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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천재성과 다양한 삶의 조건들(1)

그의 천재성으로 우리들에게 더 많은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이서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6/10/20 [18:18]

재능은 타고나는 것일까? 가을이 길을 걷다 잠시 멈춘다. 휴식의 시간. 모차르트의 음악 같은 오후다. 어떤 음악?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우아하면서도 유려하고 여유로운 산책을 하다가 미끄러지듯 서핑을 하는 자연스러움이 그의 음악에서는 흘러나온다. 미완성인 <레퀴엠>을 제외하고는 그의 마지막 작품일 클라리넷 협주곡 속에서, 어렵고 궁핍하였으며 건강에 위기를 느끼는,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긴박하고 어두운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그의 음악에는 우울한 흔적이 거의 없다. 천성적으로 따뜻하고 경쾌하였던 모차르트의 삶은 우리에게 천재와 천상의 경지를 선물한다.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을 쓴 제러미 시프먼은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베른하르트 안젤름 베버의 말을 이렇게 전해준다.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부분이 너무 흔해서 정작 핵심은 산산조각 날 지경이다."

 

디터스도르프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렇게 놀라울 정도로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내 생각에 그가 그 아이디어들을 그토록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듯하다. 한 생각이 떠올랐는가 하면 곧바로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밀치고 들어와 먼저 있던 것을 몰아내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니, 감상자들은 숨이 턱에 차서 급기야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그것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 이서영     ©브레이크뉴스


'모차르트의 음악이 경청하기 어려운 음악이며 오직 전문가에게나 맞는 음악'이라는 평가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극히 단순하고 유려한, 아름다운 음악으로 평가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지적이 아닌가. 1790년 <음악가의 전기 사전>에서 에른스트 루트비히 게르버는 이 위대한 거장이 일찍이 하모니와 친숙해진 후 너무도 깊이 하모니 속으로 몰입한 나머지 훈련되지 않은 귀로는 그의 작품을 따라잡기 힘들다고도 모차르트를 평가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다분히 사회적인 분위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터이다. 당시 모차르트가 살았던 세상은 그의 음악 세계의 질서정연함, 충만한 아름다움, 유려한 정신과는 유사점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찰츠부르크는 지방도시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을 공동통치했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1780년 마리아가 세상을 뜨자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더욱더 열정적으로 개혁을 단행해 황실의 의례 전반을 축소하도록 했다. 권력을 상징하는 지나친 장신구나 과시적이고 웅장한 장례식 비용도 규제하고 삭감하였다. 이는 스물네 살의 음악가인 모차르트에게는 불리한 사정이었다. 또한 황제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교회 음악을 선호했다. 따라서 모차르트의 대미사곡들이 오페라 스타일로 화려하고 낭비이며 부적절한 사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무렵 자유계약직을 선포한 모차르트에게 황제의 외면은 곧 모차르트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찬사 뒤의 비난은 역시 소수의 의견이었고 그는 어디에서나 대개 아첨에 가까운 열광을 받았을 것이라고 제러미는 말한다.

 

1790년, 서른네 살의 모차르트에 대한 찬사가 10월호 <크로니크 폰 베를린>에 실렸다.


"모차르트는 수 세기 동안 그 영광이 이어질 비범한 인간군에 속해 있다. 그의 위대한 재능은 이를테면 음악 예술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그의 음악은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그의 작품들은 모든 것을 남김없이 휩쓸며 흘러가는 급류이다. 지난날의 그 어떤 인물도 그를 능가하지 못하며 후세는 그에게 깊은 존경과 경탄을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 의견을 가지려는 사람은 반드시 전문가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의 음악들은 얼마나 걸작들인가! 전문가가 듣기에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의 하모니는 얼마나 위대하고 압도적이며 매력적인가?"


심지어 모차르트에게 영감을 주었던 하이든조차 스물아홉 살의 모차르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신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건데 당신의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향기가 있을 뿐 아니라 작곡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졌습니다."

 

이때는 모차르트가 '신 다음에는 아버지'라는 세뇌 교육 속에서 끊임없이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전선에서 활약하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스승, 하이든을 만나 그에게 자신이 만든 작품을 헌정하기도 하던 시기였다.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작곡을 계속하는 이유는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작곡하는 일이 덜 피곤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아내가 옆방에서 분만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작곡을 하느라 열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전기 작가 터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결코 음악을 중단하지 않았던 모차르트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해보려고 애써야 한다. 음악은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고 아마도 잠을 자고 있을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가르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가르치는 일이 음악적 사고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창조적 인간의 탄생> 하워드 가드너/문용린 옮김/사회평론.에서)


