을 蒐集編纂刊行하여 國內外와 世界에 宣布한다.
(目下 李元善博士, 崔 棟博士等이 蒐集中임)
三. 人類의 幸福과 平和를 爲하여 生命을 받친 人士와 國家와 民族을 爲하여 生命을 던진 國內外人士를 無漏調査하여 그 事蹟顯揚하며 또 世上에 讚揚(調刻, 銅像建立)等으로 그 英靈을 慰安한다
四. 地域社會마다 大極旗揭揚臺을 築造하되 前示 五大聖人의 奉安殿을 倂立 敬拜케 하여 國民精神을 國家와 聖賢에게 集中케 한다
五. 本運動은 政治的, 宗敎的 介入을 超越키 爲하여 純民間自意的 國民精神作興運動으로서 國家와 民族을 爲하는 擧族的精神運動임을 自覺하고 愛國愛族과 正義正道實踐하는 또는 指向하는 人士 自發的으로 參與케 함을 原則으로 한다
六. 世界水準的 公民資質을 養成하기 爲하야 弘益人間의 精神에 基하여 地域社會와 部落마다 文盲退治를 急成함은 勿論 現學制 中學過程까지는 隣佑相互連帶로 鄕約的으로 短期敎育하는 奉仕와 義務을 自道實踐한다
(現在 麻浦區新石洞 甲子公民院에 實施中)
七. 靈通, 神通, 道通 接神者等 男女老少를 莫論하고 宗敎, 非宗敎를 超越하여 그의 啓示가 있다 할 時는 會員相互間 迅速調査하여 報告又난 連絡書面으로 그 啓示內容을 蒐集 總本部에 提出한다.
八. 人間의 禮儀凡節 崇尙, 示範키 爲하여 老少長幼에 秩序를 遵守하며 對人如天精神으로 相敬하여 會員相互間은 合掌으로 敬意敬禮을 表한다 (以上은 救民八條로 함)”


여기서 필자의 눈길을 특히 끄는 부분은 “靈通, 神通, 道通 接神者等 男女老少를 莫論하고 宗敎, 非宗敎를 超越하여 그의 啓示가 있다 할 時는 會員相互間 迅速調査하여 報告又난 連絡書面으로 그 啓示內容을 蒐集 總本部에 提出한다”는 부분이다.  정득은은 이때까지도 엄연한 “영통인”이었고 김연, 등이 그녀를 지속적으로 따르고 섬긴 것도 그녀의 이러한 영능 때문이었음이 엿보이는 것이다.


신단정도회가 창립된 뒤부터 정득은이 생애를 마감하는 날까지의 약 20년 동안 정득은과 김연 사이의 이러한 사제관계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던 것 같다.  1973년에 신종교 연구자 이강오 및 오병무가 이 단체를 방문했을 때에 정득은이 직접 인터뷰에 응하였으나 이미 고령으로 그 발언에 조리가 서지 않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일례로 이 단체가 단군을 섬기는 단체인 것으로 듣고 찾아온 이강오 맟 오병무로서는 이 단체에서의 신앙대상이 과연 단군인가 하는 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으나 정득은의 대답은 때로는 ‘단군’이라 대답하기도 했고 때로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 대답하기도 했으며 강증산이 자기에게 임했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 무렵 이 두 연구자는 김연과도 별도의 인터뷰를 가졌는데, 이 인터뷰의 기록을 오병무가 보관하고 있어서 역시 멸실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여기에 간추려서나마 인용해 본다(필체를 판독키 어려운 경우에는 그 글자의 수효만큼 ○표를 넣었음):


神壇正道會의 本司는 서울 용산구 桃園洞 四의 七五號.
神壇正道會의 代表委員은 金演 씨.
金演 씨는 평남 順川郡 殷山面에서 출생.
金演 씨는 7세 때부터 13세까지는 儒書를 공부.
金演 씨는 18세 때에 평북 妙香山 上元菴에 들어 佛敎 工夫를 하였음.
金演 씨는 23세 때부터 사회생활에 ○○.
金演 씨는 37세 때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음.


