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68) -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찾아라(上)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4/17 [10:44]

170종의 인류 문자를 해독한 우리나라 박기용 박사 이야기를 써가던 중 메일을 받았습니다. (66)‘파피루스에서 한지까지’를 읽은 독자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르가몬 도서관 설립에 대한 배경의 심도있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진정성이 담긴 메일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중요한 맥락이 담긴 부분이지만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시대의 흐름이 길고 등장인물과 얽힌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피하고 싶은 부분이었지만 알고 있는 범주에서 이를 요약하려 합니다.  

 

▲ (좌) 아테네 아카데미 (右) 1996년 고고학자 Effie Lygouri 발굴 아리스토텔레스 아카데미 리시움(Lyceum) 터 / 출처: http://patimes.org / http://www.athensguide.com     © 브레이크뉴스

 

 

플라톤(BC 427~BC 347)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플라톤 아카데미가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푸스(Speusíppus)에게 승계되는 상황을 미리 알게 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떠날 것을 결심합니다. 여기에 여러 기록이 엇갈리지만, 당시 플라톤도 사랑하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하였으며 이에 제자이었던 테오프라스토스(Theoph Rastos)에게 향후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BC 347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 승계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플라톤의 제자 제노크라테스(Xenocrates, BC 396~BC 314)와 그리고 테오프라스토스와 동행하여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목적지는 소아시아이었던 에게 해 해안의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의 아타르네우스(Atarneus)왕국의 지배지역인 아소스(Assos)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은 아타르네우스(Atarneus)의 통치자인 헤르미아스(Hermias)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며 절친한 인연이 있었던 사유로 알려졌습니다. 나아가 여행 지역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곳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던 깊은 연고가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소스’ 행에 동행하였던 제노크라테스는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조각과 회화에 대한 선구적 비평을 하였을 만큼 여러 학문에 깊은 학자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글자의 음절 수에 관한 오랜 연구가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정수론에 대한 깊은 헤아림이 있었던 수학에도 정통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소스’ 체류에 대한 부분은 많은 논란과 이야기가 중복되어 있어 필자는 안톤 헤르만 크러스트 박사(Anton-Hermann Chroust, 1907~1982)가 1972년 독일의 ‘프란츠 슈타이너사가 간행하는 역사 저널에 발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소스 체류(Aristotle's Sojourn in Assos)’의 내용에 긍정적인 공감을 두어 이 부분에 필자의 의견을 보태려 합니다. 박사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공부한 독일계 미국 법학자로 철학에 조예가 깊은 역사가로도 잘 알려진 인물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연구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 (左) 아테네 아카데미 앞 플라톤 동상 (右) 아리스토텔레스출처: http://carpediem101.com / https://mediaethicsmorning.wordpress.com     © 브레이크뉴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소스를 가게 된 이유에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후계 승계 문제 이외에도 당시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Philip II, BC 382~BC 336)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아타르네우스(Atarneus) 왕국이 페르시아 제국의 혼란기에 독립하여 ‘헤르미아스’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시기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후 분할된 왕국을 통일하여 지속적으로 작은 왕국들을 흡수하며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은 당시 강력한 제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전략적 거점인 아타르네우스와의 동맹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헤르미아스’와 함께 공부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를 요청하여 ‘아소스’에 가게 되었던 배경입니다.

 

필리포스 2세 왕의 전략적 협력안을 가지고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청을 ‘헤르미아스’ 는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지배국 '아소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후진을 양성할 수 있는 철학 학교를 설립하는데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이시기에 ‘헤르미아스왕’의 양녀인 피티아스(Pythias)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BC 343년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가 에게 해 연안의 나라들을 차례로 침략하여 왔습니다. 이에 응당 와야 할 마케도니아 동맹군이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배경은 마케도니아 일부 세력들이 아타르네우스와 페르시아가 협력하여 공격해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맹군 출정을 저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페르시아에서 휴전을 거론하며 ‘헤르미아스’의 방문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마케도니아의 용병대장이었던 그리스 장군을 체포하여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침공 계획에 대하여 ‘헤르미아스’ 를 고문하려는 준비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맹국과의 비밀 서약에 대한 충성심과 친구 아르스토텔레스와의 우정을 앞세워 끝까지 비밀을 지켜 결국 BC 342년 죽음을 맞았습니다. 헤르미아스(Hermias)는 죽음을 맞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친구에게 전해 달라! 나는 철학의 가치를 모르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포이(Delphi)에 헤르미아스의 기념물을 세워 시를 바치며 뜨거운 우정을 삼킨 친구를 추모하였습니다.

 

▲ (좌)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 (右) 알렉산더 대왕 전투 모자이크작품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출처: https://alchetron.com /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마케도니아는 발칸반도에 스키타이인들을 물리치고 그리스 침공의 배후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의 초청으로 BC 343년 마케도니아로 이주하여 필리포스 2세 왕의 아들이며 훗날 대 제국의 주인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개인교수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이외에도 마케도니아 귀족의 아들로 훗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제1대 왕이 되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ios I, BC 367~BC 283)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이었던 안티파토루스(Antipater, BC 397~BC 319) 아들로 훗날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던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4~BC 297)도 함께 가르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아테네 전경(Athens) 출처: http://greeceathenstours.com     © 브레이크뉴스

 

이후 BC 339년 제노크라테스는 플라톤 아카데미에 돌아와 교장직 선거에서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푸스와의 교장 선출 선거에서 가까스로 승리하여 플라톤 아카데미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다음 해 BC 338년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를 정복하였고 2년 후인 BC 336년 필리포스 2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이듬해 BC 335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동부 아폴론 신전 부근 숲속에 아카데미 리시움(Lyceum)을 설립합니다. 당시 체육관 시설 형태로 시작된 학교의 특성으로 산책길 강의라는 페리파토스(Peripatos-소요학파)가 생겨난 배경입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와 제자 테오프라스토스가 BC 347년 플라톤 아카데미를 떠나면서 극비리에 소장하였던 서적과 원고들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도서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시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로 후진 양성과 함께 수많은 연구와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33살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BC 322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연이어 죽음을 맞게 되면서 역사는 격랑의 태풍 속으로 빠져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원고와 소장도서를 둘러싼 일대 격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다음 칼럼은 (69)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찾아라(下)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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