모차르트의 처형은 대화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만히 서 있지 않았던 모차르트를 회상했다. 아침에 손을 씻을 때에도 무엇인가에 열중한 표정으로 번갈아 한 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한다. 그의 동서인 궁정 배우 요제프 랑게도 말하기를 중요한 작업에 몰두해 있을 때 인간 모차르트의 말과 행동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말하고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했다고 한다. 그는 연습 벌레였고 끊임없이 작곡을 했다. 그리고 이십 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실험과 발견의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였다. 물론 그의 이 실험은 당대의 현실과의 괴리를 불러와 이해 부족한 평론가들과 귀족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모차르트의 후기 음악은 현대의 평론가들과 음악가들에게는 매우 혁명적이며 예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었으나 끝없는 연습의 결과였고 또한 환경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 3가지 조건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으므로 그는 음악 역사의 신기원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콜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 자기 분야에서 최소한 1만 시간의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하루 3시간씩 연습, 10년이라는 시간을 최소한 투자해야 우리 뇌는 한 분야에서 최적의 상태가 된다.

 

둘째, 진정한 아웃라이어에게는 한 개인이 아니라 문화, 즉 환경이 적절하게 주어져야 한다.

 

모차르트 집안의 옛 친구인 트럼펫 연주자 샤흐트너는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불 같은 열정으로 가득했고 모든 대상에 쉽게 애착을 느꼈다.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런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더라면 극악무도한 악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모든 자극에, 그것이 해가 되는지 득이 되는지 그 자신이 판단할 능력이 없는 듯, 너무 감응되기 쉬운 성정을 지녔다."


하워드 가드너는 <창조적 인간의 탄생>에서 우리가 '매일 하는 다섯 가지 경험'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의 가설을 따라가 보자.

 

조건이 비슷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 Benign의 첫 글자를 따서 B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의 단어 Malign의 첫 글자를 따서 M이라고 하자. B는 하루에 신체적ᆞ정서적ᆞ인지적으로 다섯 가지 긍정적 경험을 하고 M은 다섯 가지 부정적 경험을 한다. 출생 후 9개월이 지나면 B는 1,300개의 긍정적 경험을, M은 1,300개의 부정적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이 경험들은 두 사람의 마음, 정서, 신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이 과정을 5년을 더 지속한다고 가정한다면 B는 9,000개의 추가적인 긍정 경험을 쌓게 되고 M은 역으로 9,000개의 추가적인 부정경험을 쌓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B는 긍정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고 기술을 획득할 기회도 많을 것이며 늘 희망과 격려를 받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M은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배제되고 불행하며 격려받지 못하므로 자신이나 타자들을 바라볼 때도 부정적 시선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가설을 통해 하워드는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인자를 타고 났다고 하더라도 양육되는 환경에 의해 누군가는 더 특출나거나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는 측면도 천재라는 고려에 넣어야 할 단서라고 주장한다. 모차르트의 경우가 그렇다. 모차르트는 절대 음감을 타고 난 음악가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더욱 활발하게 촉발시킨 것은 바로 그의 환경이다. 그의 누나 난네를 역시 발군의 음악가였다. 난네를 역시 말을 배우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건반에 익숙해졌다. 모차르트는 다섯 살 많은 그의 누나가 연주하는 광경을 자연스레 환경으로 흡수했다. 누나가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는 동안 언제나 곁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네 살 때 이미 여러 곡의 소품을 외워서 나무랄 데 없이 연주했다. 누나가 연주하고 자리를 비우면 피아노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네 살 때 이미 클라비어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기 위해 잉크병에 펜을 집어 넣어 잉크를 가득 묻힌 후 그 잉크를 뚝뚝 떨어뜨려가며 악보를 까맣게 채워가던 아이, 그래서 아버지의  눈에서 놀라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바로 모차르트였다.


이렇듯 모차르트에게는 누나 난네를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모차르트를 체계적인 음악으로 이끌어 줄 뛰어난 교사인 아버지가 있었다. 레오폴트가 1765년에 쓴 <기본 바이올린 교습법 시론>은 오랫동안 표준 교재로 널리 읽혔으며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라는 절대적인 교육 환경을 통해 체계적인 레슨을 받았다. 스스로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사이자 작곡가였던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대성시키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물론 이것이 모차르트를 대성시키기 위해서였는지 가족의 경제적인 부를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다시 따져볼 일이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시선 안에서 극도로 전문적인 수련을 통해 20대에 이르렀고 이후 하이든을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아버지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였으며 30대에 들어서자 자신만의 독보적 영역을 안정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모차르트가 서른네 살이 되었을 때 요제프 2세가 죽고 동생 레오폴트 2세가 즉위하였는데 모차르트는 프랑크푸르트 대관식 황실 수행원에서  제외되었고 따로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연주회를 열었으나 청중들이 모이지 않았다. 1년 뒤 경제적인 어려움과 과로와 근심 걱정 속에서 마지막 작품 <레퀴엠>을 준비하다 우울증과 망상이 심해져 몸져 누웠다가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렀다.


