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69) -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찾아라(下)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4/18 [17:34]

20세의 나이로 왕권을 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30세의 나이에 동북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북부 인도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의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BC 323년 33세로 후계가 없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으며 다음 해 BC 322년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도’ 6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마케도니아 권력은 광활한 통치 영역을 놓고 사분오열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1세기에 걸친 치열한 권력투쟁이 마무리되면서 나라마다 2세 3세로 이어진 왕권의 강화와 나라의 위상을 세우려는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권력의 분할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내용이 살펴집니다. 이는 인류사에서 가장 찬연한 역사를 자랑한 로마제국이 마케도니아의 권력분할 과정을 통한 세력의 약화가 없었다면 훗날 로마제국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요약하면 BC 390년경 쇠퇴한 로마왕국이 세노네스족(Senones)이 주축을 이룬 갈리아인과 운명의 전투를 벌였던 알리아 강 전투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군인들은 긴 창과 방패를 들고 헐떡이는 팔랑크스(Phalanx)로 불리는 중무장 전투병이었습니다. 이에 갈리아족의 기병과 보병이 빠른 기동성으로 취약점인 대열을 흩트리며 맞붙은 전투에서 무참하게 패배하여 로마는 지옥처럼 불타고 말았습니다. 이에 참혹한 약탈로 로마왕국 역사의 기록이 불타고 유실되어 훗날 로마제국의 빛나는 역사에서 달아나버린 치아처럼 늘 빈자리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 로마 팔랑크스(Phalanx) 전투병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볼 때 마케도니아의 1세기에 이르는 권력의 분할과정이 낳은 세력의 약화와 시간적 공백은 로마에는 하늘이 내린 기회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사회생한 로마가 왕정 시대를 마감하고 공화정 시대를 열면서 무서운 기세로 세력화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감추어진 사자의 발톱이 자라나는 즈음 마케도니아 권력을 나눈 후계 국을 뜻하는 디아도코이(Diadokki) 세력의 2세 3세들은 지배국의 관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경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지배권에 있는 도시국가들을 통치의 효율성을 위하여 재정비하면서 대도시(cosmopolis)국가를 추구하였습니다. 이에 새로운 건축물이 경쟁적으로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중동 그리고 서아시아에 이르는 마케도니아의 광활한 지배권의 교류가 2세기에 이르는 세월을 지나면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그리스 유적과 고미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독일의 미술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Johann J. Winckelmann, 1717~1768)의 그리스 예술의 평가와 분석을 바탕으로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 G.W.F.1707~1831)이 자신의 저서 ‘미학’의 조각론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헤겔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요한 드로이젠(Johann G. Droysen, 1808~1884)이 그리스 사람을 뜻하는 헬레네(Hellene)를 어원으로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시대적 경향을 정의한 것입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서부터 변화된 문화의 흐름을 표현한 것으로 이후 각 분야에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스쳐 가는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2 전제 1 결론으로 완성된 삼단논법이 사고와 존재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헤겔에 의하여 전신을 드러낸 사실 또한 역사의 바람은 언제나 일깨움이라는 것입니다. 
       

▲ (左)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세 (右)페르가몬 왕국 에우메네스 2세 출처: http://www.wikiwand.com     © 브레이크뉴스


마케도니아 후예의 나라들은 이와 같은 문화의 흐름을 혁신의 바탕으로 삼아 국가적 위상을 정립해가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역사적인 학문의 정신성을 공유하는 방법을 묵시적으로 교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라는 국가에 정신성을 두어 지중해 연안의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이를 수호하는 체제가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테네의 오랜 전통을 통하여 접해온 인재양성의 바탕인 교육에 중요성을 일깨우면서 당시 시대 상황에서 보물과 같았던 서적에 대한 소중함이 치열한 국가적 소유의 경쟁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BC 220년 대규모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웠으며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가 뒤를 이어 경쟁적으로 페르가몬 도서관을 건립하였습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도서가 보관되었던 스켑시스(Skepsis)

©브레이크뉴스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는 시기에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BC 335년 아테네에 세운 리시움에서 12년 동안 학문의 연구와 인재양성에 정진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학교를 맡기고 칼시(Carlis)로 이동하여 다음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학문을 교과용 교재와 일반적 저술로 분류하여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러한 원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학교를 떠난 이후 유언으로 그 소유권을 제자 ‘테오프라스토스(BC 381~287)’에게 남긴 것으로 필자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시움 아카데미 교장으로 35년간 재직하면서 이를 관리하였습니다.