金演 씨는 예수교 系統에서 丁得恩 女史의 神啓示에 依해서 38세 때에 45세까지 󰡔生의 原理󰡕라는 著書를 갖음 (丁得恩 女史의 이름으로 내었음).


金演 씨가 하는 檀君系統의 硏究는 단기 4290년(45세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도 또한 丁得恩 女史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檀君과 水雲을 否認하지 않았던 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金演 씨는 45세 때부터 國祖에 대한 생각을 갖다가 49세 때에 姜기山 先生을 만나서 姜기山 先生이 주장하는 檀君始祖를 崇拜해야 한다는 說에 感化가 되어서 檀君을 信奉하기 시작하여 단기 4296년 2월에 神壇正道會를 발족하였다.  그리하여 自家에 會館을 두고 檀君影像을 모시게 되었다.


金演 씨가 4292년경에 ○○(丁得恩 女史와 같이 ○○)한 「甲子共愍院」의 이름은 天上에서 내려온 啓示임.  지금은 「公民院」이라고 함.  (甲子는 天上地上의 뜻; 새 時代 새 出發, 天地開闢을 뜻함)  共愍院은 天上의 啓示에 依하여 貧窮한 어린이들을 無料로 敎學시키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새 世代에는 貧富의 差가 없이 모두가 다같이 工夫하게 되니 먼저 示範하게 하라는 뜻이었다.  이 啓示가 곧 檀君天祖의 啓示라고 하였음.


金演 씨의 檀君觀은 다음과 같다: 檀君은 一個의 人間的인 敎祖라기보다 天上에서 내려온 全人類의 始祖라고 본다.  그러므로 檀君은 우리의 始祖인 同時에 全世界人類의 始祖 겸 國祖이다.  그러므로 檀君始祖의 崇奉으로써 全世界人類가 大同團結해서 天下一家가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宗敎라면 宗敎도 되겠지만 宗敎로 行勢치 않음은 檀君은 一個 敎祖를 넘어섰다고 보기 때문이다.  本會에서는 萬敎歸一主義로 하는 것이다.


金演 先生의 修鍊法은 󰡔修眞秘錄󰡕(大倧에서 나온 껏)에 若干의 加味를 한 것이다.  修眞秘錄은 羅弘菴 先生께서 쓴 것인데 一種의 通神法이라고 하겠는데 여기에서는 󰡔修眞秘錄󰡕에 佛敎의 ○法을 加하는 것이다.  ○○○○에 「九族 分布圖」가 있는 것은 結局 檀君始祖 아래서 全世界民族이 發生하였다는 證據라고 본다.  󰡔三一神誥󰡕는 白頭山 石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全部 北間島에서 燒却된 나머지 一部를 蒐集햇다고 본다.


丁得恩 여사와 金演 先生이 啓示받은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太陽을 물로 비추면 太極旗가 나오고 陰陽도 太極旗에 있다.  따라서 朝鮮이 世界의 最高國이다.  後天에는 全世界의 宗主國이 된다.  (實驗은 해보지 못했다고 함)


*매미는 굼벵이로부터 七年經過後에 七月七夕날 나오고 달팽이는 四年半에 나왔다고 四十五年만에 죽는다.
*예수는 영혼에 끝까지 알고, 부처님은 道에 끝까지 알았다.


*우리의 글자는 哲學的 文字다.


*人蔘의 眞液은 사람되는 역할을 할 것이요, 따라서 人蔘은 人形같다.


*地靈○(지령이)는 血液의 역할과 人間本能의 對象이다.


*朝鮮國이 道德의 머리라는 實徵,,,,,,,白頭山의 머리 ‘두’字와 蕪頭도 頭字다.  江 中에 豆滿江은 最高處로 出○한 江으로 頭字요, 人體의 頭部에 該當함과 같이 地球에 中心이요, 頭部에 白頭山이 지남도 地球의 頭部인 同時에 道德의 朝鮮나라 韓國인 것이다.  마늘도 韓國이 原産地인 바 六쪽 마늘은 六千年 대장이요, 五十쪽 마늘은 五千年 對象이요, 되마늘은 最後一個로 統一되는 眞理의 對象이다.