모차르트의 생애 동안 태어나던 해를 비롯 세 차례의 전쟁으로 황제의 상비군 규모가 대폭 확대되었고 경제적 궁핍이 뒤따랐다. 숙련공들이 징병되고 특별 전쟁세가 부과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1788년, 모차르트가 서른두 살이 되던 해에 곡물 공급 부족으로 빵 값이 치솟아 빈 시내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제빵업자와 곡물상이 약탈당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1787년 말 서른한 살 때, 실망스런 봉급조건으로 궁정 실내악단 작곡가로 임명되었다. 궁정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부유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늘어나는 빚을 감당해야 했다. 문제는 모차르트의 생활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악사였다.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었을 때도 여전히 악사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들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궁정에서 하인과 같은 신분이었다. 그들은 시종이나 마차꾼과도 다르지 않았으며 하이든도 그랬듯이 하인의 제복을 입고 하인들의 부엌에서 요리사와 하녀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했다. 그들은 고용인의 허락 없이는 여행도, 결혼조차도 금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차르트는 어떠했을까. 그는 다섯 살 때 찰츠부르크 대학교에서 데뷔 공연을 한 뒤 여섯 살 무렵부터 연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상류층의 습성을 배웠고 그들의 찬사와 열광 속에서 성장하였다. 신분은 낮았으나 평생 연주 여행을 통해 상류 사회의 습성이 몸에 밴 모차르트는 언제나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있어서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상류 귀족으로 착각하곤 했다. 또한 천재 작곡가였고 인기의 절정을 구가할 때는 빈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자리한 값비싼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스물여덟 살의 모차르트는 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대단히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사순절 기간 동안 17번이 넘는 콘서트를 열어 성황리에 마쳤다. 빈의 악보 출판업자들은 그의 음악을 출판하려고 경쟁했고 레슨을 받으려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서른 살 무렵 작곡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대성공이었다. 빈에서도 프라하에서도 절정의 시간을 누렸다. 서른 한 살 때 갑자기 수입이 뚝 줄었다. 연주회의 관객이 줄어들어 연주회 자체가 무산되었다. 수입이 줄어들자 모차르트는 생활비가 덜 드는 빈 외곽으로 거처를 옮겨 몇 달을 살기도 했다. 정치적 상황도 좋지 않아서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말려들자 남자 귀족들은 전선으로 떠났고 황실의 보조금도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극장은 문을 닫고 오페라 극단들은 해산했다. 이러한 상황에 모차르트의 고질적인 낭비벽은 모차르트를 상류사회 유명인사에서 거지 신세로 추락하게 했다. 모차르트는 미하엘 푸호베르크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고는 했다.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으로 살고 있어서 뛰쳐나가서 목 놓아 울 수도 편지를 쓸 수도 없었네. 가엾은 내 아내는 실로 냉정한 평정 속에, 회복이든 죽음이든 받아들이겠다고 모든 걸 체념하고 있다네. 그러나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네."


지금까지 나는 모차르트의 가난을 잘 못 알고 있었음을 느낀다. 사회적 구조가 자유작곡가임을 선언했던 모차르트에게 너무 가혹했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다른 여러 글들을 통해 다시 정리해보건데 모차르트의 가난은 그의 천재성과는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모차르트의 가난은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의 전반적 경제 침체도 한몫 하였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입지가 약화되었으며 오락이며 놀잇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상류층들의 음악 취향에 맞추지 않고 모차르트의 영감이 날개를 펴고 활짝 날아오른 탓도 있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사실은 그의 낭비벽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확인한다. 천재성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했던 사회적 요인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모차르트가 그의 음악이 들려주는 것처럼 명철하고 선명하며 우아함을 벗어나지 않은 생활을 했더라면 그의 천재성으로 우리들에게 더 많은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서른다섯 살은 스러지기에는 너무도 꽃다운 청춘이다. 복잡다단한 인간성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수없이 아름답고 생생한 인물들을 마치 셰익스피어처럼 무대 위에서 살려 내곤 했던 모차르트가 자신의 삶을 그렇듯 유아적으로 종결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는 음악가로서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으나 전인적인 교육에는 실패한 아버지의 편향되고 일방적인 희생물로서의 최종적인 결과는 아니었을까.


여섯 살 천재소년의 연주를 듣고 그를 칭송하는 시들이 읊어졌다고 한다. 여기 그 하나가 있다.


찰츠부르크에서 온 조그만 여섯 살짜리 피아노 연주가에게

비엔나(빈), 1762년 12월 25일ᆞᆞᆞ.


경이로운 아이, 그 솜씨를 사람들은 칭송하네.

가장 작은 너를, 가장 큰 연주가라 이르네.

음악 예술은 네게는 힘겨운 노고가 아니니

너는 곧 위대한 대가가 될 수 있다네.

오로지 원컨대 네 육신이 영혼의 힘을 견디어

뤼벡의 아이처럼 너무 일찍 무덤으로 가지 않기를.

(<모차르트> 노베르트 엘리아스/박미애/문학동네.에서)*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 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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