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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오태규 단편소설 '의장횡사' <전문>

"여보세요, 경찰이죠? 도와주세요. 사람이 죽었어요..."

오태규 소설가 | 기사입력 2016/09/30 [10:23]

믿거나 말거나 좀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사리(事理)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야 골백번 읽어봐도 거짓말로 보이겠지만 세상사 이치를 어디 꼭 그렇게 단정한 시각(視角)으로만 볼 수 있던가. 어쨌든 견우(牽牛)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졸도를 해버렸다.


 “내 얼굴이 이렇게 잘생긴 것은 어디까지나 최상의 행복이었지만 그건 또 하나의 불행의 시작이었어. 내 육신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어디서 마지막 손질을 끝냈을까. 아아, 그것은 내 두 손이었어야 하는 건데, 두 손이었어야 하는 건데.”
 

▲ 오태규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그의 말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좀 엉뚱하고 치졸한 데가 있었지만 얼굴 잘 생기고 힘 좋고 그리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쓰러뜨린 것은 복통이었다. 그리고 그 복통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배를 움켜잡고 떼굴떼굴 구르다가 끝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한참 후에 깨어났을 때도 그는 일어서지를 못했다. 땅바닥에 배를 대고 몸을 질질 끌어서 겨우 방갈로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방갈로 바로 앞에 있는 손바닥만한 암반(岩盤)에서 쓰러졌으니 망정이지 만약 방갈로 뒤에 있는 넓은 풀밭이나 풀밭 끝에 있는 돌 많고 음습한 뱀골 숲 속 길을 거닐다가 쓰러졌더라면 영락없이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문안으로 기어들어가자 창가에 서 있던 묘화(猫花)가 질겁하며 뛰어나왔다. 그녀는 그래도 아내답게 지체 없이 그를 끌어안아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여보, 어디가 아프세요.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거예요.”하며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러는 묘화의 가슴에다 대고 견우는 똥물까지 토해 놓았다. 그녀는 오물을 가슴팍에 고스란히 안은 채 말없이 일어나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묘화가 찾아온 이 좋은 날에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제 단장(斷腸)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참담한 기분이 되어 소파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당신은 레비아탄’을 기억하시나요, 아시나요? 그것은 나를 출세시켜 준 당신의 작품. 왜 요샌 그런 글을 못 쓰죠? 그리고 쓰고 있던 ‘가슴속 정글북’과 ‘야생의 귀족’은 어떻게 된 거예요. 분발하세요. 멋대로 재능을 내다버리고 마구 게으름을 피우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일 년 전 묘화는 견우를 준열하게 꾸짖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그를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바닷가로 보내버렸다. 해변에 방갈로를 하나 장만했어요. 가보면 아시겠지만 경치가 그만이에요. 이제 거기 가서 푹 쉬면서 글이나 쓰세요. 일 년 전이라면 묘화는 떠오르는 태양. 넉넉히 견우를 꾸짖고 내쫓을 만했다. 연기인으로서 그녀의 인기는 하늘 한복판으로 떠올랐고 견우는 결정적으로 여자의 발 아래로 영락(零落)해버렸으니까. 견우는 그녀와 결혼하면 그래도  한 달에 스무 날 이상 묘화를 차지하면서 함께 살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한 달에 엿새밖에 그녀를 영수(領收)할 수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폐일언하고 그녀가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올 수 없다고 다리를 쭉쭉 뻗으며 앙탈을 부리는 데는 견우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머지 24일을 그녀의 인기와 명성이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우는 그녀와 헤어져버리는 것보다는 엿새나마 함께 살아가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지리 못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묘화와의 엿새’를 위하여 스무나흘 동안 아내의 어떠한 분방(奔放)과 배신도 눈감아주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의 도덕성을 믿기로 했다. 그가 믿고 싶었던 아내의 도덕이란 부와 명예가 아무리 그녀의 인생을 거대한 것으로 증폭시켜 놓아도 보통 사람들처럼 하루를 세 끼 밥으로 그 긴긴 인생의 밤을 한 사람의 남편으로 만족할 줄 아는 절제와 분별력 같은 것이었다. 또 그것은 남아돌아가는 힘과 부에 걸맞은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예컨대 가욋남자를 맛본다든가 아편을 복용하는 등 갖가지 탈선과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는 예지나 양심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견우는 배당받은 엿새에 만족하기로 마음먹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유명한 아내를 데리고 사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가 하면 미스터 대처(Thatcher)에게까지 종종 자문을 구하는 엽서를 띄울 정도였다. 미스터 대처는 누가 뭐래도 사계(斯界)의 세계적인 권위자였으니까. 