 

당시 ‘테오프라스토스’는 BC 315년 리시움 체육관 인근의 땅을 도서관설립을 위한 명목으로 사들인 기록이 존재하는 사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과 자신의 저술을 합하여 도서관 설립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언을 통하여 받았던 소장도서와 저술원고를 포함하여 자신의 원고와 도서를 스승과 자신의 제자인 스켑스(Scepsis)의 넬레우스(Neleus)에게 유언으로 증여하였습니다.

 

이는 BC 347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노크라테스와 ‘테오프라스토스’와 동행하여 아소스에 갔을 때 근처인 스켑시스(Skepsis)를 함께 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는 플라톤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 코리스쿠스(Coriscus)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 넬레우스(Neleus)가 리시움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에게 공부한 제자로 당시 리시움 학교에 교수직을 수행하며 도서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와 자신의 학문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넬레우스’에게 후계를 물려줄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교의 주요 세력들은 당시 이집트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Ⅰ세의 은밀한 후원 속에서 스트라토(Strato,BC335~269)를 후계로 선정하였습니다. 이는 스트라토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Ⅰ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II 세(BC 367~BC 283)의 가정교사를 맡았었던 내용과 무관하지 않으며 당시 각 나라의 경쟁적인 학자의 교섭과 도서의 수집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트라토’가 리시움 교장에 취임한 이후 넬레우스는 ‘테오프라스토스’의 유언에 따라 모든 도서와 원고를 가지고 고향 스켑스로 낙향하였습니다. 이후 10,000점의 파피루스 목록과 정리를 요청한 스승의 유언을 실현하지 못하고 ‘넬레우스’는 소장도서를 스켑스의 비밀스러운 지하 수장고에 보관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페르가몬 왕국에 설립된 페르가몬 도서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장 도서와 원고를 찾으려는 경쟁이 치열하였으며 페르가몬 왕국은 이를 압수하려는 수색작업이 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하 수장고에 은닉된 도서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서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로마제국에 의하여 그리스가 정복되었던 BC 146년 이후 기원전 마지막 세기의 역사에서 터키지역 ‘테오스’(Teos) 출신인 서적 수집가 ‘에펠레콘’(Apellicon, ?~BC 84)이 설립한 도서관이었습니다.

 

도서수집가 ‘에펠레콘’은 리시움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상속받은 재력을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 수집에서부터 시작하여 혼란의 시대에 희귀도서와 문헌 수집에 열중하여 자신의 도서관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 고대 도시 포츠올리(Pozzuoli) 출처: https://thephraser.com/     © 브레이크뉴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아테네의 부패한 로마 통치자와 결탁하여 도시치안 자문위원 신분을 가지고 아테네 메트론(Metroon)사원에 보관된 희귀 문헌을 빼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서와 문헌들을 수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넬레우스의 후손에게 사들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서적은 수세기가 지나도록 지하 수장고에 보관 방치되어 오면서 손상이 심하여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빚어지고 말았습니다. 

 

‘넬레우스’ 후손이 소장된 도서 일부를 나누어 팔았던 사실 또한 훗날 알렉산드로스 도서관이 공개한 도서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연을 가진 에펠레콘 도서관의 도서들은 BC 86년 로마제국이 아테네를 정복하였을 때 장군이었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BC 138~BC 78)에게 약탈당하여 로마로 옮겨가 이탈리아 나폴리 외곽의 포츠올리(Pozzuoli)에 도서관을 만들어 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격랑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이후 소장도서들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음 칼럼은 (70) 페니키아 문자와 박기용 박사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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