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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48) -메디치가의 사랑 이야기

조반니 드 메디치’와 ‘피카르다 부에리’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7/03/19 [08:57]

메디치가의 창시자 ‘조반니 드 메디치’(1360∼1429)는 1386년 토스카나 귀족 출신 ‘피카르다 부에리’(1368~1433)와 결혼하여 큰아들 대 코시모 드 메디치(1389~1464)와 둘째 아들 ‘로렌조 드 메디치’(1395~1440)에게 메디치가를 물려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두 아들 ‘다미아노 드 메디치’(1389년경~1390)와 ‘안토니오 드 메디치’(1397년경~1398) 는 생후 일 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반니’는 친척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부인이 가져온 결혼지참금이 밑천이 되어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입지전적인 부를 쌓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세력과 맺은 인연을 끝까지 신의로 지켜낸 처세가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은행 설립 이후 ‘조반니’가 세상을 떠난 1429년까지 32년 동안 당시 상황은 그야말로 격변이었습니다. 은행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교황청이 세 명의 교황으로 대립하였으며 피렌체 도시는 날이 새면 새로운 세력의 용병이 쏟아내는 함성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 메디치가 창시자 조반니 부부와 두 아들     © 브레이크뉴스



큰 흐름에서 메디치가 300년의 경제적 성장을 살펴보면 창시자 ‘조반니 메디치’(1360∼1429)가 은행을 설립하여 그 바탕을 일구었으며 이를 물려받은 큰아들 대 코시모 드 메디치(1389~1464)에 의하여 절정의 융성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창업자 ‘조반니’가 물려준 경영철학과 그의 부인 ‘피카르다 부에리’ 의 내조와 자녀교육이 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초점을 두어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조반니’와 ‘피카르다 부에리’의 결혼에서부터 파악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매우 못생긴 추남이었으며 상당한 격차의 신분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운데 ‘피카르다 부에리’ 가 ‘조반니’의 성실하며 지혜로운 모습을 보고 강하게 고집하여 성사된 결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인의 선택을 증명하듯 ‘조반니’는 당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문란한 생활과는 달리 평생을 사업과 가정에 충실하였습니다.

 

나아가 ‘조반니’는 언제나 검소하였으며 눈에 띄는 활동이 아닌 조용한 처세로 차근차근 부의 금자탑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더욱 ‘조반니’의 삶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당시 엄청난 재앙인 흑사병이 피렌체 도시를 강타하여 죽음의 도시로 변한 암흑의 시기에 헌신적인 기부를 통하여 시민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선구적 사실과 함께 이로 인하여 서민 사회에서 부자의 적대감이 아닌 존경의 대상으로 평가된 사실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과 뛰어난 사업가의 면목이 그대로 드러난 점이라 할 것입니다.
      

▲ 아르테미스 2세 프란체스코 푸리니作1630 / Mausolus대영박물관 소장     © 브레이크뉴스


이와 함께 ‘조반니’의 부인 ‘피카르다 부에리’의 조용한 내조와 바른 자녀교육으로 헌신한 삶이 가져다준 영향 또한 큰 바탕이었습니다. 부인은 1429년 남편 ‘조반니’가 죽고 1433년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간을 너무나 비통한 슬픔으로 남편을 그리워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피렌체 인본주의 문학가이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로 잘 알려진 카를로 마르소피니(CarloMarsuppini,1398~1453)가 '피카르다 부에리’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친구인 두 아들 ‘대 코시모’와 ‘로렌조 드 메디치’에게 전한 추도문에 잘 담겨 있습니다.

 

그는 늘 뵈었던 친구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의 영전에 카리아(Caria)국의 ‘아르테미시아 2세’ 여왕(BC. 395~BC.351)의 사랑과 고대 로마제국의 포르키아(Porcia.BC, 70~BC,42)의 사랑에 이어 또 하나의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역사에 남기고 갔다고 추모하였습니다. 메디치가의 수많은 이야기가 역사에 전해오지만, 르네상스 인문학자가 전한 추도문에 담긴 메디치가 창시자 ‘조반니’ 부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없는 점을 늘 아쉬워하며 이번 기회에 이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고대 ‘마우솔로스’ 에 담긴 ‘아르테미시아 2세’ 여왕과 ‘마우솔로스’ 왕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B.C. 4세기경 현재 터키지역인 ‘카리아국’은 페르시아에서 독립한 나라로 당시 ‘마우솔로스’ 왕이 죽은 후 왕비 ‘아르테미시아’ 2세 여왕이 수도이었던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에 남편을 위하여 만든 묘소가 ‘마우솔로스’입니다. 피라미드형 지붕을 가진 45m 높이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이었던 고대 그리스 시인이며 정치가인 ‘안티파테르’(BC. 397~BC. 319)의 시에서 ‘고대 7대 불가사의’ 라고 노래한 이후 오늘날에도 영원한 이야기로 남은 역사적인 유물입니다.

 

‘亞르테미스 2세’ 여왕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이 무덤을 만들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영원한 몸이 되기 위하여 남편의 유골을 화장하여 무덤이 완성되는 2년 동안 날마다 포도주에 섞어 마시다가 이를 다 마신 이후에 세상을 떠난 섬뜩하면서도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 브르투스.미켈란젤로 作 1539년 와 Pierre Mignard 作‘포르키아의 자살     © 브레이크뉴스

 

또 하나 고대 로마제국의 ‘포르키아’와 브루투스의 사랑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저의 암살자 ‘브루투스’와 그의 둘째 부인 ‘포르키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전하는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이 있던 빌립보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참패하여 자결합니다. 남편 ‘브루투스’의 소식을 들은 ‘포르키아’가 이를 걱정하여 주야로 지키는 감시의 눈을 피해 뜨거운 석탄을 재빨리 삼키고 입을 닫기를 반복하였던 자살로 사랑하는 남편의 곁으로 떠나간 슬픈 이야기입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 ‘마르소피니’는 평소에 늘 보아왔던 친구의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 모습을 고대의 역사적인 사랑을 잇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추도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디치가 창시자 ‘조반니’ 부부의 숨은 사랑 이야기를 살피면서 역사에 기록되는 부자를 만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똥별과 같은 요행이 아닌 사랑으로 덩어리진 내조의 힘이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부모의 교육을 받은 큰아들 대 코시모 메디치(1389~1464)가 청출어람처럼 메디치가의 눈부신 융성을 이루는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49)『 세계를 품은 메디치가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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