그러나 그의 답장에도 별로 신통한 게 없었다. <(전략) 처음 메기가  수상이 되었을 때 체거의 시골집에 날 팽개쳐 두고 다우닝 10번가로 휑 가버리더군. 나에게 한마디 양해라도 구했으면 내가 그토록 미친 듯이 화를 내지는 않았을 거야. 게다가 집안 꼴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고. 방마다 담배 연기로 찌들어 있었고 재떨이엔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탁자위엔 찻잔들이 그대로 뒹굴고 있었고 어디를 보나 쥐새끼 같은 정치꾼들이 흘끔거리고 있었고 정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더군. 미친 듯이 항의를 했지. 나중엔 전화도 안 받는 거 있지. 이번엔 막 전보를 쳐댔지.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어. 하는 수없이 나는 마지막 수단을 썼지. 그녀의 누드 사진을 찾아내어 그걸 신문사에 팔아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어. 그 사진은 1951년에 내가 직접 목욕탕에서 찍은 건데 특히 늘씬한 각선미가 볼만했거든. 그랬더니 태도가 싹 달라지는 거 있지. 글쎄, 그 여우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그 사진을 사겠다는 거야. 나는 깜빡하는 사이에 그만 그 사진을 팔아먹고 말았어. 결국 그 돈으로 훌륭한 집사를 한 사람 구하여 집안일로부터 해방될 수는 있었지만 그때 그 유혹을 한사코 뿌리쳤어야 했어. (중략) 섹스는 어떻게 푸느냐고? 역시 그 문제는 어렵더군. 나 역시 그 피비린내 나는 포크랜드 사건이 터진 후로는 굶고 있는 형편이니까. 좀 늙긴 했어도 그 금발의 미녀가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그 도둑놈 적굴(賊窟)같은 전쟁 캐비닛 속에 파묻혀 있다는 걸 한번 상상해 보라고. 정말, 사람 환장한다고. 하지만 어쩔 것인가. 아내는 대중의 것이다. 먼저 국민에게 온 정열을 쏟아야 하고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그땐 내 차지다. 나는 내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이런 말로 한없이 자신을 달래야만 했어. 그래도 영 참기 어려우면 매킨토스(mackintosh)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무작정 거리로 쳐들어갔고 때론 포럼을 읽으면서…헤헤헤 금지된 장난감으로 슬쩍 기분을 풀어버리곤 했지 뭐. (후략)> 그의 회답에서 다만 한 대목 ‘아내는 대중의 것이다. 나는 내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를 견우는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묘화와 함께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 과남한 아내가 되어 갔고 부부라는 그들의 관계는 나날이 허약해져 갔다. 그리고 그 허약해진 관계나마 유지하기 위하여 견우는 무지무지한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자니까 뜻하지 않게 신경성 위궤양까지 생기고 말았다. 의사로부터 신경증이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울어버렸다. 그가 향유하고 있는 6일을 더욱 빛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던 그의 노력이 문득 눈물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그녀가 대중에게 쏟고 있는 정열이나 누리고 있는 부와 명성에 비하여 막상 그녀가 삶 속에서 맛보고 있는 즐거움이랄까 행복이란 게 너무나 허술하고 미약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으로서 아내의 욕구를, 일테면 그녀의 뜨거운 욕정을 비록 횟수는 적을지라도 까무러칠 만큼 폭발적으로, 추악하리만큼 인간적으로 만족시켜 줘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6일간도 영락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에 일어났던 일만 해도 그랬다. 묘화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예고도 없이 해변을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견우는 너무나 흥분해서 그랬던지 변변히 그녀를 만족시켜주지도 못한 채 밤새도록 허둥대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묘화에게 아름다운 아침을 보여주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일종의 술수나 계략이나 음모와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아침산책을 하면서 동백나무로 삥 둘러싸인 방갈로 앞 마당가에 서서 해풍에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멀거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풀잎에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초원을 홀로 하염없이 걸어가는 모습이라든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 속으로 꾸부정한 등을 보이면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묘화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녀에게 어떤 연민이나 성적 감흥을 살려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날 아침 그가 쓰러져 버린 것은 그러니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 앓고 있던 위장병이 겹친 피로와 긴장 때문에 갑자기 극심한 위통을 일으킨 것이었고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것은 정한 이치였다. 그런데 이야기는 정작 이 위통을 둘러싸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결국은 견우가 목숨을 잃고 만다. 내가 지금 그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도 그의 최후가 너무 어처구니없고 허망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의 사람 됨됨이나 처지는 이로써 웬만큼 알게 됐으니까 이제 그날 아침 이후에 일어났던 일만 간단하게 이야기하겠다.