*不老長壽藥의 啓示........栗彩, 대추, 五味子粉, 桑心子(오두개), 도토리 가루, 들깨 가루, 糖粉 以上 七種을 配合하여 釀酒하여 每朝 한 컾씩 먹으면 不老長生하고 그 찌꺼기는 밀가루를 넣어서 떡을 해먹는다.


*以外에 우리나라가 世界의 宗主國이 된다는 理論과 理致를 많이 啓示받음.


*先後天 交替期는 甑山系에 依해서 一九六六年 丙午年 五月 五日로 보고, 金演 先生은 交替運數를 鷄龍山 龍華寺에 가서 받았음.


*天地人 三才에 대한 物理物形態를 說破한 啓示로서는 물에 뜬 쪽배에 배의 ○○는 人間이고 高山을 싸주는 것은 草木이고 구름을 지도하는 것은 바람이고 人間의 呼吸器의 糧食은 空氣요 나무의 沐浴하는 것은 비요 一燈으로 人類를 照明하는 것은 太陽이고 별의 王者는 달(月)이고 人間의 靈의 電氣와 關係는 電氣通이고 말은 發電所이다.  光明은 電氣燈이다.  電氣燈의 對象은 하나가 되는 道德이다.


해(日)도 하나요 달(月)도 하나요 땅(地)도 하나요 물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道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萬法歸一이고 人類道德은 韓國에 하나의 道德이다.  그러니 鬪爭은 必要없다.  自然創造 속에 人間創造, 人間創造 속에 道德創造다.  女子가 一家에 많아도 母格은 하나이다.  韓國의 道德은 세계에 하나의 道德이요, 正義道德政治가 셀 때는 世界가 撤收요, 맷돌질 끝나면 맷돌은 撤收다.  韓國의 道德이 完道되면 世界는 撤收다.  女人이 長成하면 人間創造를 하고, 宗敎法度가 서면 戰爭은 끝난다.  韓國은 맷돌에 아랫돌이다.  神壇正道會의 看板이 붙는 날은 世界는 撤收다.  (以上이 啓示의 要旨이다)


이렇듯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연구자의 방문을 허용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계속되던 신단정도회였지만, 정확히 그 날짜가 알려져 있지 않은 어느 때(아마도 1980년을 전후한 무렵?)에 단체의 간판이 내려지고 단체로서의 수명이 끝나게 된다.  아마도 노령으로 인한 정득은의 타계가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신단정도회의 이름이 한국 신종교 주소록에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1980년~1983년 당시였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실리지 않게 된다.
정득은은 한국 신종교들의 역사 속에서 주목할 만한 교세를 포용하지는 못하고 거의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발자취만을 남기며 한 평생을 살다가 갔고, 그녀의 생일 및 사망년월일조차도 후대에 알려져 있지 못한 상태이다.  어쩌면 한두 세대 뒤에는 그녀가 한국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때에는 문용명, 김백문, 박태선, 등과 교유(交遊)하였고, 이스라엘 수도원 및 통일교의 경우에 견줄 만한 나름대로의 계시문헌 󰡔생의 원리󰡕를 후세에 남겼으며, 1930년대 이래로 한국 메시아운동 단체들과 연관되어온 주요 모티프 중의 하나였던 이른 바 ‘영체교환’의 실천자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녀 자신의 그러한 실천을 언론계 앞에 스스로 공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신종교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자로서 출발한 그녀가 말년에는 단군신앙 쪽으로 접근하였던 점도 연구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자료로서 현재까지 발굴된 것들이 너무나 빈약한 것은 필자한테 크게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나마 후속연구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제공하고자 그녀에 관한 잔존자료들을 언론에 공개, 그 멸실의 위험성을 우선 막아놓는 데에 집필동기를 두었음을 밝힌다. jhchoe1128@daum.net

 

*필자/최중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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