 

목욕탕으로 간 묘화를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만 흘렀을까. 계속 참담한 기분이 되어 소파에 누워 있는데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머리를 휩싸고 있는 정적(靜寂)을 마구 흔들면서 뜨거운 열기 같은 게 별안간 이마로 확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그 열기는 양쪽으로 쫙 갈라지면서 손가락으로 후벼 파듯이 관자놀이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들려온다기보다는 머리로 울려온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 같았다. 그는 목소리의 임자를 알아보기 위하여 눈을 떴다.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의 임자뿐만 아니라 가만히 보니 목소리의 모양 같은 것도 없었다. 이마에 끼얹어지는 열기, 웅웅거리는 소음, 그것은 시뻘건 불꽃 속에서 잉잉거리고 있는 심지 같은, 귀청을 찢는 소음 속에서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는 적막 같은, 목소리랄 것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분명히 그의 뇌리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바싹 정신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가까스로 모양을 지어 보였다. 나리, 정신 차리세요. 할말이 있어요. 그 목소리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과 동시에 불현듯 눈에 띄는 게 있었다. 그것은 그가 누워 있는 소파 바로 앞 카펫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턱을 계속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그렇다 그가 기르고 있는 콜리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개한테 말을 걸었다. 진정 너란 말이냐? 그럼, 저 말고 이 방에 누가 있나요?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마님이 나비와 함께 산책 나간 새에 들어 왔어요. 이러다가 마님한테 들키면 맞아 죽을 거예요. 시간이 없어요. 제 말을 들으세요. 화타(華佗)는 콜리의 이름이었고 나비는 묘화가 사랑하는 고양이의 이름이었다. 그럼 내가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마님이 왜 널 미워하지.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요.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내 물음에 대답해. 널 믿기 위해서야. 좋아요. 그건 내 인상 때문이었어요. 개로 태어난 주제에 개 같은 인상을 주지 않고 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고 마님이 늘 불평했죠. 눈빛이 착 가라앉고 기다란 주둥이를 쭝긋 내밀고 있는 게 뭐 꼭 내숭떨고 있는 앙큼한 계집 같다나. 그만. 견우가 화타의 말을 막았다. 너는 분명 말하는 개가 되었구나. 화타는 견우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내가 암컷이라는 거였죠. 암컷이라니? 수컷을 차지해 버리는 암컷 말이에요. 사실 날 질투할 정도로 마님은 냄새나는 색골이 되어 버렸거든요. 이놈. 견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타를 걷어찼다. 무슨 짓이에요? 화타는 잽싸게 몸을 피하며 말했다. 전 어디까지나 나리 편이라구요. 그런 제게 발길질을 하다니 말이나 돼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구요. 중요한 건 제가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니까요. 아시겠어요, 지금 나리는 생명이 위험하단 말이에요. 내 생명이? 그래요. 마님이 나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묘화가 날 죽이려고 한다 이거지? 하하하. 한바탕 웃고 나서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는 게 아냐. 한 번만 봐주지. 농담을 하다니요? 지금은 이렇게 태평하게 이야기하구 있을 때가 아니라구요. 대답해 보세요. 미식(糜食) 맛이 어땠어요? 미식? 네. 아하, 아침에 내가 먹은 미숫가루 말이군. 그래요. 나리의 유동식 아침식사 말이에요. 찹쌀 율무 보리 들깨 참깨 잣 콩으로 만든 미숫가루. 그것은 견우가 위궤양을 앓게 되자 묘화가 손수 만들어서 가지고 온 그녀의 훈훈한 정성이었다. 여느 아침에는 견우가 직접 타 먹었지만 그날 아침은 묘화가 타주었던 것이다. 잠깐,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야? 견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도 그걸 드시고 복통을 일으킨 적이 있었나요? 없었어. 오늘 아침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마님이 뭘 하고 계셨죠? 화들짝 놀라며 돌아서지 않던가요? 견우는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맞았어. 내가 들어가니까 조리대 앞에 서 있다가 후닥닥 돌아서더군. 다른 때도 그랬었나요? 아니, 그런 적이 없었어. 등을 돌린 채 조리대 앞에 서서 마님은 과연 뭘 하고 있었을까요? 글쎄, 미숫가루에 소금이나 설탕을 넣고 있었겠지...견우는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렇겠죠. 그런데 그때 넣고 있었던 게 과연 소금이나 설탕이었을까요. 글쎄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였을까? 그의 말투는 어느새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게 뭐였든지 간에... 화타가 자신 있게 말했다. 분명히 그녀는 그것들을 다 집어넣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겠지. 갑자기 돌아서 버렸으니까. 왜 여태까지 아무 탈이 없던 미식이 오늘 아침엔 갑자기 복통을 일으켰을까요. 혹시 마음에 짚이는 게 없나요? 견우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가만, 이제 생각이 나는군. 그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홱 돌아섰을 때 분명히 한 손에 하얀 소금병을 들고 있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손을 얼른 허리 뒤로 감춰 버렸거든. 뭘 먹는지 입은 계속 오물거리고 있었지만 마치 무안당한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한 손을 뒤로 감추고 빨개진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모습. 그것은 눈에 익은 광경, 오조증(惡阻症). 태아가 배설하는 유독물이 모체의 간 기능을 침범하여 일어나는 현상. 언젠가 본 듯한 눈에 익숙한 증상, 구역질. 그의 눈을 슬슬 피하면서 하는 주전부리. 그녀가 그 앞에 서 있다가 후닥닥 돌아서곤 하던 싱크대 안에서는 늘 귤껍질이며 살구씨며 석류알이며 번데기며 돼지발톱 같은 게 발견되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 하얀 병들 속에 과연 소금과 설탕만 들어 있었을까요? 화타는 견우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당장 가서 뭐가 들어 있는지 조사해보면 알 거 아냐.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잠깐, 만약 그 속에 독물이 들어 있다면 아침에 그 소동이 일어났는데도 여태껏 그대로 놔뒀겠어요. 딴은 벌써 치워버렸겠군. 견우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리, 화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알고 싶다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러다가 견우는 갑자기 딴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원,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아냐, 묘화는 그럴 수가 없어. 그건 네 놈이 공연히 꾸며서 하는 이야기일 거야. 좋아요. 그럼 믿지 마세요. 전 뭐 상관없는 일이니까. 화타가 내뱉듯 말하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무슨 생각에선지 견우가 황급히 화타의 어깻죽지를 잡아서 도로 앉혔다. 좋아, 이야기해 봐. 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우선 제가 나리라면 이젠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겠어요. 화타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나리께서 아직 제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나 두고 보세요. 우리가 다음 만날 때까지는 반드시 무슨 사단이 다시 벌어져서 저를 조금은 더 믿게 될 테니까요. 마님이 돌아오고 있어요. 이젠 가 봐야겠군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또 오겠어요. 쭈그리고 앉아 있던 화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귓가에서 웅웅거리고 있던 정적이 깨어지면서 화타의 소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불현듯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 쏴 하고 감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화타의 모습이 눈에 보였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파도 소리가 귀에 들렸고 소금기 섞인 바다냄새가 코에 스몄고 그리고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무더위가 살갗에 감겨왔다. 이윽고 묘화가 들어왔다.
 

“안락한 휴식이 되지 못하였군요, 당신에겐.”
 “허약한 꼴을 보여서 부끄럽소.”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게 내가 부리고 있는 유일한 멋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왜 날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늘 그렇게 평온하지 못하죠?”
 “무슨 말이오?”
 “난 철옹성이 아니에요. 맘 놓고 짓밟으세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견우는 계속 딴전을 부렸다.
 “참, 화타 말인데 아침에도 경쳤소? 화타를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또 그 대답을 하라는 거예요? 하죠. 너무 요망스러워서 그래요. 개가 내는 소리라면 난 웬만큼은 다 알고 있거든요. 낑낑거리면 아프다는 거구 컹컹거리면 놀랐다는 거구 그런데 유독 그 녀석이 턱을 심하게 흔들면서 깰깰거리면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단 말예요. 게다가 그게 개답잖고 그렇게 요사스럽고 혐오스럽게 보일 수가 없어요. 이제 됐나요? 아무래도 몸이 많이 아픈 것 같군요. 억지로라도 점심을 좀 드시고 푹 주무세요.”
 묘화가 말했다.
 “아냐, 약속이 있어서 좀 나가봐야겠소.”
 견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오늘 참 이상하군요.”
 묘화는 목욕탕으로 다가가는 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튿날 아침, 잠이 깼을 때 견우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쪽 눈이 감겨질 만큼 팅팅 부어 있었고 눈두덩이 타는 듯이 쑤시고 아팠다. 목과 가슴팍도 여기저기 벌겋게 부풀어 있었고 가렵고 쓰리고 따가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새 이 무슨 변이란 말인가. 그는 소스라쳐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후끈거리고 가슴이 무섭게 뛰고 있었다. 어지럽고 메스꺼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얼핏 침대 머리 쪽에 있는 창문이 열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망이 쳐져 있지 않는 창이었다. 아, 독충에 물린 게로구나.
 “여보오……”
 견우는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묘화가 허둥지둥 방안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당신이 저 창문을 열어놨소?”
 “아뇨.”
 묘화가 창문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귀신이 열었단 말이오?”
 “글쎄, 그건 술김에 당신이 열었을 수도 있잖아요? 당신 어젯밤 너무 취했더군요.”
 “닥쳐.”
 견우가 버럭 화를 냈다.
 “어머머, 아니 당신 왜 그리 화를 내죠?”
 그가 그토록 호기롭게 화를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 참 이상하군요. 내가 왜 창문을 열어요. 그리고 그까짓 창문을 누가 열었기로서니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허어, 내가 이 모양이 됐는데도 당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소?”
 묘화가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목욕하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자, 이제 일어나서 아침 드세요.”
 “아냐, 지금 속이 너무 메스껍소. 이따 시내에 나가서 먹겠소.”
 

묘화는 한참 동안 멍하니 견우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견우는 다시 침대 에 누워서 간밤의 일을 더듬어 보았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갔다가 친구들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고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취해 있었기 때문에 간신히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간 것까지밖에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술김에 그가 창문을 열 수도 있었겠고 목과 가슴팍의 반점은 식중독 때문에 생길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눈두덩에 나 있는 바늘끝만한 까만 자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윽고 묘화가 산책을 나가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화타가 소파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턱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음이 일고 이마에 뜨거운 열기가 부딪쳐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타가 물었다. 오, 여전히 말을 하는구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화타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창문을 열어 놓은 것은 좋은 방법이었죠. 운이 좋으면 얼마든지 독충에 물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누가 창문을 누가 열었을까? 나리는 몽유병 환자세요? 아냐. 나리께서 잠결에 이상한 짓을 한다고 마님이 말한 적이 있었나요? 없었어. 그럼, 생각해 보세요. 창문을 누가 열었겠어요? 꼭 마님이 열었다는 투로 말하는구나. 아니에요. 전 어디까지나 연달아 일어나는 위험한 사건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누가 그런 어설픈 짓을 일부러 했겠나? 어설픈 짓이라니요? 눈두덩은 틀림없이 호박벌 말벌 나나니벌 땡벌과 같은 독벌이 쏘았을 거구 목덜미와 가슴팍은 틀림없이 박각시 풀쐐기 참노린재 같은 독나방이 스쳐 갔을 거예요. 벌겋게 붓고 가렵고 쓰리고 아프고 열나고 메스껍고 숨 가쁘고 그러죠. 치명적 위험 같은 건 없는걸. 하긴 음식에 독을 타는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죠. 그러나 이미 그 방법이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달리 궁여지책이라도 써야 할 게 아녜요. 화타가 소파 아래서 검붉은 열매 하나를 집어 들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위험이 없다고 했는데 만약 간밤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독사라도 기어 들어왔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뱀골에는 돌틈 나무구멍 찔레나무덤불 다람쥐구멍마다 갖가지 독사들, 살모사 방울뱀 산호뱀 우산뱀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걸 모르세요. 독사를 불러들일 위험이 너무너무 많았다구요. 침실 창가에 걸어놓은 저 새장들을 보세요.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새들, 멧새 솔새 딱새 촉새 참새 방울새 물총새 파랑새 꾀꼬리 휘파람새 찌르레기 메추라기와 그들이 품고 있는 새알들은 하나같이 독사들을 유혹하는 것들뿐이에요.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평소엔 거실 창가에 걸려 있던 새장들이 어제는 왜 침실 창가로 옮겨졌느냐는 거예요. 이걸 보세요. 화타가 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의 손바닥에는 검붉은 열매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게 뭔 줄 아세요? 독사들이 좋아한다는 산딸기에요. 오늘 아침 나리의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더군요. 이래도 어설픈 수작이란 말인가요? 견우는 약간 멍청해졌다. 입가에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젯밤 아내는 나와 한방에서 잤어. 뭣 땜에 자신에게도 위험한 그런 짓을 했겠나? 화타가 낄낄낄 웃었다. 아직도 모르고 계시군요. 마님은 어젯밤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요. 바보짓이야. 모두가 바보 같은 짓들이야. 그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왜 갑자기 묘화가 날 해치려고 하는 거지?  저도 모를 일이에요. 그런데 갑자기라뇨? 그럼, 갑자기가 아니란 말이냐. 미숫가루에 독을 탄 건 바로 어제 일이었어. 그건 그래요. 하지만 제 말을 들어보세요. 지난 주 한밤중에 악 소리를 지르며 잠이 깬 적이 있었죠? 견우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소리쳤다. 응, 맞아. 화요일 밤에 그랬던 것 같아. 왜 그랬었죠? 갑자기 숨이 막혀서 그랬지. 잠을 깨고 보니 얼굴 위에 베게가 얹혀 있더군. 그러니까 베개가 코와 입을 틀어막았던 모양이야. 그때 마님은 어디에 있었죠? 화타가 재빠르게 물었다. 아내는 침대 아래 나동그라져 있었어. 이제 확실하게 생각나는군. 아내와 나는 한 몸으로 엉킨 채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때 아내 다리가 내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고 베개는 아내의 두 발 사이에 끼여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잠버릇이 나빠서 자면서 몹시 뒤척이는데 그러다가 그만 함께 굴러 떨어져 버렸나 봐. 그러나 베개가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 말고는 그가 이미 겪어서 죄다 알고 있는 일. 그렇다. 종종 견우가 잠에서 깨어나 보면 묘화는 그의 어깨 위에 두 다리를 걸쳐 놓고 그의 머리와 얼굴을 짓누르고 죄고 문지르곤 했다. 팰리시즘, 묘화는 팰리스트였다. 그녀가 그만 잘못하여 그의 숨통을 눌렀을 거고 그가 숨이 막혀 확 떠미는 바람에 한데 엉겨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가위눌림 속에서 그토록 빠져 나오려고 허우적거렸던 그 걸쭉하고 시커멓던 혼돈의 늪은 덤불 속에 감춰진 다름 아닌 여자의 샘이었으리라. 아아, 그날 밤 묘화는 얼마나 뜨겁게 예배하였을까. 얼마나 뜨겁게 예배하였을까. 그는 속으로 모든 게 그렇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침대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베개가 얼굴 위로 올라와서 입과 코를 막아버렸다, 이런 얘기로군요. 화타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됐어요. 그 문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베개는 베지 않는 게 좋겠군요. 그럭하겠어. 베게란 늘 귀찮은 존재였으니까. 잊지 마세요. 언제나 눈을 크게 뜨고 살피는 거 말예요. 화타는 말을 마치고 풀썩 뛰어가더니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날 오후 견우는 마침내 개 편(便)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화타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사람과 개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로 하여금 아내를 버리고 개를 철석같이 믿게 해버리는 그런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원, 개 편이 되다니! 사람들은 그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시내로 가기 위해 방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책상 위에 놓인 종이쪽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쪽지엔 ‘해변으로 나오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자는, 말하자면 그것은 묘화가 보낸 일종의 사랑의 편지였다. 아내가 취미로 삼고 있는 이 사랑 놀음은 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것은 어떠한 말이나 몸짓보다도 그를 흥분시켰고 그 아기자기한 유혹을 그는 한번도 뿌리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견우는 시내로 달아날 생각을 고쳐먹고 해변으로 향했다. 이 방갈로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암반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방갈로 양 옆은 나무와 풀이 자라는 비탈이었고 비탈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바다 속으로 뻗어 있었다. 방갈로 앞에는 십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절벽에 만들어 놓은 철책을 두른 돌계단을 통해서만 백사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마(魔)가 붙어 있었던 게 바로 이 계단이었던 것이다. 견우는 계단에 발을 내디디려다 말고 왜 그랬는지, 하나님이 그를 살리려고 그랬는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이상한 게 얼핏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철책(鐵柵)의 이음매가 보일락말락하게 떨어져 있었고 시멘트가 부서져 계단의 돌이 하나 삐져나와 있었다. 만약 그대로 계단을 밟고 내려갔더라면 영락없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오, 하나님! 이런 함정을 만들어놓고 나를 불렀구나.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는 몸을 돌려 집안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떨어진 철책과 망가진 돌계단을 잔뜩 흘겨보면서 동백나무가지를 움켜잡고 조심조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묘화는 비치파라솔 아래 누워 있었다. 벌써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엷은 해수욕복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허벅다리에는 모래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연연한 색깔을 뿜으며 불붙고 있었다. 견우는 한사코 마음을 달래며 그녀 곁에 가만히 가 앉았다.


 “옷 벗고 물 속에 들어갔다 오세요.”
 묘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잔잔해서 그의 마음이 갑자기 흔들렸다. 몸이 떨려오고 심장이 무섭게 뛰놀기 시작했다. 견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갈로로 돌아와 버렸다. 뜻밖에도 화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 말이 옳았어. 모든 게 사실이었어. 하나님, 아내가 날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견우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이성을 잃지 마십시오. 화타가 말했다. 난 어떻게 하면 좋아. 견우는 애원하듯이 화타에게 물었다. 이제야 겨우 눈을 뜨셨군요. 하지만 불행중 다행이군요. 아무래도 계속 피할 수는 없을 거 같아.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지? 저도 답답해요. 마님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땐 그 위험을 제거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무슨 뜻이지? 나리께서 지적하였듯이 마님의 함정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요.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이쪽에서 먼저 치명타를 먹여버리는 거예요. 화타의 눈에 악마의 미소가 스쳐갔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견우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오늘이 토요일이죠? 그럼, 마님이 모터보트를 타고 밤낚시를 가겠군요. 그래서? 모터보트를 잡으세요. 엔진에 붙여 놓으면 출발할 때 폭발해버리는 폭발물이 있어요. 그걸로 날려버리세요. 어떠세요, 감쪽같잖아요. 좋아. 정말 멋있어. 견우는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화타의 말에 정신없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방파제 초입에서 왼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녹슨 닻이 하나 있는데 그 닻 밑동 아래 폭발물이 묻혀 있거든요. 간척지(干拓地)공사 때 빠뜨리고 간 것인데 웬만한 충격에는 안전하니까 그걸 파내서 한번 사용해 보세요. 무엇보다 출처가 감쪽같아서 혐의를 받지 않을 거예요. 자, 이제 서두르세요. 어두워질 때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화타가 단숨에 말을 끝내버렸다. 히야, 살았다. 허허허허 하마터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잖아. 모든 게 네 덕이다. 정말 고맙다. 견우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천만에요. 그럼 성공을 빌게요. 안녕. 화타는 풀썩 몸을 날리더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견우는 집을 나서서 방파제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해질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묘화의 인내심을 거의 한계점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의심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사랑은 운명처럼 단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운명이 끼어들면 사랑이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건 균형이 잡혀 있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지금도 남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확신이야말로 그녀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주고 있고 그녀를 멋있는 여자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모처럼 연휴까지 얻어서 찾아왔는데 이 소중한 만남을 발길로 걷어 차버리다니! 첫날 아침에는 복통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몸을 이끌고 시내로 가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이튿날은 난데없이 밤새 독충에 물렸다고 되먹지도 않은 앙탈을 부리더니 종당엔 나의 간곡한 해변의 사랑마저 뿌리치고 시내로 달아나버렸다. 무엇보다 그의 표정에 떠올라 있는 의혹 불안 초조 공포 적개심 증오심과 같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녀로서는 이틀을 허비하면서 기다려 보았지만 그의 기행(奇行)은 끝나지 않았다. 견우가 집에 돌아온 것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그는 몹시 피로해 보였고 거실로 올라설 때 그의 가랑이에서 모래가 쏟아져 나왔다. 옆구리에 보자기를 끼고 있어서 그게 뭐냐고 묘화가 묻자,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듯 몹시 당황해하면서,  “아하, 이거? 서재에 손볼 데가 좀 있어서 연장을 구해 왔소.”하고는 얼른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견우는 보자기를 책상 아래 있는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혼자 탄식했다. 모터보트가 떠 있는 깊은 바닷물에 버리지 않고 왜 집으로 가져왔을까. 어리석은 자여, 어리석은 자여! 견우는 다시 부리나케 거실로 나갔다. 묘화는 아직도 홀로 앉아 있었다.


 “저녁을 드셔야죠?”
묘화가 물었다. 견우는 황급히 손을 젓고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밤낚시는 언제 떠날 거요?”
그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달이 뜨면 출발할 거예요.”
 견우는 긴장이 확 풀어졌다. 몸에서 힘이 쏘옥 빠져 나가며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는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야만 힘이 솟고 피곤이 가시고 마음이 가붓해질 것 같았다. 견우는 목욕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아, 그러나 이게 그의 마지막 결심이 될 줄이야.
 “나 목욕 좀 하겠소.”


 그는 그의 결심을 말하고 침실로 갔다. 조금 후에 견우는 타월과 세면도구를 챙겨들고 침실을 나와서 약간 비치적거리는 걸음으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타일 바닥에 펄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다리를 쭉 뻗으면서 연거푸 한숨을 후후 내쉬고 나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졌다. 그는 무한한 해방감을 느꼈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다가 마침내 그는 부스스 일어나 욕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우선 욕조 안에 쭈그리고 앉아 마개를 막았고 그리고 오른손을 수도꼭지 밑으로 갖다 댔고 마지막으로 왼손으로 수도꼭지를 가만히 틀었다. 순간, 쏴아. 뜻밖에도 펄펄 끓는 물이 그의 손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감전된 사람처럼 손을 움치며 후닥닥 일어서다가 왼발이 미끄러지면서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그는 욕조 모서리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끓는 물은 계속 수도꼭지에서 욕조 바닥에 번듯이 누워 있는 발가벗은 그의 몸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견우는 뜨거운 물 속에 영영 잠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저녁, 묘화는 생전 처음으로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뜨거운 수증기를 뚫고 들어가서 욕조에 떠 있는 벌겋게 익어버린 시체를 보았을 때 하마터면 그녀 자신도 쓰러져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그러나 허둥지둥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서는 전후불각(前後不覺),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소리 지르며 침실로 달려와 버렸다. 어찌 했길래, 이런 끔찍한 일이. 오, 하나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침대 위에 엎어져 버렸다. 묘화는 정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손으로 가슴을 꼭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걷잡을 수없이 떨리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그녀의 귓가에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방안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왔는지 화타가 침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깰깰거리고 있을 뿐 목소리의 임자는 아무데도 없었다. 묘화는 한참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리고 전화에 대고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도와주세요. 사람이 죽었어요. 여보세요, 경찰이죠? 도와주세요. 사람이 죽었어요. 네? 모르겠어요. 자살은 아닌 것 같아요. 여보세요......” neacbk@naver.com

 

*필자/오태규. 소설가.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소설가로 데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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